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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논평] '법적 안정성'이 아니라 인권과 사법정의다

대법원이 1972년부터 1989년까지의 공안, 시국사건 관련 판결문들에 대한 검토 작업에 들어가 사법부의 과거청산 작업이 진행될 것인가에 세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 방법 중에 하나가 재심을 통한 사법 판결의 오류를 시정한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이를 위한 '재심특별법'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대법원은 여전히 이에 대해서는 반대를 하고 있다. 이른바 '법적 안정성'을 해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다.

재심은 법원의 확정판결에 대한 구제수단으로 판결의 오류를 바로잡는 방법이다. 이 최후의 구제수단인 재심제도에 대해서 우리 법조계는 강력히 반발하고 있지만, 과거의 잘못된 판결을 바로 잡고 그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배상하기 위한 가장 올바른 방법이다.

그렇지만 형사소송법과 판례로 구축된 재심 요건은 매우 엄격해서 확정판결을 부인할 100% 새로운 증거가 발견된 때와 같은 경우에만 가능하다. 이는 일본이 1975년까지만 유지해왔던 입장이지만, 대법원은 아직도 이 판례를 고수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함주명 씨와 같은 고문에 의한 조작간첩의 의혹을 받는 사건인 신귀영 씨 사건에 대해서 대법원은 재심청구를 기각하였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공판기록조차 조작된 것이 밝혀진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재심청구도 시간만 끌면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법적 안정성'을 이유로 재심 요건 완화에 반대하는 대법원의 입장을 납득할 수 없다. 정치권력에 종속되는 사법 현실을 고치고자 소장판사들을 중심으로 문제제기를 할 때마다 '사법파동'으로 개혁의 싹을 잘라왔고, 독재자들에 간택된 정치판사들이 사법권력을 틀어쥐고 공안과 시국사건에서 맞춤형 판결을 해왔다는 것을 숱한 사례들을 통해 알고 있다. '법적 안정성'을 주창하는 세력들은 정치권력의 시녀라는 어두운 사법 과거사를 그대로 인정하고 덮어두자고 주장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그 판결로 인해 몇 사람이나 사형을 당했는지, 그 가족들은 얼마나 치 떨리는 세월을 살아야 했는지, 고문 가해자는 활개를 치면서 권력의 핵심부로 진출할 때 고문 피해자는 간첩의 누명을 쓰고 긴긴 감옥 생활을 해왔는지를 밝히지 말자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사법부의 잘못된 판결로 피해를 입은 국민의 입장이 아니라 사법 기득권 세력들의 현실 안정론일 뿐이다. 법적 안정성에 우선하는 정의의 실현을 위해 재심으로 기존 판결의 오류를 바로 잡으려는 사법부 과거청산은 지극히 온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신임 대법원장이 사법부의 과거를 청산하겠다고 다짐하는 이 마당에 국회가 재심 요건을 완화하는 특별법 제정만이 아니라 아예 형사소송법 재심 조항을 개정하기 바란다. 또 불법한 권력에 의해 제정·개정된 반민주적·반인권적 법률도 검토를 거쳐 개정하거나 폐기하기를 바란다. 사법부가 내세우는 법적 안정성은 인권과 사법정의보다 우선할 수 없다. 역사의 심판은 사법부의 판결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