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하루소식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을 이야기하다

기륭전자 여성노동자 인권침해 사례 고발 증언대회 진행

"출산, 육아휴가요? 그건 우리 같은 파견직들은 생각도 못 하죠. 아이가 아파도, 가족 장례식에도 휴가를 낼 수가 없는데요. 짤릴까봐. 큰 아이 초등학교 졸업식 때도 휴가 못쓰고 외출로 잠깐 다녀온 정도예요…아침마다 조회를 할 때 조장이 노골적으로 말해요, 휴가내면 해고 0순위라고"

8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인권단체 사회권전략팀과 '빈곤과 폭력에 저항하는 여성행진'은 14일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기륭전자 여성노동자 불법파견 실태와 인권침해 사례 고발을 위한 증언대회'를 진행했다.

증언대회에 나와 증언하고 있는 기륭분회 김옥분 조합원

▲ 증언대회에 나와 증언하고 있는 기륭분회 김옥분 조합원



지난 7월 5일 서울남부지역지회 기륭전자분회를 결성한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8월 24일부터 생산 현장에서 철야농성을 하기 시작했다. 그보다 먼저 8월 5일 서울지방노동위원회로부터 '불법파견' 판정을 받았지만 회사는 여전히 노조를 무시하며 대화를 거부해왔다. <관련기사 제2901호 참조> 뿐만 아니라 회사는 노조 설립 후 사내 조합원 감시용 CCTV를 25대나 설치해 노동자들을 일일이 감시하고, 조합원들에게 '백지 탈퇴서'를 돌리며 조합 탈퇴를 강요하는 등 노조 탄압을 자행해온 것을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회사 정문은 어느새 '철문'으로 바뀌었고 담장은 시멘트벽으로 교체되었다. 외부 경비도 2명에서 10명으로 늘었다. 기륭전자분회 김옥분 조합원은 "회사는 2∼3개월에 한번씩 '물갈이 해고'를 하곤 했는데 해고 사유는 회사측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행위들이었기 때문에 이를 견딜 수 없어 노조 활동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했다.


'여성'과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이중의 굴레

"어린 아가씨들이나 결혼할 염려가 있는 아가씨들은 6개월, 결혼할 염려가 없는 아줌마들 경우는 1년, 나이가 좀 찬 사람은 3개월, 이런 식으로 계약을 맺어왔어요"

"갈 데가 없더라구요. (여성인데다가) 나이 많다고 받아주는 데가 있어야죠"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문제는 일반적인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이들을 둘러싸고 있던 것은 바로 '여성'이자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이중의 굴레였다. 문제는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이 이중의 굴레가 우리 사회에서 이미 보편적인 문제라는 점이다.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실은 '불법파견 근절과 최저임금 실현을 위한 서울남부공대위'와 함께 올해 8월부터 9월 사이 30여 일 동안 서울디지털산업단지(구 구로공단)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신규채용 내용을 조사했다. 서울디지털산업단지 내 총 96개 업체 1,279개 일자리를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한 결과, 전체 일자리 가운데 정규직은 43개(3.4%)에 지나지 않았고, 나머지 1,236개의 일자리 가운데 계약직이 306개(23.9%), 파견직이 930개(72.7%)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 기간 동안 전체 일자리 중 96.6%가 비정규직으로 정규직에 비해 비정규직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중 남성을 원한 일자리는 294개(23.0%), 여성을 원한 일자리는 985개(77.0%)로 여성을 원한 일자리가 상대적으로 많았지만, 전체 정규직 일자리 43개 중 남성을 원하는 일자리가 36개(83.7%), 여성을 원하는 일자리가 7개(16.3%)로 남성이 여성의 5배가 넘었다. 반면, 계약직의 경우에는 306개의 일자리 중 남성을 원하는 일자리는 58개(19.0%)에 지나지 않았지만 여성을 원하는 일자리는 248개(81.0%)로 여성이 남성의 4.2배가 넘었고, 파견직의 경우에도 전체 일자리 930개 중 남성을 원하는 일자리는 200개(21.5%), 여성을 원하는 일자리는 730개(78.5%)로 여성이 남성의 3.6배가 넘었다. 임금에 있어서도 비정규직과 정규직에 따라 차이가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남성의 평균 급여는 93.3만 원인데 비해 여성의 평균 급여는 73.0만 원인 것으로 드러나 많은 여성들이 '여성'과 '비정규직'이라는 이중의 차별에 노출되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와 관련 '빈곤과 폭력에 저항하는 여성행진' 문설희 활동가는 "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서의 구직 및 취업 현황은 남성은 정규직, 여성은 비정규직이라는 성차별적이고 성별분업화된 현실을 반증한다"며 "1,279개의 일자리 중 가장 취업하기 어려운 경우는 '여성이 정규직으로 취업하는 경우'로 0.5%의 확률이었고, 가장 취업하기 수월한 경우는 '여성이 파견직으로 취업하는 경우'로 57.1%의 확률이었다"고 밝혔다.


가사노동까지 책임져야 하는 현실

"8시에 근무 끝나고 이것저것 정리하면 8시 반. 공장 나와서 집에 가면 9시가 넘어요. 애들 공부 봐주는 건 생각도 못하고 다음날 아침에서 저녁준비까지 해놓느라 정신이 없죠. 일 마치면 거의 12시정도 되요. 나는 아침 6시에 일어나는데 고등학생 자녀를 둔 언니들은 5시 정도에 일어나야 해요"

여성노동자들은 '여성'과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이중의 차별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대부분 가사노동에 있어서도 1차적 책임자로 규정되어 있다. 이는 여성의 고용율이 연령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고 특히 30대 여성의 낮은 고용율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아래 표 참조>

[출처] 한국여성개발원 여성취업실태조사 4차(2001년)

▲ [출처] 한국여성개발원 여성취업실태조사 4차(2001년)



30대 여성의 고용율이 낮은 이유는 자녀양육과 가사의 부담이 개별 여성에게 집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여성들이 노동시장에 재진입할 때에는 어김없이 압도적인 비율로 비정규직 노동자가 된다. 하지만 이들은 저임금과 불안정한 일자리라는 열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리면서도 일자리와 가사노동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다. 일을 하면서도 빈곤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마저' 일을 하지 않으면 더 큰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 활동가는 "노무현 정부의 여성정책은 외견 상 여성의 현실과 요구를 긴급성에 따라 선별적으로 수용하고 단계적으로 확대시키는 듯한 양상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직장과 가사의 양립이라는) 여성의 출혈적 이중부담을 강화하고 그를 지속하기 위한 최소한의 완충장치를 만드는 지연책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현재 기륭전자분회 임원 4명에게 체포영장이 발부되어 있고 조합원 전원이 고소고발된 상황이다. 또 농성 14일만에 회사로부터 18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의 손해배상이 청구되어 있기도 하다. 이날 증언대회에 참여한 김영미 구로동맹 파업 당시 효성물산 노조위원장은 "구로동맹 파업 당시 11만 구로 노동자 중에서 80%가 여성노동자였다"며 "지금의 상황이 어떻게 20여 년 전 상황과 이리도 똑같을 수 있는가"라며 안타까워했다. 이어 "당시 전두환 정권은 무식하긴 했지만 쪽팔리는 건 알아서 '효성물산 노조 탄압 위해 성폭행 자행'이라는 신문 기사가 보도된 후에 상당히 위축됐지만, 노무현 정권은 쪽팔리는 것도 모르는 것 같다"고 꼬집으며 "정권과 자본이 스스로 쪽팔려할 수 있도록 열심히 싸웠으면 좋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20년 전 구로동맹 파업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준 김영미 당시 효성물산 노조위원장

▲ 20년 전 구로동맹 파업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준 김영미 당시 효성물산 노조위원장



기륭전자는 지난 11일 0시를 기해 조합원에 대해 직장폐쇄를 단행하고 조합원을 출입통제하며 단전단수를 자행하는 등 노조에 대한 탄압을 멈추지 않고 있지만, 14일 현재까지 노조의 현장 철야농성은 52일차를 기록하며 계속되고 있다. '생존권'과 '인간다운 권리'를 주장하는 그녀들의 목소리가 지금, 공장 문을 힘차게 두드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