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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황필규의 인권이야기] 레바논 베이루트에서의 단상

인권이 살아 숨쉬는 법의 지배를 꿈꾸는 모든 이들을 위하여

지난 2주간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진행된 미국 뉴욕대학(New York University) 주최 '세계공익변론, 이론과 실제'(Global Public Service Lawyering: Theory and Practice) 과정에 참여했다. 이 프로그램은 뉴욕대학이 지난해 헝가리 부다페스트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매년 여러 대륙을 돌며 전 세계 공익변호사들을 대상으로 진행하고 있는데, 올해의 인적 구성은 미국 교수진 2인, 레바논, 미국, 알바니아, 케냐, 필리핀 강사진 각 1인, 그리고 나이지리아, 레바논, 멕시코, 우간다, 우크라이나, 중국, 필리핀, 한국 참여변호사 19인 등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프로그램의 내용은 법제 개혁, 소송과 비소송방식의 다양한 전략전술, 국제적 기구의 활용 등에 관한 기본강의와 토론, 참여변호사 각자가 진행했거나 진행하고 있는 공익사건에 대한 발제와 관련 전략전술의 선택과 실행에 대한 참가자 전원의 집중토론 등으로 구성됐다. 2주간 이 과정과 함께 하며 느낀 점,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재확인한 점 몇 가지를 나누고자 한다.

첫째, 공익 혹은 인권과 관련된 법의 지배의 구현은 항상 법령의 제개정 혹은 폐지, 의사결정 및 집행기구를 포함하는 정책 혹은 제도의 확립, 그리고 이를 현실 사회에서 관철시키기 위한 준법의식이나 사회적 공감대 등의 문화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위 프로그램에서는 주로 동유럽, 아프리카, 남미, 동남아시아 등 소위 '과도사회'(transitional society)를 대상으로 위 '법의 지배'의 요소의 '단계적 발전', 특히 문화의 존재의 필요성과 어려움이 논의되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법제의 개혁을 구상할 때에는, 특히 법치주의의 정착이 어느 정도 진행되어온 한국의 상황에서는 이들 세 가지 요소 모두의 확보를 포함하는 총체적인 계획 수립과 실행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또한 전지구적 공익법운동 혹은 인권운동을 고민하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소위 '선진국'들을 선두로 '반테러'의 이름으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가장한 국익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혐의 없는 무기한 구금, 고문 및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혹은 굴욕적인 처우, 의도하지 않은(?) 민간인 살인에 대한 이들 국가의 국민 다수가 침묵하고 있는 현실이 매우 두려워하고 분노해야할 뿐만 아니라 더 주목해야할 부분일지도 모른다. 소위 '법문화'가 확립되어 있다는 이들 '선진국'들의 행태는 그들의 기준에 의하더라도 '법문화'의 파괴이며 '법문화'가 부재하거나 견고하지 못한 국가들에서의 이러한 파괴 작용은 훨씬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이는 인류가 쌓아 온 법의 지배의 역사 그리고 인권의 역사의 근저를 무너뜨릴 수 있는 큰 균열이 생기고 있음을 의미한다.

둘째, 하나의 사회적 이슈를 공략함에 있어 법제개선안의 마련 및 로비, 조사와 자료의 정리를 통한 감시, 이론적 또는 비교법적 연구와 출판, 행정절차 등 비사법적 절차에 의한 문제제기, 소송의 제기, 협상 및 조정, 언론 등 캠페인의 진행, 국제기구의 활용, 공무원, 활동가 또는 대중 교육 등 다양한 전략전술의 구사가 가능하다. 이러한 전략전술의 다양한 형태에 대한 논의와 더불어 프로그램 진행 중에 집중적으로 논의된 것은 이러한 전략전술의 결정주체가 누구인가, 더 나아가서 여러 이해당사자들의 입장이 다를 때 어떻게 운동의 방향을 정리하여야 하는가였다. 특히 소송의 경우 소위 '고객'은 문제가 된 구체적인 피해자인가, 잠재적 피해자 일반인가, 운동단체인가, 아니면 변호사(활동가)인가. 개별적 협상을 통하면 문제가 된 구체적인 피해자는 구제할 수 있으나 광범위한 캠페인으로 나아가면 그 피해자는 구제할 수 없을뿐더러 그 캠페인의 성공 전망조차도 그다지 밝지 않다면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 법제개정운동이 현실적으로 법제의 개악을 초래할 가능성이 더 많을 때에도 그 운동을 계속하여야 하는 것인가. 법규정 자체의 문제와 법의 집행과정상의 문제가 병존 할 때, 양자를 동시에 공략하는 것이 항상 바람직하거나 가능한가. 평소에 지속적으로 부딪치는 갈등과 딜레마에 대하여 차분히 정리하고 고민하는 열의와 진중함이 부족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셋째, 각국이 처한 정치적 상황, 법제도, 내부 갈등의 원인과 내용, 종교의 영향력, 남녀평등권이나 표현의 자유 등 기본적 인권 보장 수준 등은 천차만별이다. 케냐에는 기본적으로 여성차별적이고 나아가 일부다처제를 허용하기도 하는 4개의 각기 다른 종교법에 의한 혼인 등 5가지의 합법적인 혼인제도가 존재한다는 케냐 참가자의 발언에 한편으로는 신기하기도 했지만 어떤 연유에서건 혼인 시에 적용된 법과 다른 법에 의한 이혼 소송이 진행되고 위자료청구, 재산분할청구 등이 이루어졌을 때 얼마나 복잡한 문제가 발생할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등록이 없으면 은행구좌개설이나 정부지원은 받지 못하지만 활동은 가능한 상황에서, 관련 정부기관에 여성인권관련 비정부단체등록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5년이 넘게 걸리고 정부 측에서 시키는대로 써서 내면 금방 등록이 가능한 상황을 심각한 선택의 갈등상황으로 묘사하는 레바논 변호사의 발언도 쉽게 수긍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구화시대의 인권운동가에 있어서 인권의 국제네트워크는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초국경 이슈인 이주, 난민, 통상, 다국적기업의 문제에의 비교법적 접근이라는 측면이나 국제적 인권기준의 보편화 경향이라는 측면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아무리 다른 이슈나 상황을 전제로 할 때에도 전략전술에의 접근방법, 경험과 기술, 고민과 문제의식 등 일국 내에서 충분히 배울 수 없는 것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물론 이러한 국제네트워크는 국제기구의 여러 문헌들이나 이러저러한 학자들의 논문을 짜집기하여 재탕하거나 근거 없는 정서적 공감대의 확인을 통해 자기만족을 얻는, 따라서 그 자체로서는 유용하지도 건설적이지도 못한 일부 국제회의나 모임과는 구별된다. 국제네트워크는 상호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고 실제 이러한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상호 신뢰와 이해를 증진시키고 나아가 타국의 문제까지 실질적으로 고민하고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는 그런 네트워크이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전에 '인권, 자유와 평등을 향한 끝없는 여로'라는 말을 처음 접했을 때 전적으로 공감했고 특히 '끝없는'이라는 단어가 가슴에 와 닿았다. 지금은 '여로'라는 표현도 나름의 해석을 통해 크게 공감한다. 나그네의 길, 집을 떠난 길. 언제 집에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는 불안감은 있을지언정 집을 떠나 걷는 길에는 새로움과 즐거움은 있어야하지 않을까. 당위를 넘어선 자유로움과 공세적인 여유. 인권활동 자체를 통한 즐거움과 더불어 항상 재충전을 통해 오래 길을 갈 수 있는 것. 비록 돌아와서 사무실에 출근하여 산더미같이 쌓인 일들에 한숨을 짓기는 했지만 레바논 행은 프로그램 그 자체와 여유시간 모두 재충전의 기회를 준 것 같다. 나는 춤을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20세기 초 미국의 한 유명한 무정부주의자가 남겼다는 다음의 말이 종종 기억난다.

"내가 춤을 출 수 없다면, 나는 당신의 혁명의 일부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덧붙임

황필규 님은 아름다운재단 공익변호사그룹 공감 변호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