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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움틈] '역사적 진실을 알 권리'를 위하여

'도청' 테이프라도 그 속에 담긴 진실이 밝혀져야 하는 이유

지난 18일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이 과거 안기부 도청테이프에 담긴 '떡값 검사'들의 실명을 공개한 이후, 도청테이프에 담긴 정보 공개의 타당성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 더욱 가열되고 있다. 검사 실명과 테이프 녹취록의 일부를 공개하면서 노 의원은 "떡값 수수 검사 명단을 보고도 이를 국민들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국회의원의 직무유기"라고 말했다. 반면 서울지방변호사회는 23일 성명서를 내어 "형식 여하를 막론하고 불법도청된 내용을 공개하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사생활의 비밀 및 통신의 자유를 정면으로 침해하는 것"이라며 도청테이프 공개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 노 의원을 비롯해 지난달 22일 도청테이프 내용을 보도한 MBC와 노 의원이 공개한 검찰 실명을 소개한 조선일보에 대한 수사도 함께 촉구했다.

지난달 MBC의 안기부 도청테이프 보도 이후, 이른바 'X파일' 문제는 연일 언론의 탑화면을 장식해 왔다. 그러나 추가로 압수된 274개 안기부 도청테이프와 녹취록까지 그 핵심 내용을 어떤 식으로든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과 불법으로 획득된 정보는 어떤 일이 있어서도 공개되어서는 안된다는 주장 사이의 간극은 여전히 팽팽하다. '알 권리' 존중 차원에서 사적 정보를 제외한 나머지 정보는 정당한 절차에 따라 공개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통신의 비밀 혹은 자기정보결정권 존중 차원에서 불법으로 취득된 정보라면, 더군다나 당사자의 동의 없이 절대 공개해서는 안되는 것인가. 여론은 공개 쪽이 우세하지만, 공개에 반대하는 주장도 그 뒤에 어떤 의도가 숨어있든 간에 나름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이 난제를 풀기 위해서는 알 권리 일반이 아니라, 과거청산의 차원에서 '역사적 진실을 알 권리'에 무게를 두고 접근하는 편이 타당해 보인다. 알 권리 혹은 정보접근권 차원에서 통신비밀의 자유를 침해하며 불법적으로 수집된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을 일반화할 경우, 의도치 않은 역효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테이프 공개는 자기정보결정권을 침해하는가

도청테이프 공개나 이를 위한 특별법 제정에 반대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테이프에 담긴 내용이 개인정보인 만큼, 자기정보결정권 존중 차원에서 당사자의 동의 없이는 결코 공개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테이프에 담긴 내용이 순수한 '사적 정보'일 경우 당연히 정당성을 갖는다.

그런데 도청테이프에 담긴 정보는 순수한 '사적 정보'와 역사적 진실과 관련된 '공적 정보'가 뒤섞여 있을 것이다. '사적 정보'는 특정한 수집 혹은 이용 목적을 지닌 타인에게 유출되었을 경우 타인에게는 가치있는 것이지만 당사자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거나 차별을 유발할 수 있기에 마땅히 당사자인 '개인'에게 궁극적 결정권을 쥐어주어야 할 정보이다. 다른 누군가가 공개를 강요하거나 함부로 수집할 수 없어야 하는 정보인 셈이다. 반면, 역사적 진실에 관한 '공적 정보'는 여러 시민에게 널리 알려지고 공유될 때 비로소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인 만큼, 그 정보에 접근할 권리 주체는 테이프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아닌 '시민'이 된다.

따라서 후자의 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자기정보결정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민들에게 역사적 진실을 알 권리를 보장하는 의미를 갖게 된다. 역사적 진실에 관한 정보는 '자기만의 개인정보'라고 주장할 수 없는, 공적 성격을 이미 갖고 있기 때문이다.


불법으로 취득한 정보는 공개되어서는 안되나

다음으로 테이프 내용이 아무리 역사적 진실을 담은 정보라고 해도 불법도청에 의해 수집된 위법한 정보인 만큼 공개되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있다. 절차적 정당성을 갖지 못한 정보는 누구의 접근도 이루어지지 못하게끔 즉각 폐기되어야 마땅하다는 입장인 것이다. 게다가 특별검사든 진실위원회든 간에 진실규명이나 내용 공개를 염두에 두고 불법도청된 테이프 내용을 듣게 된다면, 그 과정 자체가 '2차 도청'에 해당하는 인권침해라는 점도 지적한다.

이러한 주장은 일반 원칙으로서는 타당성을 갖는다. 그러나 이번에 폭로된 테이프들은 과거, 그리고 최근까지 정보기관에 의해 저질러진 광범위한 사찰 내용과 국가권력의 기업·언론과의 유착관계를 담고 있는 결과물이다. 비록 불법적인 절차를 거쳐 수집되었다고 해도 그 정보를 열어보지 않는 한, 그동안 정보기관에 의한 사찰이 누구를 대상으로, 어느 정도 광범위한 규모로 이루어졌는지, 국가권력과 기업, 언론이 어느 정도로까지 유착되어 왔었는지 진실을 규명하고 알릴 도리가 없다. 따라서 정보기관이 불법적 절차를 통해 정보를 수집해오던 관행을 일소하기 위해서도, 정·경·언·검 유착의 역사적 진실을 알고 기억하기 위해서도 테이프 내용 공개는 불가피하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테이프에 담긴 위법성과 부정의를 바로잡되, 정보기관의 위법행위 문제도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미 검찰이 불법도청에 초점을 맞춰 관련 수사를 진행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검찰이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은 위법행위에 대한 수사결과 이외에 다른 테이프 내용이나 사찰의 범위, 방법 등을 공개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특별검사를 통해 수사를 진행한다고 해도 이는 마찬가지일 것이고, 수사기관의 손에 온전히 역사적 진실을 내맡겨 두어서도 안된다. 검찰에 의해서든 특별검사에 의해서든, 엄정한 수사가 진행되도록 통제하기 위해서는 원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또 사찰 대상의 윤곽과 범위에 관한 정보도 마땅히 공개되어 정보기관을 통제할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테이프에 담긴 공적 정보를 공개하는 수밖에 없다. 역사적 진실을 밝혀나갈 힘을 검찰로부터 시민으로 옮겨와야 하는 것이다.

단, 테이프에 담긴 사적 정보의 경우는 당사자들에게 반드시 알려 사적 정보가 특정 이익을 위해 악용되거나 외부로 유출되는 일이 없도록 방어의 기회를 주어야 할 것이다.


테이프 공개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인가

테이프 공개에 심정적으로는 동의하더라도 불법적으로 수집된 정보를 공개하는 선례를 남김으로써 감시사회를 강화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공개 주장을 주저하는 이들도 있다. 게다가 각종 도청장비가 발달함에 따라 국가권력은 물론 민간차원에서 특정한 이익을 위해 불법적으로 정보를 수집해 이를 공개하고자 할 경우, 이를 막을 근거 자체가 취약해질 수 있다는 점도 우려되고 있다. 불법도청된 정보가 지금은 권력을 바로잡을 기회를 만들어주고 있지만, 이후에는 오히려 권력에 비판적인 세력을 겨눌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제기된다. 이러한 우려를 뒷받침하듯, "불법 도청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삼성의 비리가 만천하에 알려질 수 있었겠느냐"는 인식이 동조를 얻고 있고, 심지어 "부정비리가 많은 집단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도·감청을 할 수 있도록 법제화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물론 정당한 목적을 위해서는 절차적 정당성은 무시되어도 좋다는 식의 인식이 확산되는 것은 경계되어야 한다. 그러나 테이프 내용을 공개한다고 해서 반드시 불법도청을 부추기게 되거나 파파라치의 천국을 만들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과거 정보기관에 의해 자행된 불법도청의 진실을 널리 파헤치고 알림으로써 불법도청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일깨우고 향후 이러한 관행을 엄격히 처벌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할 때 정반대의 결과를 얻을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이번 상황이 특수한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특별법을 통해 정보를 공개하도록 함으로써 이번 사례가 불법적으로 수집된 정보를 '공공의 이익'이라는 막연한 잣대로 수사기관이나 제3자가 함부로 공개하는 선례로 남지 않도록 하는 데 주의할 필요가 있다. 23일 열린우리당 최용규 의원은 <한겨레>와의 인터뷰를 통해 "공공이익에 관한 것이면 도청 내용을 공개하더라도 처벌하지 않도록 하는 내용의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을 발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도청 정보의 공개가 일반화될 경우 정쟁이나 비판세력의 탄압을 위한 도구로 불법도청이 활용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공개 여부의 판단 기준, 사적 정보에 대한 당사자 고지 의무와 비밀 준수 의무 등이 명확하게 담긴 특별법 제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것이 옳다.


역사적 진실을 알 권리를 위하여

지금 우리 사회는 권력형 범죄와 정보기관에 의해 저질러진 불법사찰을 청산할 중대한 기회를 맞고 있다. 그리고 이 기회를 현실로 만들어나갈 정치적 구성력은 진실을 담은 테이프의 공개에 크게 의존하게 될 것이다. 고문, 의문사, 민간인학살, 조작사건 등 과거 국가범죄를 청산하는 과정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도 '역사적 진실을 알 권리'는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