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데이였습니다. 대법원이 이재명 재판을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했다는 속보가 날아왔습니다. 이례적이라 노골적인 초고속 선고였습니다. 선거를 앞두고 후보 자격을 박탈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는 못했을 텐데, 대법원장이 무슨 생각이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사법부도 민주주의의 구성물이라는 본분을 자각했다면 그렇게 난폭해서는 안됐습니다. 특정 후보의 자격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민주주의가 무엇이든 사법부는 그것을 초월한 기관이라고 선포한 셈이었으니까요. 계엄 이후 어렵사리 민주주의로 길을 내는 시민의 노고를 짓밟은, 대법원의 ‘난동’이었습니다.
사법부 흔들기가 정치의 역할인가
그런데 민주당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선거를 코앞에 두고 후보의 정당성에 타격을 입은 불안과 분노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국회 다수당으로 입법부를 대표하는 정당이기도 한데 난폭하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대법원의 선고가 끝이 아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다고 말하는 것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사법부를 막무가내로 공격하며 대법관을 탄핵하자는 등 적의를 고취하는 것이 이제 곧 집권당이 될 수 있는 정당의 모습이라니 근심이 더 깊어졌습니다. 사법부에 대한 치명적 불신은 대법원이 자초했지만 그렇다고 사법부를 부수는 것이 국회가 낼 해법은 아니니까요.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된 것은 억울할 일입니다. 검찰이 굳이 이재명의 발언만 문제 삼는 편향성을 보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검찰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검찰이 윤석열 편’이라는 단순한 구도로만 설명되지 않습니다. 선거법은 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하는 조항들로 전부터 문제가 많이 지적되었습니다. 검찰이든 법원이든 선거법이 표현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훼손하지 않도록 기소를 자제하고 판결에 신중하게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한 조건이라면, 이런 논란이 반복되지 않도록 입법 조치를 취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민주당은 최근 한덕수의 발언을 문제 삼아 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습니다. 사법부가 정치에 개입하도록 끌어들이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가 민주주의의 위기를 낳고 있다는 지적은 오래되었습니다. 정당들이 서로 다투며, 국회와 정부가 권한을 다투며, 헌법재판소로, 법원으로 결정의 책임을 넘기는 것이 낯설지 않습니다. 제 맘대로 되지 않거나 자신한테 불리한 결과가 나오면 부당한 탄압이라고 거세게 항의하다가 자신한테 유리한 결과가 나오면 환영하고 옹호하고. 양당이 반사 게임이라도 하는 듯합니다. 실컷 흔들어대면서 합법이냐 불법이냐 사이에 정치를 가둡니다. 그런데 그 피해는 무엇일까요?
사법부를 믿으라?
이재명에 대한 대법원 선고 몇일 후 단신 기사 하나에 눈이 갔습니다. 한 화물차 기사가 절도 혐의로 벌금 5만 원을 선고받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는 물류회사 사무실 냉장고에서 400원짜리 초코파이와 600원짜리 과자를 꺼내 먹었다고 합니다. 검찰이 약식기소를 했는데 무죄를 주장하며 정식재판을 청구했고 1심 재판부는 “피고인이 냉장고 속 물품에 대한 처분 권한이 자신에게 없음을 충분히 알았을 것으로 보인다”며 절도죄라 했습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만 법의 논리로 어쩔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검찰이 기소를 자제하고 법원이 판결에 신중하더라도 우리의 상식과 기대를 법이 따라오지 못하는 경우는 있을 것입니다. 인권운동도 사법의 한계 앞에서 분노할 일이 다반사라 새삼스럽지 않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사법부에 대한 신뢰란 무슨 의미일까 묻게 되었습니다.
법이 고무줄이 아닐 것이라는 기대, 힘있고 돈있는 자들의 편만 들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 이것이 사법부에 대한 신뢰일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이 늘 그렇지는 않으므로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무슨 결정을 하든 승복하라는 명령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쉽게 무시된다면 다른 어떤 순간에 내가 기댈 곳이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사법부를 신뢰하는 일은 사법부의 노력만으로 가능해보이지 않습니다. 판결 ‘다음’을 만드는 일. 법의 바깥에서 세상을 바꾸어 법이 쫓아오게 하겠다는 약속. 그것이 정치의 역할이지 않을까요? 물류회사가 화물노동자의 휴식과 간식을 보장하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라면 이런 소송은 다시 겪지 않아도 될 테니까요. 판결 비평이 제 역할인 것처럼 스스로 법 안으로 걸어들어가기를 멈추고 법의 바깥에서 변화를 만들어가는 역할을 자임해야 합니다.
덜 흔들리는 자리에서 흔들어대기를 멈추라
건설노동자의 이야기를 담은 『노가다가 아닌 노동자로 삽니다』라는 책이 얼마 전 출간되었습니다. 건설노조를 ‘건폭’으로 몰아대며 건설노동자 양회동 님이 분신을 하기에 이른 후 2년이 흘렀습니다. 공갈과 협박이라니. “사람 때려서 잡혀갔으면 억울하지나 않다”고 말하는 건설노동자의 곁에 누가 있었을까요? 윤석열 정부가 벌인 일이니 규탄의 목소리는 높았습니다. 하지만 건설노동자가 억울하지 않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민주당은 무엇을 했을까요? 검찰개혁이나 사법개혁을 말할 때 이들의 억울함이 거론되는 걸 듣지 못했고, 법의 바깥에서 판결 ‘다음’의 변화를 만들려는 노력도 보지 못했습니다.
거대 양당은 사법이 어떻게 작동하든 그것에 대항할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끔 민주당은 권위주의 정권에 맞선 투쟁에서 자신들이 놓였던 위치와 현재의 위치를 헷갈리는 듯도 합니다. 김대중 정부 집권 이래 민주당은 번갈아 집권하며 국가기구 곳곳에 동조자와 지지자가 있고, 동원할 수 있는 수많은 자원을 가진 데다, 언로도 충분히 가진 거대정당이 됐습니다. 누가 흔들어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 자리에 이미 있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금만 흔들어도 휘청이는 자리에서 삶을 꾸려갑니다.
거대 양당이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진영화하며, 기소와 판결이 권력이 되게 하는 일은 멈추지 않을 때, 흔들리는 사람들은 따로 있습니다. 사법이 바로 서야 하는 이유부터 바로 세워야 사법부가 민주주의의 구성물로 제자리를 찾게 될 듯합니다. 법이 시민을 무시하지 않게 하는 것이 민주주의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