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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 인권교육, 날다

[인권교육, 날다] 사회권은 어떻게 인권이 되었나?

지금은 없지만, 법에는 없지만 권리가 되는 사회권

‘4천만 원짜리 전셋집을 순식간에 6천만 원으로 인상해도, 딱 4천만 원밖에 없는 세입자는 계약 만료와 함께 군말 없이 집을 비워줘야 마땅하지!’

‘대학에 진학한 스무 살 기초수급대상자는 학교 다닐 동안은 기초수급자 자격을 유지할 수 있지만 진학도 못(안) 하고, 정해진 자활근로도 하지 않는 스무 살 청년과 그 가족은, 국가가 책임질 바 아닌 것! 돈 들어갈 학생도 아닌데 스무 살이나 먹은 청년과 그 가족은 알아서 먹고 살아야지!’

“끄덕, 끄덕”
“뭐, 그렇지”
“법으로 정해진 전월세 계약이고, 법으로 정해진 기초수급자 자격인데, 뭐 어쩌라고?”

그 잘난 법으로 치면, 뭐 어쩔게 없다. 하지만 “인권은 실정법을 우선한다.”고 하지 않았나? 뭐, 어떻게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왜냐고? 아니… 뭔지… 억울하잖아!

날개 달기

이런 ‘답답한, 골치 아픈, 혹은 당연하고 중요한…’ 사회권을 이야기하는 자리가 있었다. ‘사회권’을 권리로 풀어내는 인권교육. 6월 24, 25일 진행된 인권교육가의 역량강화를 위한 워크숍 <인권교육 오르락내리락 고개 넘기>에서 인권감수성, 반차별 그리고 학생인권, 장애인권, 사회권을 주제로 인권교육이 펼쳐졌다. 이중 사회권을 토론하는 주제방은 단연 인기였다. 사회권을 다루는 인권교육의 갈급함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모두, 대체 사회권은 어떻게 교육할 수 있는가 하는 관심으로 하나 둘 모였다.

더불어 날개짓 1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권리들 중 사회권이라 불리는 권리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그 내용은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권리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것이 사회권 교육의 목표였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진행은 이랬다. 가족의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최저생계비의 월급으로 사는 청소 노동자 이야기, 작업 거부로 구속된 이주노동자의 이야기, 대학도 자활근로도 선택하지 않아 기초수급에서 제외가 된 스무 살 가장 등. 너무도 있을법한 아니, 있었던 이야기들을 준비했다. 그리고 왠지, 법적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이야기들. 그것도 주요한 포인트이다. 모둠별로 하나씩 이야기 쪽지를 선택했다. 그리고 각 모둠은 해당 사례에서 필요한 인권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주장할 수 있을지, 다른 모둠을 설득할 수 있는 주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야기쪽지 예> 43세 남성 현준
2년 전 다니던 자동차 공장에서 정리해고된 현준은 아직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이사짐 센터에서 계약직으로 일을 하고 있다. (…) 집에는 나이든 어머니와 중학교 1학년인 딸 한 명이 서로를 보살피며 지내고 있다. 2년 전 이사 온 지금의 집은 방이 세 개 있는 반지하 집이다. (…) 그래도 전세 4천만 원으로 사는 것 치고는 넓다고 생각하며 지내고 있다. 다만, 반지하라 워낙 습한데다가 큰 비가 오면 천장에 비가 새 비올 때마다 고생이다. (…) 그런데 며칠 전 집주인이 전화를 걸어와 두 달 후 재계약을 할 때는 전세금을 2천만 원 올려달라고 한다.


토론을 하면서, 해당 모둠에서는 자기 사례에서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찾아 이야기했고, 다른 모둠은 그 주장을 반박하는 논거들을 제시했다.

애초 이 활동은 이야기 쪽지를 맡은 모둠이 주장한 권리에, 설득력이 있으면 ‘권리’마다 스티커를 붙여주고, 여타 모둠에서는 그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정책이나 방안을 제안하는 식으로 짜였다. 그리고 정책이나 방안을 제시가 공감이 가면 역시 그 정책에도 스티커를 붙일 계획이었지만 정책이나 방안을 제시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권리라는 주장 자체에도 반론이 만만치 않아서 설득력 있는 권리주장을 마무리하는 것도 필요했다. 그래서 사례를 중심으로 ‘권리 주장 vs 반박’의 형식으로 활동이 이끌어졌다.

사례를 보고 뽑아낸 권리들

▲ 사례를 보고 뽑아낸 권리들



더불어 날개짓 2

<이야기 쪽지> 속의 43세 남성 현준이 주장할 수 있는 권리로 다음과 같은 것이 뽑혔다.

- 안정적 고용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
- 가족 돌봄 서비스(학생, 노모) + 상담
- 최저임금 보장(최저+α)
- 세입자의 권리 (임대료 상한선, 최저주거기준)
- 쾌적한 주거 환경에 살 권리
....

이러한 권리 주장에 대해 반론이 시작됐다.



☹반론 : 임대료 상한선이나 최저주거기준을 두자고 하는데 어차피 이런 것은 사적인 영역인데, 여기에 국가가 개입해도 괜찮은 것인가? 임대인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텐데, 그들도 대출을 받아서 집을 산 것일 텐데.

이에 대해 권리주장 측은
☺권리 : 갑자기 올린 것이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임대를 한다면, 적어도 이 정도는 지켜야 한다는 의무를 지우자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개인의 문제로 볼 수도 있지만, 세입자들도 국민인데, 여기에 국가의 개입은 가능하지 않나? 그리고 세입자는 약자이기도 하다. 또 (세입자들이 집을 얻지 못하면) 사회적 비용이 들어가야 할 부분이 생기는 것이다.

국가 개입의 이유가 이후 사회적 비용을 덜 들이기 위해서라고 얘기한다면 사람의 권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물론 권리가 있으니까 국가 나서야 한다는 주장을 반복하는 것으로는 충분히 설득 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집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사회적 비용을 들이게 되니,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은 앞뒤가 바뀐 것이 아닌지? 그리고 정말 ‘갑자기’ 올리는 것만이 문제인가? ‘너무’ 올리는 것은 문제가 아닌지? 집 계약은 사적 영역이어야 하는가? 등등 이어지는 질문이 많지만 일단 초반이니 몇 가지 주장을 더 살펴보자.

☹반박 : 왜 굳이 국가가 집을 얻는데 개입해야하나? 세입자가 전세 4천으로 구할 수 있는 집, 서울 외곽으로 나가면 비도 안 새고, 지하도 아닌 집에서 살 수 있지 않은가?
☺권리 : 집은 살아 온 터전이고 집은, 관계를 맺는 곳이다. 단순한 집이 아니라 관계와 삶이 있는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문제로 떠넘길 수 없는 것이다. 파는 물건도 기준을 두고 생산하도록 하는데, 집에 최저기준을 두는 것이 부당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불량제품을 팔면 안 되는 것처럼 불량 집을 파는 것을 제지하는 것은 문제가 없고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당연하다.

☹반박 : 생산자와 수요자의 관계로 보면, 낡은 집에 들어갈 형편인 사람도 있고, 좋은 집 들어갈 형편의 사람도 있는 것 아닌가? 각자 알아서 개인이 선택하면 되는데 왜 국가가 개입을 해야 하는가?
☺권리 : 집의 조건은 시설뿐만 아니라 환경도 요인이 된다. 아파트가 비싼 이유도 그러한데, 비가 새는 것도…??

☹반박 : 안정된 직장을 가질 권리만 있고, 열심히 일할 의무는 없는가? 현준의 해고는 사업주 입장에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한번 고용됐다고 평생 고용해야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더욱이 이런 권리를 국가에 요구하는 것인가 사측에 요구하는 것인가?
☺권리 : 회사와 국가에 둘 다 요구하는 것이고, 이런 식으로 해고가 되면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져 재취업도 어렵게 된다.

☹반박 : 사실 블랙리스트는 그저 추측이고, 고용은 사업주의 마음이데, 회사에 안정된 직장을 요구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국가면 모를까…….
☺권리 : 해고가 개인의 문제로만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사회구성원으로 개인이 어려움을 겪는데, 국가차원에서 해결하는 것은 마땅하다. 사회적 비용을 치러야하는 것 아닌가.

☹반박 : 현준은 최저임금, 최저 생활 등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쾌적한 주거환경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쾌적한 주거환경’은 최고가 아닌가? 그리고 사람마다 이러한 기준은 모두 차이가 있는데, 최저에는 동의하겠지만, 최상은 어떻게 권리로 요구할 수 있는가?
☺권리 : 비가 새지 않는 집... 정도... ㅠ

예상과는 달리 사뭇 진지한 토론이 됐다. 사실 이 활동을 기획하면서 기대와 예상은, 조금은 엉뚱하고, 조금은 두서없는 그래서 ‘쫌 재미있는 프로그램일 것’이었다. 한데, 처음부터 끝날 때 까지 무척 무겁고 매우 진지한, 박 터지는 고민이었다는 것.

이런 이야기쪽지를 던져 놓고, ‘쫌 재미있는’ 토론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냐는 아우성이 귓전을 울리기는 한다. 사회권을 권리로 주장하는 데에는 특히 필요한 것이 있는 것 같다. 지금은 없지만, 법에는 없지만, 사람들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렇지만 권리이기 때문에 만들어 가는 것. 상상력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권리 주장과 반론’이라는 짧은 토론형식이 이런 상상력을 발휘할 수 없게 만들어 이 활동을 진지 모드로 빠져들게 했지만, 그래도 사회권의 구체적 주장을 짜보는 드문 시간이었다.

아쉬운 것은 반박의 근거가 권리 주장보다 촘촘해 보이고, 현실적이고 그래서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는 것. 하지만 권리가 되지 못하는 것이 논리의 부족 때문인지, 아직은 안개 속이다. 예를 들어 집이란 것이 적당한 가격에 맞춰 사는 곳이 아니라 만남이 있고 생활이 있는 삶의 터전이라는 주장은 서로 ‘다른 생각’이다.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결을 잘 찾아내는 것이 필요할지 모른다.

사회권은 ‘집도, 교육도, 건강도 권리다’는 당연한 말을 하는 교육이 아니라 ‘최저생계비’가 인간다운 삶의 기준이 아님을 얘기하고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펼치는 교육, 지하 셋방이 돈 없는 사람의 안타까운 개인 문제가 아니라면 누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이야기하는 교육, 이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날 사회권을 교육한 진행자의 말을 빌자면 “인권이라는 것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고, 이것이 권리라면 기존의 제도를 얘기하고 그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하지만 사회권을 실현할 수 있는) 해법이 있어서 권리가 되는 게 아니라 권리이기 때문에 해법을 찾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사회권을 만드는 시작이다.

덧붙임

고은채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