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하루소식

법원, '조작간첩' 사건의 진실 찾기에 제동

허위 증언 밝혀져도 재심 기각


"내 판결은 오판이었다. 조작 가능성이 짙은 사건이었다." 87년 당시 대법원 판사로서 '간첩' 혐의자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던 박모 변호사는 훗날 시사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박 변호사는 "피고인은 사람을 살해한 무장간첩도 아니었고, 독침이나 권총 같은 증거물도 없었다"며 "설령 검찰의 주장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한평생을 감옥에서 보낼 범죄는 아니었다"고 밝혔다.

가족을 만나러, 혹은 사업차 일본에 다녀온 일이 조총련과의 회합 및 지령수수 혐의로 둔갑하고, 조업 중 납북되었던 어부가 귀환 10여 년 뒤에 간첩 혐의를 뒤집어쓰는 등, 70·80년대에는 의혹투성이의 '간첩사건'이 줄을 이었다. 적게는 수십일, 길게는 1백여 일이 넘는 장기 불법구금과 가혹한 고문 끝에 받아낸 '자백'이 공통적인 증거였다. 때문에 이러한 사건들은 통칭 '조작간첩 사건'이라 불린다.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 '70·80년대 조작간첩 사건'의 연루자들은 모두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의혹까지 풀린 것은 아니다. 이에 진실을 규명하고자 하는 노력도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최근 법원이 한 조작간첩 사건 관련자의 진실 찾기에 제동을 걸었다. 법원이 배척한 신귀영 씨의 사례는 조작간첩 사건의 단면과 현행 재심제도의 문제점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1980년 '가족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15년을 복역한 신귀영 씨도 '조작간첩사건'의 피해자다. 신 씨의 주요한 혐의는 '조총련 간부이자 형인 신수영 씨의 지시에 따라 부산의 주요 군사시설을 촬영'했다는 것. 그러나 신귀영 씨는 "조총련 간부가 아니어서 피고인들에게 지령을 내릴만한 지위가 아니었다"는 신수영 씨의 진술서를 확보해 94년 11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경찰이 구속영장 없이 40-70일 간 불법감금하고 고문으로 사건을 조작했다"는 이유도 덧붙였다.

1·2심 재판부는 모두 재심을 받아들였으나, 95년 대법원은 사건을 하급법원으로 되돌려보냈다. "새로 제출된 신수영 씨의 진술서만으로는 무죄를 인정할만한 명백한 증거라고 볼 수 없고, 신 씨 등이 주장한 관련 경찰관들의 고문, 감금행위도 별도의 확정판결이 없다"는 이유였다.

1차 재심청구에 실패한 신귀영 씨와 변호인은 새로운 증거를 찾아내 다시 재판부에 제출했다. 당시 목격자로 등장한 인물의 진술이 거짓이었음을 밝혀낸 것이다. 목격자 박모 씨는 '피고인들이 버스를 타고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고 증언한 바 있으나, 당시엔 관련 장소에 도로조차 없었던 사실이 확인됐다. 박 씨는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도 "자세하게 보지 못했다"며 증언을 번복했다.

그러나 박 씨의 새로운 증언만으로는 재심청구가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다. 형사소송법 상 '위증 혐의에 대한 최종 확정판결이 있어야 재심청구사유가 된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박 씨의 위증 혐의는 이미 공소시효가 완료돼 재판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에 신 씨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고, 민사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한 박 씨는 "'대공분실에서 전기고문을 당한 끝에 거짓 증언한 것"이라는 진술을 하게 됐다. 신 씨와 변호인은 이러한 사실을 재심청구의 근거로 다시 제출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2001년 8월 부산지방법원 제4형사부(재판장 서북현 부장판사)가 재심청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결정은 고등법원에 가서 다시 뒤집어졌다. 지난 7월 19일 부산고등법원 제1형사부는 "증언이 확정판결에 의하여 허위로 증명된 것이 아니고, 고문이 있었다는 점에 대한 확정판결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며 재심청구를 기각한 것.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버렸기 때문에 위증 혹은 고문 혐의에 대한 재판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알면서도 법원은 형식논리만을 앞세웠다.

신귀영 씨의 소송대리인 문재인 변호사는 "고등법원이 기록을 제대로 봤는지조차 의심스럽다"라며 "(목격자가) 본인 스스로 위증이라고 자복함에 따라 증거의 객관적 토대가 무너졌는데도, 거기에 위증 확정판결 운운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재판부를 비판했다. 천주교인권위원회도 성명을 내,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에서 확정판결에 의해 고문을 증명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냐"며, "재판부의 이런 논지는 재심의 존재의의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대법원마저 신 씨의 재심청구를 기각한다면, 공식적으로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편, 고문기술자 이근안에 의해 고문을 당한 사실이 확인된 이장형(84년 57일간의 구금조사 끝에 간첩혐의 인정. 14년 복역) 씨 사건을 비롯해 재심청구를 준비하고 있는 사건이 더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재인 변호사는 "간첩조작사건들에 대한 의혹이 합리적으로 제기되고 사회적 공감이 형성될 경우, 폭넓게 재심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특별법 제정을 고려해 봄직하다"고 말했다. 일반적인 재심을 청구하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경과해 관련자들의 공소시효가 이미 완료됐고, 따라서 재심청구가 기각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5·18특별법의 제정 이후 줄줄이 재심이 받아들여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전례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 문 변호사는 "당사자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뿐 아니라, 과거 간첩사건의 재판이 얼마나 엉터리였는지를 밝혀내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재심이 열려야 한다"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