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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연재] 재산권 넘어 '인간답게 살 권리'로

인권단체연석회의 '헌법 기본권' 연속 세미나 ⑥ 사회적 기본권

헌법은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제34조)고 선언하고 △교육을 받을 권리(제31조) △근로의 권리와 최저임금수령권(제32조) △노동3권(제33조) △사회보장수급권(제34조) △환경권(제35조) 등을 보장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권과 재산권이 충돌할 때 사법부는 재산권을 지키는데 혈안이 되어 왔다. 지난달 22일 열린 세미나에서 서경석 교수(인하대 법학)는 "(사회권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헌재가 재산권에 대한 보호만큼은 철저하다"며 "이는 헌법 정신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10월 22일 열린 세미나에서 발제를 맡은 서경석 교수

▲ 10월 22일 열린 세미나에서 발제를 맡은 서경석 교수



재산권과 사회권의 피할 수 없는 충돌

실제로 기업의 이윤과 밀접하게 연관된 노동권의 경우 대법원과 헌재는 끊임없이 사측의 손을 들어 왔다. 96∼97년 노동법·안기부법 개악 당시 도입된 정리해고제가 대표적이다. 근로기준법 제31조는 경영악화를 방지하기 위한 사업의 양도·인수·합병을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로 보고 노동조합과의 성실한 협의 등 요건만 지키면 해고가 가능하도록 해 수많은 노동자들을 길거리로 내몰았다.

1997년 헌재는 퇴직금을 다른 담보채권에 우선해 변제하도록 규정한 근로기준법 제37조 제1항에 대해 "근로자의 생활보장이라는 입법목적의 정당성만을 앞세워 담보물권제도의 근간을 흔들고 기업금융의 길을 폐쇄하면서까지 퇴직금의 우선변제를 확보하자는 것으로서 부당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며 헌법불합치 결정(94헌바19)을 내놨다. 서 교수는 "퇴직금과 담보채권은 같은 재산권이므로 어떤 재산권이 절대적으로 우선할 수는 없다고 본 것"이라고 설명했다.

1995년 대법원도 쟁의행위 시 기존 '무노동부분임금'에서 '무노동무임금'으로 판례를 변경하면서 "모든 임금은 근로의 대가로서 '근로자가 사용자의 지휘를 받으며 근로를 제공하는 것에 대한 보수'를 의미"한다며 "현실의 근로 제공을 전제로 하지 않고 단순히 근로자로서의 지위에 기하여 발생한다는 이른바 생활보장적 임금이란 있을 수 없고, 또한 우리 현행법상 임금을…사실상 근로를 제공한 데 대하여 지급받는 교환적 부분과 근로자로서의 지위에 기하여 받는 생활보장적 부분으로 2분할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다고 판결(94다26721)했다.

당시 소수의견을 낸 정귀호·이돈희·이용훈 대법관은 "(무노동무임금의 경우) 이로 인한 생계 곤란은 정당한 쟁의권 행사를 포기하도록 압박할 것임은 자명하고, 결과적으로 근로자들의 사용자에 대한 교섭력을 약화시켜 근로자와 사용자 간의 대등한 협상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라며 "파업 중에도 사용자와의 종속적 근로관계, 즉 종업원으로서의 신분은 해소되지 아니하고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지위에서 발생하는 임금의 청구권은 여전히 남아 있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서 교수는 "극단적인 경우 (근로계약을 대등한 계약으로 보고) 노동법을 없애고 민법으로 대체하자는 주장도 있다"고 소개했다.


자본 앞에 벌거벗은 노동3권

헌법에서 보장된 노동3권은 법률과 법해석에 의해 무력화되어 있다. 헌법 제33조 제1항은 "근로자는…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고 선언했지만 지입차주 등은 '근로자'가 아니라는 것이 판례의 입장이다.

한편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은 '노동쟁의'의 대상을 '임금·근로시간·복지·해고 기타 대우등 근로조건'으로 한정하고 있어 경영권·인사권·이윤취득권에 속하는 사항은 단체교섭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물론 정치적 목적을 내건 정치파업도 금지된다.

철도·시내버스·수도·전기·가스·병원·은행·통신사업 등은 '필수공익사업'으로 지정돼 노동위원회의 강제중재를 따라야 한다. 이에 대해 2003년 헌재는 "중대한 사회적 혼란이 야기되고 국민의 기초적 일상생활이나 심한 경우 그 생명과 신체에까지 심각한 해악을 초래하며 나아가 국민경제를 현저히 위태롭게 할 수 있다"며 합헌결정(2001헌가31)을 내렸다.


재산권은 성역인가?

헌법 제23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의 재산권은 보장된다"고 못박아 재산권의 '신성불가침성'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 정한다"는 단서를 붙이고 있고 같은조 제2항에서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재산권의 행사를 제한하고 있다.

서 교수는 "재산권의 한계뿐만 아니라 내용까지 법률로 정한다는 것은 입법자가 의회에서 '이것이 재산권이다'라고 선언해야 재산권이 된다는 뜻"이라며 "(현행 헌법에서도) 토지 같은 특수한 생산수단은 중국처럼 영구소유를 금지하는 입법이 가능한데 헌재는 이렇게 해석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 "헌재가 사유재산제도의 절대적 보존을 중시하는 민사재판관들로 구성되는 것이 문제"라며 "헌법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포함돼야 한다"고 말했다. '재산권과 사회권은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서 교수는 "한국은 재산권과 사회권의 충돌을 고민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재산권에 대한 제약이 없는 나라"라고 꼬집었다.

헌법 제119조부터 제127조까지를 포함하는 경제조항들은 흔히 자본주의 시장질서를 떠받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헌법 제119조 제1항은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이어지는 헌법조항은 △적정한 소득의 분배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 방지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 △농지에 대한 경자유전의 원칙과 소작제도의 금지 △중소기업의 보호·육성 △대외무역의 규제·조정 등을 국가의 권한으로 인정해 시장질서에 대한 사회적 통제 가능성을 열어놨다.

이에 대해 정순훈 교수(배제대 법학)는 월간 <에머지> 2000년 3월호 기고를 통해 "경제 영역에서는 <법률에 의하지 않더라도 영업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법치주의의 예외를 인정하고 있다"며 "경제에 대한 무차별적인 간섭이 가능하도록 규정한 헌법상의 경제조항은 자유주의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경제적 자유 보장을 위해 헌법에서 경제에 대한 장을 아예 삭제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교육권의 경우도 마찬가지. 헌법 제31조는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며 무상 의무교육과 평생교육의 진흥 등을 국가의 의무로 하고 있다. 서 교수는 "평등교육 의무조항으로부터 국민이 직접 실질적 평등교육을 위한 교육비를 청구할 권리가 도출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판례의 입장"이라면서 "교육을 받을 권리는 국민이 국가에 대해 직접 특정한 교육제도나 학교시설을 요구할 수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 현재의 해석"이라고 소개했다. 이와 함께 헌재는 과외교습 금지에 대해서는 위헌이라고 선언해 교육권은 단지 '교육을 받는 것을 국가로부터 방해받지 않을 권리'로 축소됐다.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국가의 의무

헌재가 광범위한 입법형성의 여지를 인정하고 있는 사회보장수급권 또한 마찬가지다. 지난해 헌재는 장애로 인한 추가지출비용을 반영하지 않은 '2002년도 국민기초생활보장최저생계비'가 '인간답게 살 권리'를 침해했다며 정신지체 1급 장애인이 낸 헌법소원을 기각(2002헌마328)했다. 당시 헌재는 "국가가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생계급여의 수준을 구체적으로 결정함에 있어서는 국민 전체의 소득수준과 생활수준, 국가의 재정규모와 정책, 국민 각 계층의 상충하는 갖가지 이해관계 등 복잡 다양한 요소를 함께 고려해야"한다며 '인간다운 생활'이 불가능한 현행 급여수준을 정당화했다.

당시 헌재는 '인간다운 생활'의 의미를 "그 자체가 추상적이고 상대적인 개념으로서…여건에 따라 어느 정도는 달라질 수 있는 것"이라고 둘러댔다. '인간다운 생활의 기준'에 대해 서 교수는 "생물학적 최저생존수준이 아닌 육체적 정신적 통일체로서의 인간이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정도"여야 한다고 밝혔다. 또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받아야 하는데, 현재는 능력 이상 일하고 일한 만큼도 못 받고 있지 않나"라고 말했다.

한편 헌재는 같은 결정에서 "국가가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헌법적 의무를 다하였는지의 여부가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된 경우에는, 국가가 최저생활보장에 관한 입법을 전혀 하지 아니하였다든가 그 내용이 현저히 불합리하여 헌법상 용인될 수 있는 재량의 범위를 명백히 일탈한 경우에 한하여 헌법에 위반된다고 할 수 있다"며 선을 긋기도 했다.


사회권 실현을 위한 운동 전략

이날 한 참석자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권은 법률로 보장되지 않으면 무의미한데 기본권일 수 있는가?"라고 묻자, 서 교수는 "사회권은 자유권에 비해 헌법상 역할은 적지만 헌법전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이 무의미하지는 않다"며 "헌법에서 기본권 보장을 위해 법령에 명시적인 입법위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입법자가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국민이 사회권 보장을 위한 입법을 요구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답했다.

이런 맥락에서 서 교수는 헌법해석을 위해 사법부에 기대기보다는 의회를 강제해 법률을 만드는 전략을 사회권 운동에 주문했다. 그는 "헌재에 기댈 것은 더 이상 없다"며 "보통선거로 노동자 대표가 국회로 가면서 의회의 기능을 축소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으며 1987년 항쟁 이후 헌재가 등장한 것도 같은 이유"라고 설명했다. 또 서 교수는 "법률 제·개정 운동을 통해 사회권을 관철시키는 것은 가장 강력하지만 가장 마지막 대책"이라며 "자본주의 사회의 사회권은 2차대전 이후 노동자 투쟁의 일정한 성과 덕분에 점차 고조된 권리로 많은 사람들의 피땀과 눈물을 통해 가능했다"고 말했다. 입법은 '인간답게 살 권리'를 요구하는 투쟁의 성과물일 뿐이라는 것.


환경권의 사법적 실현

사회권의 다른 권리에 비해 헌법 제35조 제1항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와 국민은 환경보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는 환경권은 다른 사회권에 비해 사법적 실현 가능성이 좀더 열려 있다. 서 교수는 "침해와 손해 사이의 인과관계는 과학적으로 엄밀한 증명이 필요 없고 오히려 가해자가 반증을 하는 경우에만 부인된다"며 "규범을 다 지켜도 피해가 발생하면 가해자가 책임을 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일반인이 통상 견딜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서는 피해에 대해서만 위법성이 인정된다. 서 교수는 "대상지역 외 주민도 재판을 청구할 수 있도록 환경쟁송의 청구인(원고) 자격을 확대하는 것이 과제"라며 "환경권의 사법적 실현방법은 다른 개별 사회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밝혔다.


자본주의적 사회권과 사회주의적 사회권

한편 서 교수는 "사회권이 공동체가 급부를 담당하는 것이라고 하면 사회권을 보는 자본주의의 시각과 사회주의의 시각은 인식 자체가 다르다"며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사적소유가 부정되고 의료 등 모든 급부를 국가에서 제공하므로 사회권이라는 말조차 필요 없다"고 소개했다. 자본주의에서는 사회권 실현 의무를 국가가 지고 있는 반면 사회주의에서는 이미 국가가 급부를 제공하고 있고 거기에 개인이 기여해야 한다는 점에서 권리이자 의무가 된다는 것.

이에 따라 헌법 등 규범의 의미까지 달라진다는 것이 서 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자본주의에서는 규범이 위계를 가져 헌법 위에 군림하는 규범은 지배세력의 의중 말고는 없지만 사회주의에서는 헌법 위에 당 강령이 있다"며 "사회주의 헌법은 기존 투쟁 성과물을 법조문으로 만들어 놓은 것일 뿐 앞날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결국 사회의 미래는 당에 의해 대변되는 인민의 의사에 따르게 되었고 현존했던 사회주의 국가의 특권계급에게는 규범이 아무런 제약을 가하지 못했다. 서 교수는 "이 때문에 현존했던 사회주의 국가의 말기에는 규범의 중요성이 제기되기도 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