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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옳다고 믿는 가치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는 소박한 꿈을 품고...

제가 인권운동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중학교 때입니다. 친구의 꼬임(?)으로 청소년수련관의 ‘옴부즈만’이라는 어떤 동아리를 들게 되었는데요, 알고 보니 청소년 인권 동아리더라고요. 우연히 만나게 된 ‘인권’ 그리고 ‘인권운동’. 아마 사랑방에 들어오게 된 계기가 그 때부터 만들어졌던 게 아닐까 생각도 해봅니다. 당시에는 ‘인권’이라는 멋있는 단어에 제 자신이 참여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게만 느껴졌어요. 인권영화를 보고, 토론을 하고, 두발 자유 시위를 나가고, 각종 축제를 준비하면서 보람도 느꼈지만, 약간의 실망감도 느꼈습니다. 그 실망감이라는 건 뭐랄까, 정말 멋있어 보였던 ‘인권 동아리 활동’ 이라는 게 약간은 시시하게 느껴졌다고 할까요. 축제를 준비하는 건 마치 학교 환경 미화하는 것 같았고, 인권 담론에 대해 배우는 것보다 행사에 참여하는 데 더 의의를 두는 것 같았거든요. 아무래도 청소년 동아리이다 보니 인권에 대한 이론적 접근은 힘들었을 것 같지만 그 당시 저에게는 활동은 많은데 알아가는 것은 없는 거 아닌가 하는 회의감이 약간 들었습니다. 이후 고등학교 생활이 바빠지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동아리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죠. 중단했을 때만해도, 그 동아리는 그냥 스쳐가는 인연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이후 저는 그저 평범한 대한민국 고등학생으로 지냈습니다. 대학입시를 준비하고 내신 1점에 목숨을 걸지만 사회 현안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는 그런 학생 말이에요. 죽음의 트라이앵글 중 한 축을 담당하는 대입논술을 대비하기 위해서 학교 논술 프로그램에 참가했을 때에도 제 자신이 시사문제에 꽤나 무지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그러던 중 저는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학교 논술 신문 제작에 참여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글쓰기 실력을 높이기 위해 들어갔지만 정치 파트를 맡고 기사를 쓰게 되면서 사회 문제 특히 한국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한창 대선이 끝나고 새로운 정부(지금의 이명박 정부)가 구성될 때였어요. 그래서 전 이명박 당선인의 도덕성 문제를 주제로 ‘지도자의 도덕성과 능력’에 관한 기사를 썼습니다. 생각보다 어려운 주제여서 쓰는 과정에서 많은 고민을 했고 여러 기사들을 찾아 읽으면서 사회문제에 눈을 어렴풋이 눈을 떠갔던 것 같아요. 또한 아무래도 당선인에 관한 기사를 쓰다 보니 새롭게 구성된 행정부에 좀 더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고요. 공교롭게도 이 시기에 저는 상당히 진보적인 학교 선생님들을 만났습니다. 수업 때 시사 문제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는 선생님들 덕분에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분노하고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고등학교 2학년을 보냈죠.

그러던 중 촛불집회가 터졌습니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 문제에서 촉발된 시위는 저와 같은 여고생들이 주축으로 시작되었는데요, 시위에 직접 참여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실제로 인터넷을 통해 집회에 관한 소식을 들으면서 저는 우리와 같은 청소년들이 정부에 당당히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제 두근거림은 예전 ‘옴부즈만’ 동아리에 있었을 적, ‘두발 자유 시위’에 참여했던 정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부의 강경진압이 시작되고, 군홧발로 시위에 참여한 여대생을 짓밟는 모습을 목격하고 나자, 제게 촛불집회는 단순한 항의가 아니라 ‘억압권력에 맞서는 저항’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때 이후로 저는 이 정부에 분노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민주화된 세상을 공기처럼 당연시해왔던 저에게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정부가 시민들을 직접적으로 탄압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예전 군사 정권과는 다르지만 같은 독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지금까지 민주화에 역행하는 ‘비정상적’인 정부로 규정짓기까지 했습니다. 이 생각이 비록 불완전하고 편협할 수 있겠지만 그만큼 제 분노와 충격은 컸고, 이에 따라 사회문제에 대한 저의 관심도 더더욱 깊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때 즈음 국민의 분노도 커져 촛불집회는 세종로 거리를 모두 뒤덮는 대규모의 물결이 되었습니다. 이슈 또한 쇠고기 협정 문제에서 이명박 정부의 각종 신자유주의 정책 전반으로 넓어져 한국 사회의 각종 사회문제를 아우르고 있었습니다. 경쟁 지상주의적인 교육 문제, 비정규직 문제, 의료 민영화, 공기업 민영화 문제 등 수업시간에 선생님들로부터 들었던 사회문제들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직접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보면서 저는 시민의 힘으로 이 사회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 희망을 품고 저 또한 사회를 변혁시키는 데 앞장서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그러나 이 희망도 잠시, 촛불집회는 사그라진 이후 정부의 강경한 탄압과 보복이 시작되었습니다. 피디수첩 탄압, 언론장악, 그 과정에서 해직된 기자들, 근현대사 교과서 개정 문제, 4대강 사업의 일방적 추진 등등 수많은 현안들이 계속해서 터져 나왔고 정부의 반민주적 행보도 가속화되었습니다. 막 사회에 눈뜨기 시작한 저에게 이 모든 것이 홍수처럼 다가와 분노하다 지쳐 혼란스럽기까지 했습니다. 혼란 속에서도 저는 이 사회가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만은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짐을 했습니다. 절대로 잘못 돌아간 사회에 야합해서 살지는 않겠다고. 그 사회를 조금이나마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그 때 오랫동안 지녀왔던 외교관의 꿈도 버렸습니다. 쇠고기 협상을 할 때 보았던 영혼 없는 관료가 되기가 싫었고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혼란의 와중에서 저는 사회문제에 관한 책들을 읽으며 제 입장을 가지려고 노력했고 어느덧 시간이 흘러 2009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2009년, 그러니까 제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무렵은 2008년과는 또 다른 충격을 맞았습니다. 2008년에는 촛불집회를 비롯한 각종 저항에 열정이 끓어올랐다면 2009년에는 그런 혁명의 좌절, 반대세력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을 지속적으로 목도한 해였다고 할까요. 연초에 일어난 용산참사는 고3 내내 제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6명이 죽는 끔찍한 사건이 터졌는데도 사람들이 무관심해하는 모습에 저는 절망을 느꼈고 명예회복과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유가족들을 끝끝내 외면하며, 심지어 그들에게 ‘테러리스트’라는 독설을 퍼부으며 가슴을 타들어가게 하는 이 사회가 미웠습니다. 그리고 제가 미웠습니다. 수험생이라는 핑계로 참사현장에 가지 않고, 아무 일에도 나서지 않는 제가 미웠습니다. 마음이 울적할 때 학교 기도실에서 기도할 때 저는 항상 다짐했습니다. 사회적 약자와 함께 하는 삶을 살겠다고, 그 사람들과 함께 억압에 저항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그 당시 제게 ‘사회적 약자’의 표상은 ‘용산 참사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과 꼭 함께 해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의문이 들었습니다. 나는 과연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용산 참사 유가족들이란 이미지 외에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건 어느 정도 될까. 그런 생각에 미치자 저는 현장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목격하고, 느끼고 함께 아파할 수 있어야 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 생각이 이어져 아마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작년 한 해 제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사회 전반에 퍼진 무관심과 무력감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진로와 대학을 결정하는 시기라서 저는 선생님들로부터 ‘현실적인’ 혹은 ‘속물적인’ 이야기와 가치를 계속 주입받아야 했고 그것이 너무나 싫었습니다. 공부 못 하는 학생, 대학 못 가는 학생을 대놓고 무시하는 선생님의 태도가 싫었고, 사회비판적인 성향을 가진 제 면전에 ‘대학 가서 시위 같은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마라’, ‘네 인생만 망칠 거다’, ‘마치 사회의 지성인인 것 마냥 굴지마라’ 라고 마음에 비수를 꽂는 선생님 때문에 아팠습니다. 소위 진보적이라는 선생님들조차 ‘지금은 능력을 길러 나중에 큰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가거라.’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물론 그게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저에게는 일종의 배신처럼 느껴졌습니다. 사회의 부조리에 관심을 가지라고 말씀해주신 선생님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어서 더 그랬던 것일까요. 우리는 분명 민주적 권리를 가지 시민인데, 사회가 잘못하면 비판할 수 있고 항의할 수 있는 주권자들인데, 왜 그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잘못처럼 여겨지는 것일까요. 아직 우리 사회가 충분히 민주화되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그 때 마치 제 주위에 모든 것이 저를 압박해오는 듯했습니다. 어쩜 그 ‘잘못된’ 사회는 제가 바꾸어야 할 것이 아니라, 제가 순응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번은 공정택 전 교육감이 학교를 방문한 날이 있었습니다. 학교 지원을 위해 방문한 것인데 한창 비리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던 공정택 교육감이 제 학교로 온다는 것이 몹시도 싫었습니다. 그래서 1인 시위라도 할까 고민했습니다. 담임선생님께서는 참으라고 하셨지만 전 참는 대신 자율학습실에 있는 제 책상에 ‘부패한 교육감은 물러가라’라고 낙서를 했습니다. 이것마저도 하지 않으면 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울 것 같았죠. 이후 한동안 그 낙서는 잊혀지는 듯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담임선생님을 통해 생활지도부로부터 낙서를 당장 지우라는 명령을 듣게 되었고, 자습실 책상 위에도 ‘공공 기물을 훼손하는 사람이 어떻게 사회에 뭐라고 할 수 있나요? 당장 지우세요!’ 라는 쪽지가 있었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기에 앞서 우선 불같이 화가 났습니다. 사회에 뭐라 할 자격이 없다는 소리도, 당장 지우라는 소리도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낙서가 ‘높으신 분’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면 생활지도부실에서, 자습실에서, 그리고 담임선생님을 통해서까지 전방위적으로 제게 지우라고 강요를 했을까요? 그 생각에 저는 화가 났지만 처음에는 단순히 ‘낙서를 한 행위’가 잘못되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역시나 내용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제 낙서가 ‘정치적 프로파간다’이고 ‘위험’했기 때문에 지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전 죄 없는 담임선생님께 따졌죠. 그렇다면 제가 어떻게 했어야 하냐고, 그냥 가만히 있었어야 했냐고. 그러자 담임선생님께서는 공식적으로 항의 서한을 보내든지 그런 방법으로 해야지 낙서는 잘못된 방법이라고 말을 흐리시는 것이었습니다. 공식적인 항의 서한? 정말 학교가 그런 걸 원했을까요? 그러면 학교가 불이익 보는 거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 정말 1인 시위를 했어야 할까요, 만약 1인 시위를 했다면 학교는 가만히 있었을까요? 그런 시위도 아니고 고작 낙서인데, 단순한 낙서일 뿐인데, 교육감은 한 번 방문하고 지금 없는데, 도대체 그깟 낙서가 뭐가 무서워서 이렇게 안달복달하면 지우라고 말하는 걸까요. 너무나 화가 나고,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그 날 저녁 하루 종일 펑펑 울었습니다. 그렇게 전 순응하며 살아가야 하나요, 모른척하며, 무관심으로 살아가야만 하나요. 그런 분위기가 제게는 억압으로 느껴져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 정도 일마저 용납하지 못하는데, 이 사회에 맞서서 살아간다면 얼마나 힘들 것인가 하는 생각에 괴로웠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별 것도 아닌 일이지만 학교와 사회의 어두운 단면과 마주치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 일로 전 교장실에 불려갔고 징계는 면한 채 낙서를 지우게 되었죠. 

이후 혼란과 방황 속에서 제가 내린 결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에 사회문제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고, 분노할 때는 분노하되 옳다고 믿는 가치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는 게 제 소박한 다짐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를 착취하는 삶을 살지 말고, 착취당하는 자, 혹은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면서 곰곰이 생각했죠.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 그 때 저는 중학교 시절 ‘옴부즈만’을 떠올렸어요. 비록 어렸을 적 멋모르게 시작한 일이었지만 사회에 눈 뜬 이후, 사회에 대해 외면하지 말자고 다짐한 이후 저는 그 길을 다시 걷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인권운동’을 제 꿈으로 삼았고 인권단체를 검색하다가 ‘인권운동사랑방’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단체와 달리 자원활동가를 구하고 있었기에 메일을 보냈고 미류님의 사랑방 활동소개를 받고서는 사회권 팀에서 활동하기로 했지요. 앞으로 사랑방 활동을 하면서 인권이 무엇인지, 인간다운 삶과 사회란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현장 속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권리 개선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싶습니다. 아직은 인권이라는 개념을 모호하게 알고 있고 많은 부분에 미숙하지만, 사랑방 활동에 많은 도움이 되고 싶어요. 모두들 잘 부탁드립니다. 대학교 생활도 새롭게 시작되지만 사랑방 활동에 소홀해지지 않도록 노력할게요! 그럼 저의 시시콜콜한 방황의 이야기도 마무리 지을게요.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