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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반론기고] 배경내 씨의 <'역사적 진실을 알 권리'를 위하여>를 읽고

도청테이프 엑스파일, 공개만이 능사는 아니다

[편집자주] <인권하루소식>은 2881호에 게재된 <'역사적 진실을 알 권리'를 위하여>에 대한 반론을 싣는다.

지난달 25일 인권하루소식 움틈 꼭지에 배경내 씨가 쓴 <'역사적 진실을 알 권리'를 위하여>(아래 <위하여>)란 기사는 내 이목을 확 끌어당겼다. 불법도청 테이프, 소위 엑스파일의 공개 여부를 놓고 정치권과 시민사회 내에서 다양한 입장들이 충돌하는 가운데, 같은 단체 '인권' 활동가인 경내 씨가 도청테이프를 공개하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했기 때문이다.

과거 부정부패 권력형 비리에 관한 진실이 담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도청테이프! 하지만 엑스파일의 공개는 도청당한 당사자의 자기정보결정권을 정면으로 침해하는 것이기에, 내게는 도청테이프를 공개하라고 대놓고 주장할 수 없는 '인권'적 갈등이 존재한다. 특히 엄청난 무게의 역사적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전무후무한 기회에 흥분하여, 자기정보결정권에 대해서는 '공익을 위해 희생될 수 있는 사익'이라는 식으로 쉽게 결론지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에 나는 이례적으로 <위하여>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공적 정보와 사적 정보의 구분 모호

<위하여>에서 경내 씨는 엑스파일에 담긴 정보를 '사적 정보'와 '공적 정보'로 구분하고, 역사적 진실과 관련된 '공적 정보'에 대해서만 공개할 있도록 하자고 제안한다. 경내 씨의 정의에 따르면, 사적 정보는 타인에게 유출되었을 경우 당사자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거나 차별을 유발할 수 있는 정보이고, 공적 정보는 역사적 진실을 담고 있어 여러 시민에게 널리 알려지고 공유될 때 비로소 가치를 지니게 되는 정보이다. 이런 이유로 공적 정보에 접근할 주체는 테이프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고, 따라서 공적 정보에 한해서 엑스파일의 내용을 공개하는 것은 자기정보결정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 정의는 다분히 자의적일 뿐더러, 둘 간의 경계 또한 모호하다. 경내 씨의 정의에 따르더라도 사적 정보와 공적 정보는 서로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며, 어떤 정보는 공적 성격과 사적 성격이 뒤섞여있을 수 있다. 이럴 경우 해당 정보를 공개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경내 씨는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

흔히 역사적 진실이 담긴 정보뿐만 아니라 특정 권력집단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악용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정보(예를 들어 운동단체나 노동조합의 일거수일투족, 심지어 아주 사적으로 진행되는 사상학습 모임까지)도 다분히 공적인 성격을 띠게 마련이다. 공적 성격을 상실한 순수한 개인정보는 특정 권력집단에게조차 별다른 이용가치가 없다. 따라서 자기정보결정권의 진정한 보장은 순수한 사적 정보뿐만 아니라 공적 성격이 강한 정보에까지도 예외없이 적용되어야 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엑스파일의 내용을 사적 정보와 공적 정보로 구분하고, 사적 정보에 대해서만큼은 자기정보결정권을 철저히 보장해 주겠다는 것은 자기정보결정권의 핵심을 비껴간 문제의식이다. 자기정보결정권을 보장하는 데 있어서, 사적 정보와 공적 정보는 구분될 필요가 없다.


도청테이프 공개는 적법절차 정신의 후퇴

경내 씨는 또 일반원칙으로서 '불법 취득한 정보는 공개되어서 안 된다'는 주장의 타당성을 인정하면서도, 이번에 폭로된 엑스파일은 예외라고 주장한다. 엑스파일은 과거 그리고 최근까지 정보기관에 의해 저질러진 광범한 사찰 내용과 국가권력의 기업·언론과의 유착관계를 담고 있는 결과물들로, 그 동안 정보기관에 의한 사찰이 누구를 대상으로 어느 정도 광범위한 규모로 이루어졌는지, 국가권력과 기업·언론이 어느 정도로까지 유착되어 왔었는지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서 엑스파일의 공개는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테이프가 공개된다면 거기에 담긴 많은 정보들이 하나의 사실로 채택됨으로써 역사적 진실의 실체는 매우 광범하게 규명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불법 취득된 정보를 근거로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게 되면, 이는 절차적 정당성을 갖지 못한 정보를 합법적으로 승인하는 꼴이 된다. 절차적 정당성을 갖지 못한 정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독수독과' 및 '미란다' 원칙 등으로 확고히 자리잡은 것인데, 엑스파일의 공개는 이러한 적법절차의 핵심 정신을 후퇴시키는 것이다.

물론 독수독과 및 미란다 원칙과 엑스파일 공개는 다른 차원의 문제일 수 있다. 독수독과 및 미란다 원칙은 범죄행위에 대해 적법절차를 준수하지 않고 수집된 정보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반면 이번 엑스파일 공개는 역사적 진실에 대해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것으로서, 법적 처벌을 전제로 한 증거능력의 인정 여부와는 무관한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 진실에 대해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려는 목적은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 실정법으로 처벌하기 어려운 범죄행위에 대해 역사적으로라도 단죄를 하겠다는 의미가 강하다. 이런 의미에서 엑스파일의 공개는 역사적 심판의 증거로 기능하게 될 공산이 크며, 결국 절차적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한 정보들이 진실규명이라는 결과적 정당성을 이유로 승인되는 결과를 낳는다.


테이프의 공개에 따른 악용 가능성

경내 씨는 엑스파일의 내용을 공개한다고 해서 반드시 불법도청을 부추기게 되거나 파파라치의 천국을 만들게 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과거 정보기관에 의해 자행된 불법도청의 진실을 널리 파헤치고 알림으로써 불법도청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일깨우고 향후 이러한 관행을 엄격히 처벌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게 되면 정반대의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이고,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램도 한편으론 갖는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만약 경내 씨의 예상과는 달리 특정 권력집단이 비판세력의 탄압을 위해 도청을 자행하고 이를 공공의 정보라며 공개하는 카드를 꺼낸다면……'이라는 가정을 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경내 씨도 이러한 우려에 대해 인정하면서, 과거 부정부패 권력형 비리에 관한 '역사적 진실'에 대해 이번 기회에 한해서만 예외적으로 특별법을 만들어 공개하자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예외를 주장하는 것이 이후 악용 가능성에 대해 얼마만큼 방패막이가 되어줄 것인지는 의문이다.

예외라는 것은 그것 자체로 또 하나의 원칙이 되어야만 의미가 있을 수 있다. 반인도적 국가범죄에 대해 공소시효의 적용을 배제하자는 주장을 예로 들어 보자. 공소시효가 일반적인 인권의 원칙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반인도적 국가범죄에 해당할 경우에는 '언제나' 공소시효 적용을 배제하자는 것은 또 하나의 원칙을 주장하는 셈이다. 하지만 경내 씨의 주장은 부정부패 권력형 비리 '일반'이 아니라, '이번' 엑스파일에 담긴 내용에 대해서만 도청정보 공개불가의 예외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는 또 하나의 원칙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도청정보의 공개여부를 개별 사안별로 각각 판단하는 선례로 남게 된다.

이렇게 되면 도청정보의 공개여부는 당시의 정치상황에 따라 좌우될 공산이 크며, 특정 권력집단에 의해 충분히 조작 가능한 국민여론 혹은 국민합의에 따라 제2, 제3의 엑스파일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이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나는 오히려 이번 엑스파일 사건을 계기로 부정부패 권력형 비리 일반에 대해서는 그것이 도청정보라 할지라도 공개 가능하다는 것을 일반적인 원칙으로 주장하는 편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엑스파일 비공개로 인한 실익

잠시 눈을 돌려 한국사회의 열악한 프라이버시 현실을 보자. 안전과 예방이라는 명분 아래 감시카메라가 거리 곳곳에 넘쳐나고, 주민등록을 위해 동사무소에서 찍은 지문 정보가 어느새 경찰청으로 옮겨져 범죄수사에 활용되고, 입사나 인터넷 회원가입 시 필요 이상의 개인정보를 요구받으며, 각종 계약서에 적은 자신의 정보가 어디서 어떻게 활용되는지 본인 스스로는 정작 잘 모르고 있다.

이 모두는 자기정보결정권에 대한 개념이 희박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만약 자신의 정보에 대해서는 자신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타인의 정보는 반드시 당사자의 동의 아래 처리되어야 한다는, 그리고 국가는 이러한 프라이버시권을 보장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원칙이 승인되고 있다면, 국가나 기업은 국민의 개인정보를 행정편의나 자신들의 구미에 따라 일방적으로 처리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이번 엑스파일 사건을 계기로 자기정보결정권에 대한 인식이 획기적으로 바뀌고, 이를 토대로 프라이버시권 보장의 수준이 비약적으로 진전하기를 바란다. 자기정보결정권의 핵심은 자신의 정보는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타인에게 제공된 정보라도 당사자의 동의에 따라 처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는 당연히 엑스파일의 내용을 당사자에게 통보해야 하며, 그 공개 여부, 심지어는 폐기 여부까지 철저히 당사자의 의사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

그런데 엑스파일의 내용이 부정부패 권력형 비리에 관한 것들이라면, 자신과 관련된 엑스파일의 내용을 공개해도 좋다고 동의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번 엑스파일 사건을 계기로 자기정보결정권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획기적으로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정부패 권력형 비리의 실체를 밝힐 수 있는 정보라도 당사자가 원치 않는다면 국가는 그 정보를 공개하지 않으며 심지어 당사자가 원한다면 그 정보를 폐기한다고 했을 때, 범죄사실과 무관한 각종 정보의 처리를 위해서는 당연히 당사자의 의사 및 동의가 필수적이라는 주장이 훨씬 더 힘을 받을 것이다.

다만 현재 국가는 자기정보결정권에 입각하여 엑스파일을 제대로 처리하는 것만큼이나, 과거 부정부패 권력형 비리에 대한 실체규명을 요구받고 있다. 따라서 역사적 진실규명을 위하여 도청정보의 공개가 매우 필요하다는 점을 설득력있게 제시함으로써 엑스파일에의 공개에 당사자 스스로가 동의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진실규명은 제한적이라도 합법정보를 통해서

도청테이프를 공개하지 말자는 주장에 대해 끊임없이 제기되는 우려는, 그렇게 되면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작업이 어렵게 되고 결과적으로 과거 부정부패 권력형 비리의 진실이 묻혀져 재발방지의 효과가 없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나도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자는 데 대해서는 두 손 들고 찬성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엑스파일의 공개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적 진실이란 개별 정보들을 모두 모은 총합이 아니라, 개별 정보들간의 맥락과 관계 그리고 다양한 조합에 의해 근접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는 데 개별 정보의 공개가 필수적인 것은 아니며, 그러한 개별정보들을 공개하지 않고서도 이를 단서로 조사를 진행하여 다른 증거들을 합법적으로 찾아나감으로써 (완벽하게는 아닐지라도 상당 정도는) 역사적 실체가 규명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는 출발점은 엑스파일의 '공개'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이다.

불법 취득한 정보를 통해서 역사적 진실의 실체를 규명하기보다는, 진실규명의 결과가 비록 제한적이고 만족스럽지 못하더라도, 적법절차에 따라 획득된 정보만으로 진실규명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 이미 확립된 인권의 원칙을 후퇴시키지 않으면서도 역사를 일보 전진시키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일각에서는 국가가 엑스파일의 내용을 보는 것 자체도 당사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자기정보결정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어불성설이다. 엑스파일의 내용이 공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내용이 누구와 관련되어 있는지 확인할 길은 전혀 없다. 따라서 엑스파일의 내용을 당사자에게 알리고 그 공개 여부를 묻기 위해 엑스파일의 내용을 열람하는 것은, 자기정보결정권을 보장하려는 국가의 불가피한 조치로 이해되어야 한다. 당사자의 동의를 '구할 수 없는 상황'과 당사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는 행위'는 분명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독립된 위원회와 강력한 조사권 요구해야

나는 노회찬 의원이 엑스파일의 일부 녹취록을 근거로 소위 '삼성의 떡값검찰' 7인의 명단을 공개한 후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주목한다. 김상희 법무부 차관이 사퇴하는 등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그린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는 김 전 차관을 포함하여 당사자들이 모두 '삼성떡값' 수수 사실을 부인하면서 법적 소송을 제기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는 도청테이프의 내용이 공개되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역사적 진실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는 점을 의미한다.

따라서 역사적 진실규명을 위해 보다 중요한 것은 도청테이프의 공개 자체보다도 다양한 증거를 찾을 수 있는 권한인 것이다. 따라서 나는 도청테이프를 단서로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독립된 위원회를 구성하고, 이 위원회에 수사에 준하는 강력한 조사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경우에서 보듯이, 지금까지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데 필요한 조사권한이 충분히 주어진 적은 한번도 없었다. 조사는 수사의 권한을 침범할 수 없다는 이유로 언제나 불충분한 조사권만이 부여됐는데, 과거 부정부패 권력형 비리에 관한 역사적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국민의 강력한 여망을 담아 이러한 관행을 깰 필요가 있겠다.

그리고 만약 이번에 강력한 조사권이 주어져 역사적 실체가 상당 부분 밝혀지고 이에 대한 국민의 호응이 이루어진다면, 현 국가인권위원회나 곧 출범할 과거사정리위원회에 대해서도 조사 권한의 강화가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확산시킬 수 있을 것이다.

독립된 위원회는 엑스파일의 내용을 당사자의 의사에 따라 철저히 처리하면서도, 역사적 진실에 대해 독자적으로 조사한 결과에 대해서는 공개할 수 있다. 아울러 조사결과 중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은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고발 및 수사의뢰를 할 수 있어야 하겠다. 위원회의 고발 및 수사의뢰에 대해서는 현 검찰이 아니라 특별검사를 도입해 수사를 진행하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엑스파일의 관련 당사자들이 검찰조직의 곳곳에 포진하고 있을 수 있는 상황에서, 현 검찰의 수사는 국민의 신뢰를 획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