인권하루소식

조작간첩 사건 재심 '무죄' 첫 판결

이근안에게 고문당한 함주명 씨, 22년만에 '간첩' 누명 벗어

'고문기술자' 이근안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16년동안 감옥에 갇혔던 함주명 씨가 22년만에 재심을 통해 누명을 벗었다.

15일 서울고등법원 제4형사부(재판장 이호원 부장판사)는 함씨의 자백은 고문으로 인한 것이므로 조사당시 진술서는 증거로 불충분하고, 그를 간첩으로 지목한 남파간첩 홍종수 씨의 증언 또한 모호하고 불일치하다며 무죄 선고했다. 이는 조작간첩 사건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전면 무죄를 선고한 최초의 재심판결로 기록되게 됐다.

이번 판결에 대해 함 씨는 "먼저 22년 동안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벗은게 가장 기쁘다"며 "(조작간첩으로 몰린) 신귀영, 이장형 씨 등 많은 사람들의 진실 역시 밝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아래 민가협)는 이날 성명을 통해 "오늘 사법적 정의가 살아있음을 보여준 서울고등법원의 사려깊고 상식적인 판결을 두손 들어 크게 환영한다"며 "정당한 형사소송절차마저 외면한 채 불법감금, 고문 등 갖은 불법과 인권침해 행위를 자행해온 경찰, 검찰 등 수사기관의 주장에 일방적으로 손을 들어주었던 과거 사법부의 판결과오를 스스로 시정함으로써 사법부의 자성을 촉구한 용기있는 판결"이라고 밝혔다.


22년만에 벗은 누명

1954년 월남한 가족을 만나기 위해 남파공작원으로 자원한 함 씨는 같은해 4월 남파 즉시 자수해 집행유예 3년의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1968년 중앙정보부로부터 '요시찰 대상 해제' 통보를 받기도 했던 그는 1983년 2월 18일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로 영장없이 불법체포되어 45일 동안의 불법감금을 포함해 63일동안 이근안에게 물고문·전기고문 등을 당했다. "남파즉시 위장자수하여 석방된 후…고정간첩으로 활동해왔다"는 혐의로 기소된 그는 1984년 1월 항소심에서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으로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고, 같은해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해 형을 확정했다. 이근안은 항소심 재판 중에 검찰측 증인으로 나와 고문한 적이 없다는 허위증언까지 했다.

이후 함 씨는 16년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 98년 8.15 특사에서 감형으로 석방됐다. 이어 99년 민변 소속 변호사 13명이 장기간의 도피생활 끝에 자수한 이근안을 불법감금독직폭행죄와 허위증언에 의한 위증죄로 고발함으로써 그의 억울함이 풀릴 계기가 마련됐다. 하지만 99년 서울지검은 이미 1990년에 공소시효가 완성되었다는 이유로 이근안에 대해 '공소권없음' 결정을 내렸다. 다만 검찰은 대질심문 등을 통해 "이근안이 함주명을 약 45일동안 불법감금하여 전기고문, 물고문 등 고문수사를 자행하여 상해를 입게 하고, 이근안이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고문한 사실이 없다고 위증한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이근안의 실토를 근거로 함 씨는 지난 2000년 9월 22일 서울고법에 재심청구를 했고, 법원은 2003년 10월 28일 재심개시를 결정했다. 하지만 올해 6월 열린 14차 재판에서도 담당 검사는 "피고인의 항소를 기각하고 원심(당시 사형 구형)대로 선고해달라"고 주문하기까지 했다.


또다른 '함주명'들

함 씨는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수많은 조작간첩사건의 피해자들은 재심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아 여전히 '간첩'의 낙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행 형사소송법 제420조는 "원판결의 증거된 증서, 감정, 통역 또는 번역이 확정판결에 의하여 허위인 것이 증명된 때"(제2호), "공소의 기초된 수사에 관여한 검사나 사법경찰관이 그 직무에 관한 죄를 범한 것이 확정판결에 의하여 증명된 때"(제7호) 등을 재심사유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공소시효가 7년인 고문과 5년인 위증죄는 대부분 공소시효가 완성돼 확정판결을 받을 길이 없는 것. 이런 경우 형사소송법 제422조는 "확정판결을 얻을 수 없는 때에는 그 사실을 증명하여 재심의 청구를 할 수 있다"는 규정을 적용받을 수는 있다. 함 씨 사건의 경우도 이근안이 검찰 조사 과정에서 고문 사실을 인정한 것이 재심개시의 근거가 됐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건에서 법원이 '사실 증명'에 대한 해석을 협소하게 해, 재심이 개시된 사례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1980년 '가족간첩단' 사건으로 15년동안 복역한 신귀영 씨 사례가 대표적이다. 신 씨는 "조총련 간부이자 형인 신수영 씨의 지시에 따라 부산의 주요 군사시설을 촬영"했다는 혐의를 받았으나 94년 신 씨는 "경찰이 구속영장 없이 40∼70일이나 불법감금하고 온갖 고문으로 조작"했다며 재심을 청구했다. 이에 대해 1·2심 재판부가 신 씨의 손을 들었지만, 95년 대법원은 "새로 제출된 신수영 씨의 진술서만으로는 무죄를 인정할만한 명백한 증거라고 볼 수 없고, 신 씨 등이 주장한 관련 경찰관들의 고문, 감금행위도 별도의 확정판결이 없다"는 이유로 이를 뒤집었다.

1차 재심청구에 실패한 신 씨는 목격자 박 아무개 씨가 "피고인들이 버스를 타고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고 증언한데 대해 당시 관련 장소에 도로조차 없었던 사실을 확인하고 다시 재심을 청구해 1심에서 승소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증언이 확정판결에 의하여 허위로 증명된 것이 아니고, 고문이 있었다는 점에 대한 확정판결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며 기각했다. 2004년 6월 대법원 또한 같은 이유로 기각했다.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버렸기 때문에 위증·고문 혐의에 대한 재판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알면서도 법원이 형식논리만을 앞세운 것.


재심사유 확대해야

민가협은 이날 성명을 통해 "이번 판결을 계기로 그동안 인권피해자들이 청구한 재심개시에 대해 법적 안정성을 이유로, 재심재판은 고사하고, 재심개시 결정 자체에 대해서마저 협소하고 인색한 법 해석으로 일관함으로써 진실규명에 소홀하였던 사법부가 이제라도 '최후의 인권보루'라는 위상에 걸맞는 판단을 내릴 것"을 촉구했다.

또 "이미 형이 확정된 사건이라 하더라도 수사기관의 불법행위(불법체포, 불법감금, 고문 등)로 간첩으로 조작된 사건에 대해 재심을 통해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형사소송법상 재심사유를 확대하여 수사과정에서 인권침해가 있었던 경우를 추가하고, 새로운 증거가 발견된 경우를 넓게 인정하는 방향으로 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가협 송소연 총무는 "지금의 재심사유로는 인혁당 사건처럼 사법기관 확정판결이 아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결정문 등으로 재심신청을 하기 어렵다"며 "확정판결 없이도 원판결에 문제가 발견되면 새로운 증거로 받아들여 재심개시 선고를 내려야한다"고 주장했다.


고문에는 시효가 없다

재심을 통한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함께 고문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 또한 필요하다. 하지만 '공소시효 지난 고문은 형사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 검찰과 법원의 완강한 입장이다. 이근안은 그가 저지른 수많은 고문 사건 가운데 재정신청이 받아들여져 공소시효가 정지된 '김성학 납북어부조작간첩사건'으로만 7년형을 선고받아 복역중이다.

지난 11일 이원영 의원(열린우리당) 등 국회의원 145명이 발의한 '반인권적 국가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안'은 △국가공권력에 의한 살인·고문 등에 대해 공소시효 적용을 배제하고 △국가공권력이 이를 조작 또는 은폐하면 그 기간동안에는 공소시효 적용을 정지하며 △손해배상청구에 대해 법 시행 이전에 민사상 소멸시효가 완성된 경우에도 국가가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할 수 없도록 했다.

하지만 법안은 과거 국가범죄에 대해 "법 시행 이전에 공소시효가 완성하지 아니한 범죄행위"에 대해서만 공소시효 적용을 배제할 뿐, 이미 공소시효가 완성된 범죄행위에는 침묵을 지켜 아쉽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