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하루소식

<특집기획> 국가인권위 뜨는 날

산적한 과제안고 국가인권위 출범


접수 첫날 - 하소연할 곳 없는 진정인들 몰려

“국가는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보장해야 할 헌법상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이 의무를 제대로 실행함으로써 인권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있는 제도적 기틀이 마련됐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인권위(아래 인권위) 업무를 개시하면서 김창국 위원장이 밝힌 가슴벅찬 소감이었다. 26일 인권위는 광화문 문화관광부 뒤편 이마빌딩 501호의 10평 남짓한 사무실에 간이 칸막이를 세워 임시상담실 4곳을 만들고 진정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이날 많은 진정인들이 업무개시 이전부터 몰려들어, 한시라도 빨리 자신들의 사연을 접수시키려 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그 동안 마땅한 구제기관이 없어 국가인권위의 출범을 기다렸다”고 밝혔다. 진정된 사건 중에는 인권하루소식에서 다뤘던 사건들도 많이 접수되어 소외받아온 계급․계층의 문제가 국가적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진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장애 이유로 승진차별 - 구제대상 명백하나 실효성 의문

이날 진정접수 제1호는 제천시장 장애인 차별사건이었다.<관련기사: 인권하루소식 11월 23일자> 제천시 보건소 전 의무과장 이희원 씨의 대리인으로 온 서울의대 김용익 교수는 아침 6시 30분경 도착해 세시간 가까이 기다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 씨의 스승이기도 한 김 교수는 사건을 접수시키면서 △이 씨에 대한 보건소장 선임 △제천시장 사퇴 및 내년 선거출마 포기 △공개사과를 요구했다.

국가인권위법(아래 법) 제30조에 따르면, 장애를 이유로 승진에 있어서 특정한 사람을 배제하는 행위는 평등권 침해의 차별행위로써 명백히 위원회의 조사대상이다. 이에 따라 위원회는 제천시장과 관계인에 대해 우선 진술서 제출을 요구할 수 있고, 진술서만으로 차별행위를 판단하기 어려울 경우 출석요구, 진술청취, 자료제출을 요구할 수 있다.

이 사건의 경우 제천시의회 회의록 등 차별행위를 판단할 만한 근거는 충분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제천시장은 누차 이 사건이 장애차별이 아니라는 소신을 밝힌 반면 이 씨는 제천시장의 사퇴 및 공개사과까지 요구하는 상황에서, 당사자들이 위원회의 합의권고나 조정 혹은 조정에 갈음하는 결정을 받아들일 지는 의문이다. 만약 당사자 중 1명이라도 조정 혹은 조정에 갈음하는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현행 법으로 인권위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여호와의증인, 교도소 종교활동 금지 - 차별행위이지만 구제대상 안돼

두 번째로 접수된 진정사건은 양심적 병역거부의 주인공,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차별이었다.<관련기사: 인권하루소식 6월 1일자> 여호와의 증인 수형자 1천5백94명의 부모를 대표하여 진정을 접수한 성우 양지운 씨는 △여호와의 증인 군 항명 수형자들에 대해 무조건 27개월 이상 복역해야 한다는 기준 △교도소 내 종교별 예배가 여호와의 증인 수형자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점을 시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양 씨는 국가인권위의 출범에 대해 지금까지 하소연할 수 있는 창구가 없었는데 “늦은 감이 있지만 업무가 시작되어 너무너무 기쁘다”며, 구색을 맞추기 위한 기구가 아니라 “인권을 신장시킬 수 있는 바람막이”가 되길 바란다고 기대를 표했다. 하지만 양 씨의 진정이 인권위의 조상대상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는 종교를 이유로 한 명백한 차별임에도 불구하고, 법 제30조는 차별행위 대상을 △고용과 관련된 차별 △재화․용역․교통수단․토지․주거시설의 공급이나 이용에 있어서의 차별 △교육시설이나 직업훈련기관의 이용에 있어서의 차별로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법 제25조에 따라 군사법원과 교도소에 정책과 관행의 개선 또는 시정권고 조치를 취하는 것이 국가인권위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보인다. 비록 권고조치는 이행의무를 부과할 수 없지만, 권고를 받은 기관의 장은 권고내용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그 이유를 위원회에 문서로 설명해야 한다. 또 위원회는 이를 공표하여 여론압박을 가할 수도 있다.


재외동포법 차별조항 - 개정권고, 헌재에 의견표명 가능

다음으로 성남외국인노동자의집 김해성 목사는 무려 3건을 한꺼번에 진정해 눈길을 끌었다. 먼저 김 목사는 독일인 요르그 바루트 등과 함께 크레파스나 물감회사에 ‘살색’이라는 표시를 복숭아색 혹은 살구색 등으로 바꾸길 요구했다. 살색이라는 것이 인종과 피부색에 대한 차별의식과 선입견을 무의식적으로 주입하여, 피부색이 검은 이들을 함부로 대하는 등 인권침해와 차별행위의 출발이 되고 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국가인권위가 할 수 있는 일도 정책권고 정도로 보여진다.

이어 김 목사는 스리랑카인 란짓 꾸마라 등과 함께 그간 계속해서 문제가 됐던 이주노동자에 대한 인권침해 문제를 진정했다. 이들은 99년 4월부터 지난달까지 태산산업개발(주)에 근무하던 중 갖가지 폭행과 임금체불을 당했다고 한다. 법 제30조는 출신국가, 용모 등 신체조건, 인종, 피부색을 이유로 임금지급에 있어서의 차별행위는 위원회의 조사대상에 포함시키고 있다. 하지만 신체의 자유를 침해한 폭행은 행위의 주체를 국가기관으로 제한하고 있어, 이번 사건의 경우 폭행피해는 구제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김 목사는 또 조연섭 씨 등과 함께 재외동포법의 개정을 요구하기도 했다.<관련기사: 99년 7월 14일자> 현행 재외동포법은 재외동포의 개념을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했던 자 또는 그 직계비속으로서 외국국적을 취득한 자’로 규정하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기 이전에 출국한 조선족, 고려인, 조선적 동포 등은 그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가인권위의 조사나 구제대상은 아니나, 국가인권위는 법 제19조에 의거 법무부장관에게 법의 개정을 권고하거나 법 제28조에 의거 헌법재판소에 의견을 표명할 수 있다. 조 씨 등은 99년 11월 재외동포법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한 바 있다.


구치소 노역장내 사망사건 - 실지조사 가능하나 조사인력 없어

인권실천시민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은 벌금미납으로 울산구치소 노역장에 유치되었다가 이틀만에 사망한 구승우 씨 사건을 진정했다.<관련기사: 인권하루소식 11월 24일자> 오 사무국장은 사망사건 특성상 사체가 보존되어 있을 때 조사가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들어 “즉시 현지조사활동을 전개하여 줄 것”을 요청했다.

이는 구금․보호시설의 업무수행과 관련한 인권침해 사건이기 때문에, 위원회가 필요하다고 인정한다면 인권위원 등으로 하여금 울산구치소 노역장을 방문하여 실지조사를 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때 당사자나 관계인의 출석을 요구하여 진술을 들을 수 있다. 만약 이때 당사자나 관계인이 인권위원의 실지조사를 방해하면 1천만원 이하의 과태료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현재 행정자치부와 직제 및 규모에 이견차가 커 아직 사무처가 구성되지 못했다는데 있다. 실질적으로 조사인력이 없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국가인권위 사무처준비단 정영선 씨는 “사무처가 구성될 때까지 조사작업 등은 사실상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성전환자 대중교통 이용 차별 - 구제대상이지만 각하될 수도

이날 진정 중 성전환자에 대한 사건도 있었다. 동성애자인권연대 임태훈 대표는 성전환자 김XX 씨가 작년 7월 신분증의 사진, 실제외모가 주민등록번호와 다르고 승객들에게 혐오감을 유발할 수 있다는 이유로 탑승을 거부당한 사건을 진정하고, 손해배상 및 재발방지를 요구했다.

이는 성적 지향에 의해 교통수단의 이용에 있어서 차별을 당한 사건으로 명백히 위원회의 조사 및 구제대상이다. 다만 진정원인이 된 사실이 발생한 날로부터 1년이상 경과하여 진정했기 때문에 위원회는 이 사건을 각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민청학련․인혁당 사건 고문행위 - 공소시효 지나 각하 예상

민주노총은 △서울구치소에 수감중인 단병호 위원장을 방문 조사하여 국가기관이 행한 자의적인 신체구속경위를 조사해 줄 것 △노동자들의 파업을 범죄시하고 단순한 노무제공 거부를 업무방해죄로 처벌하는 관행의 시정권고 △노동문제를 검찰공안부에서 담당하는 관행의 시정권고를 요청했다. 민주노총은 진정하면서 단 위원장의 석방을 촉구하는 서명용지 1만 여장을 함께 제출했다. 이 서명에는 60개국 7백25명의 노동단체 인사를 포함해 총 7만8천2백38명이 참여했다.

또 74년 민청학련 사건과 75년 인혁당 사건 당시 수사과정의 고문에 대해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진정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이미 공소시효 또는 민사상 시효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각하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인권위는 진정 접수 첫날 방문접수와 전화접수를 포함해 총 1백22건의 진정을 접수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인권위 사무처준비단 최영애 단장은 “지금까지 홍보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치고는 인권위에 기대하고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평했다. 하지만 접수된 사건들 중 상당수는 현행 법 아래에서 또는 사무처가 구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해결이 어렵거나 더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법무부, 국방부, 보건복지부 등은 해당 보호시설을 인권위의 조사대상에 제외하고 조사갈 때는 사전에 통지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으며, 행정자치부는 인원규모를 1백27명 선으로 하고 인권활동가들의 직원채용시 특례를 인정할 수 없다고 반발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인권위가 제출한 시행령과 직제령이 제정되지 못해, 인권위의 정상운영이 불가능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