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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 없는 반쪽조사, 현장 없는 탁상조사

청명고 인권침해 진정에 대한 국가인권위 결정을 바라보며

“당사자 없는 반쪽조사, 현장 없는 탁상조사, 인권위 맞아?” “최영애 상임위원은 청명고 사건 부실조사에 책임지고 사과하라” 2월 15일 오전 10시.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회가 열리는 회의실 앞에 열댓 명의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아래 네트워크) 활동가들이 최영애 상임위원의 사과와 면담을 요구하며 침묵시위에 들어갔다. 청소년인권활동가들은 청명고 인권침해 상황에 대한 국가인권위 결정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다.

청명고에서는 무슨 일이?

작년 8월, 수원 청명고등학교에서는 두발자유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학내시위가 일어났다. 2학기를 앞두고 학교당국이 일방적으로 두발규정을 강화하자,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야자시간에 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이에 교사들은 시위를 강제 해산시키고, 몇몇 학생들에게는 자퇴서를 쓰라고 강요했다. 그리고 한편으론 터져 나온 학생들의 불만을 무마시키기 위해 여학생에 한해 규정을 완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학교 측이 이러한 조치를 취한지 며칠 후, 다시 남학생들을 중심으로 2차 학내시위가 준비되었다. 그러나 시위 당일 시위계획이 학교에 미리 알려지게 되었고 학교당국은 전교생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소지품 검사(가방, 사물함)를 실시했다. 소지품 검사 결과 “두발자유” 등이 적혀있는 전단지와 폭죽 등이 발견되었고, 물품을 가지고 있던 학생들은 교무실로 끌려가 위협을 당했다. 교사들은 학생들의 복도, 현관 출입을 감시, 통제하며 학내시위에 참여하는 학생에게는 퇴학조치를 취하겠다는 엄포를 내렸다. 학내시위가 무산되었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자, 청명고의 한 교사는 인터뷰한 학생을 찾아내겠다며 학생들의 휴대전화를 수거해 열람하기도 했다.

청명고의 인권침해에 항의하며 경기도교육청 앞에서 벌인 청소년인권활동가들의 시위

▲ 청명고의 인권침해에 항의하며 경기도교육청 앞에서 벌인 청소년인권활동가들의 시위



학생들의 외침이 처절하게 짓밟히는 현장, 청명고에 ‘인권’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네트워크는 현 상황을 묵과할 수 없어, 9월 14일 청명고 학생들을 대신해 국가인권위에 청명고의 인권침해 사건을 진정했다. 청명고(교장 이청극)를 상대로 학생들이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 사생활의 자유 등을 보호받을 수 있도록 인권침해 상황의 중단과 재발방지 대책 마련을 권고해주기를 국가인권위에 요구한 것이다. 그로부터 약 5개월 후, 2006년 2월 8일 진정에 대한 국가인권위 결정문을 받았다. 두발규정에 대해 민주적 의견수렴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에 대한 재발방지 대책 마련, 휴대전화 수거와 그 내용 열람은 인권침해이므로 규정을 개정할 것, 그리고 집회의 자유를 침해한 것에 대해서는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증거가 없으므로 기각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결정문의 내용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소지품 검사, 국가인권위의 입장은 어디로?

현재 많은 학교에서 휴대전화 소지를 금지하고 휴대전화의 내용을 당사자의 동의 없이 자의적으로 열람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인권위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통신의 자유 등을 들어 청명고의 인권침해를 인정하고 휴대전화 소지 규정을 개정하라고 결정한 것은 환영받을 만 했다. 대다수 학교의 무분별한 사생활 침해를 제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지품 검사에 대한 국가인권위의 판단은 총 7쪽에 달하는 결정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소지품 검사를 했는지 안했는지에 대한 사실확인 여부조차 없었다. 피해 학생들의 증언뿐만 아니라, 국가인권위에 제출한 학교 측의 서면답변 역시 소지품 검사를 실시했다고 밝혔다. 소지품 검사는 대부분의 학교에서 무분별하게 자행되고 있는 심각한 인권침해 사례 중 하나다. 이런 인권침해에 대해 국가인권위는 진작 인권적 관점에 근거해서 정책을 발표했어야 한다. 하지만 국가인권위는 그러지도 못했을뿐더러 인권침해 진정 사안에 대해서도 침해 여부에 대해 판단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회피했다.

학내시위탄압 증거, 찾아보려고는 했나?

학교 측의 학내시위 탄압에 대해 국가인권위가 ‘증거없음’으로 기각처리를 한 것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부분 중 하나다. 학교 측은 전단지와 폭죽 등 시위에 사용할 물품을 소지했던 학생들에게 ‘불법시위주동은 퇴학처분에 해당된다’고 실제로 경고했고, ‘이를 협박으로 받아들였다면 유감’이라고 인정했다. 그런데도 국가인권위는 “사실로 인정할 만한 구체적인 객관적 근거가 없다”고 밝혔다. 객관적 근거가 정말 없었을까? 오히려 근본적인 문제는 국가인권위가 객관적 근거를 찾기 위한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진술이 상반되는 경우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한 조사를 실시해야 하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이다. 네트워크는 피해학생들, 그리고 어렵게 증언을 하기로 결정한 교사를 증인으로 소개해줄 수 있다는 의지를 밝혔다. 하지만 국가인권위는 모든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가해자인 학교 측의 서면 답변만을 신뢰했을 뿐이다.

국가인권위 사무실 앞에서 항의행동을 하고 있는 청소년인권활동가들<출처; 인터넷뉴스 바이러스(www.1318virus.net)>

▲ 국가인권위 사무실 앞에서 항의행동을 하고 있는 청소년인권활동가들<출처; 인터넷뉴스 바이러스(www.1318virus.net)>



인권침해 현실에 애써 눈감는 국가인권위

국가인권위는 진정인이 제기했던 문제는 언급도 하지 않은 채, 진정 내용엔 있지도 않았던 두발규정에 대한 결정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 결정 역시 불성실하기는 마찬가지. 국가인권위가 판단근거로 삼은 경기도교육청의 지침에는 ‘두발규제는 교육목적상의 필요최소한의 범위에서, 학생들의 실질적인 의사가 반영되어야 한다’고 나와 있다. 국가인권위가 실시한 설문조사 시 90%가 넘는 학생들이 두발제한에 대해 반대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학교 측이 두발규정을 강화한 것은 단지 ‘민주적인 수렴을 거치지 못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국가인권위는 결국 절차적인 문제점만을 지적하며, 두발‘규제’ 자체에 대한 인권침해 여부에 대한 판단은 내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청명고가 학교 측의 두발제한을 정당화하며 그 이유로 든 ‘면학분위기 훼손’과 ‘지역사회 평판’이 기본권을 제한하고 있는 현실을 애써 외면한 것이다. 국가인권위의 결정문을 읽은 청명고의 한 학생은 “면학분위기가 훼손되고 지역사회의 평판이 나빠진다는 그런 터무니없는 말이 과연 기본권 침해의 이유가 될 수 있는지 의문스럽습니다”라고 말했다.

네트워크는 청명고 인권침해 진정에 대해 이같은 결정을 내린 국가인권위가 또다시 청명고 학생들의 인권을 침해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기관으로서 인권보장 의무를 외면했다고 판단하여, 국가인권위를 가해자로 해 다시 진정을 했다. 그러나 담당 조사팀 관계자들과의 면담에서 국가인권위 직원들은 “학교공동체 문제의 경우, 다수가 원하지 않을 수도 있고, 또한 그 학교 명예도 있고 해서, 조사하는 것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두발자유문제의 경우, 요즘 학생들이 자주 요구하는 내용이라 조사 초기에 두발문제를 중심으로 두고 디자인했다” 등과 같이 이야기했다. 학교공동체를 조사하면서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것과 조사 과정에서 피해당사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또 진정 내용에 따라 조사를 진행하는 것이라면 진정인이 원하는 인권침해 내용에 충실하게 조사를 진행하는 것은 기본이다.

결국 국가인권위 관계자는 문제제기에 대해 성찰하고 앞으로 더욱 주의하겠다고 밝혔다. ‘인권’은 결코 억압하는 자와 억압당하는 자의 중간에 존재할 수 없다. ‘인권’은 억압당하는 자의 위치에 있을 때 진정한 ‘권리’가 될 수 있다. 그것이 ‘인권’의 본질이다. 국가인권위는 ‘인권’에 대한 심판자가 아니라, 인권침해를 예방하고 피해당사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자신의 역할을 망각한 국가인권위는 더 이상 ‘인권위원회’일 수 없다.
덧붙임

전누리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와 민주노동당 청소년위원회에서 활동하는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