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하루소식

<3·8 세계 여성의 날 맞이 특집 ①> 여성과 노동

여성노동자 얽어매는 빈곤과 차별의 늪


오는 8일 '세계여성의 날'이 95회째를 맞는다. 1908년 미국 방직공장 여성노동자들이 토해냈던 절규로부터 시작된 세계 여성들의 저항과 연대는 1세기가 가까워오는 지금까지도 산적한 도전과제들에 직면해 있다. <인권하루소식>은 오늘날 여성들이 처한 억압과 폭력의 문제를 3회에 걸쳐 살펴보기로 한다. <편집자주>


오늘날 여성노동의 대다수는 '비정규직'의 얼굴을 하고 있다. 전체 노동자의 60%에 육박하는 비정규직, 그 가운데 70%를 여성이 차지하고 있는 것. 비정규직이면서 여성이라는 사실은 이들에게 이중삼중의 고통을 감내해야 함을 의미한다.

지난 해 3월부터 대형할인점 '까르푸'에서 계약직으로 일해왔던 정향숙 씨. 지난해 9월 노조 건설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계약해지를 당한 후 지금까지 복직과 노조 인정을 위한 질긴 싸움을 벌이고 있는 향숙 씨는 비정규직 여성이 처한 현실을 한마디로 이렇게 말한다.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의 능력이란 얼마나 순종적인 노예가 되느냐에 달려있다."

까르푸는 지난 5년간 정규직을 대대적으로 정리해고하고, 그 자리에 비정규직을 채용하는 방식으로 노동 유연화를 진행해 왔다. 그 결과 현재 전국 28개 매장 노동자의 절반이 비정규직, 그 가운데 70%가 여성이다. 이들은 여느 비정규직 노동자들처럼 언제 일자리를 잃을지 모르는 위협 속에서 온갖 차별과 저임금·장시간 노동을 감수하고 있다.

더구나 까르푸에서는 일정 정도의 직급에 달하면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방식을 통해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을 이중 차별의 현실로 몰아넣고 있다. "능력이나 근속기간에 상관없이 여성들은 언제나 승진에서 남성에게 밀린다. 3년이 넘도록 아르바이트로 근무하는 여성들이 태반인 반면, 남성들은 대개 1년 정도만 근무해도 정규직으로 채용된다"며 향숙 씨는 긴 한숨을 내쉰다.

향숙 씨는 또 "매장 내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인간적인 대우를 받는다는 것도 상상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남성노동자들이 담배 피는 시간은 용납돼도 여성노동자들이 화장실을 가거나 잠시 쉬는 것은 곧 감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관리자들에 의한 성희롱도 일상적으로 겪는 일이다. "노조관련 유인물을 나눠주고 있으면 점장들이 '냄새난다'며 코를 막고 지나가거나 중지를 치켜세우며 노골적으로 모욕을 주기도 했지만,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참아야 했다"며 향숙 씨는 묵은 상처를 털어놓는다.

이는 비단 향숙 씨를 비롯한 까르푸 여성노동자들만이 겪는 일이 아니다. 많은 여성들이 가계소득은 감소하는 반면 자녀 양육과 교육 등에 드는 비용은 증가하는 현실에서 소득 부족분을 채우고자 노동시장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대다수 여성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차별적이고 비인간적인 '비정규직 노동'이다. IMF 이후 '필요할 때 쓰고 불필요할 때는 버리는 노동 유연화'를 핵심으로 하는 구조조정의 회오리 속에서 더욱 심화된 '비정규직화'는 이렇게 여성들을 주로 겨냥하고 있다.

차은영 교수(이화여대 경제학)의 '한국경제의 환경변화와 여성 경제활동의 전망'이라는 글에 따르면, 지난 90~97년 늘어난 임노동자 가운데 남성은 64.4%가 정규직으로 채용된 반면, 여성은 39.3%만이 정규직으로 채용됐다. 신규 채용의 60% 이상이 비정규직인 셈이다. 신규 채용뿐 아니라,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강제' 전환시키는 구조조정의 일차적인 대상도 바로 여성이다.

비정규직은 정규직 임금의 평균 50%를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견노동자나 용역노동자처럼 파견·용역업체의 중간착취가 존재하는 경우에는 40%에도 못미치는 임금을 감수해야 한다. 만성적인 고용불안은 이러한 노동조건이나 해고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투쟁을 봉쇄하는 효과를 낳는다. 국민연금과 고용·의료·산재보험 등 핵심 4대보험의 혜택으로부터도 대다수가 소외돼 있다. 여성노동자의 조직율이 5%에 불과한 현실은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여성노동자의 비정규직화'와 함께 여성들이 '특정 직종에 집중되는 현상'도 진행되고 있다. 대다수 여성들이 3차 서비스업종에 시간제나 임시직의 형태로 고용되고 있는 것이다. 차 교수의 글에 따르면, 2002년 9월 현재 여성노동자의 34.8%가 도소매·음식숙박업에 종사하고 있다. 할인매장, 은행창구, 식당, 역이나 빌딩 화장실, 학원 등 여성노동자들은 누군가를 접대하고 보조하고 보살피는 특정 업종에 주로 배치되는 것이다. 여성부를 비롯해 정부가 여성고용의 확대를 겨냥해 내놓는 신규 일자리도 복지서비스나 보육분야 등 가사노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업종에 한정돼 있다. 이렇게 가족내 성별 노동분업의 구조 자체를 그대로 노동시장으로 이전시킴으로써, 노동시장의 성 위계질서는 그대로 보존되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가사와 양육이라는 재생산노동의 책임을 여성에게 일차적으로 부여하면서 여성 인력을 비정규직의 형태로 노동시장에 흡수하려는 정책을 새 정부 역시 승계하고 있다. 새 내각에 여성장관이 4명이나 포진되는 등 노무현정부가 성 평등적인 정부로 인식되고 있지만, 사실은 여성의 빈곤화와 차별의 확산을 가져오고 있다는 비판이 그에 따라 제기되고 있다. 지난 3일 열린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전략과 여성'이라는 토론회에서 발제자로 나선 사회진보연대 송강현주 씨는 "시장은 결코 젠더 중립적인 공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의 성별 분업과 노동에서의 성별 위계, 여성의 저임금 불안정 노동화 경향, 재생산의 일차적 책임자로서의 여성의 지위 등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에는 손도 대지 않는 노무현 정부의 성 평등 정책은 본질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평가했다.

여성들은 지금 바닥을 향한 경쟁을 강요하는 비정규직화와 성별 노동분업에 맞서 스스로를 저항주체로 형성하지 않으면 안될, 힘겹지만 중요한 과제를 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