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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아시아 민중의 인권현장] 내 생애 가장 길었던 1주일

식민의 땅, 웨스트 파푸아를 가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웨스트 파푸아 상황을 알리기 위해 필리핀까지 건너온 베니 교수와 도나의 간절한 눈빛이 여행 내내 아른거렸다(<인권하루소식> 2813호 참조). 결국 전혀 계획에도 없었던 웨스트 파푸아로 길을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말 긴 1주일을 보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외국인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다. 외국인은 각 방문지 관할 경찰서에서 여행증명서(surat jalan)를 받아야 한다. 우리도 센타니(Sentani)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인근 경찰서부터 가서 사진 두 장을 제출한 뒤 여행증명서를 받았다.

그리고 1주일 동안 우리가 목격하고 들은 것은 인도네시아의 웨스트 파푸아인들에 대한 대량학살 그 차제였다. 인도네시아는 자신들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인종·민족인 웨스트 파푸아인들을 생물학적·사회적으로 말살하기 위해 온갖 반인륜범죄를 저지르고 있었다.

제복과 사복을 입은 경찰이 거리 곳곳을 헤집고 다니고 중무장한 군인들이 떼 지어 다니고 있었다. 이주민들이 상권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고 교육정책이나 의료정책도 이주민들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인도네시아 HIV/AIDS 환자의 약 40%가 전체 인구의 1%도 안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웨스트 파푸아에 분포되어 있다. 웨스트 파푸아 안에서도 이주민들보다 원주민들의 감염률이 훨씬 높다. 정부의 에이즈 예방정책이 이주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도시지역에 집중되어 있고, 원주민들이 고용된 성매매산업보다는 이주민들이 고용된 성매매산업에 차별적으로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행객이 체험한 웨스트 파푸아

인도네시아 정부의 숨막힌 억압정책은 외국인 여행객을 피해가지 않았다. 웨스트 파푸아에 도착한지 이틀째 되는 날, 한 신부님의 소개로 인권단체 '에이엘디엘'(ALDL)을 방문했다. 마침 단체 젊은 활동가들이 그날 예정되어 있던 원주민의 날(indigenous day) 기념 집회를 위해, 와메나(wamena) 지역의 전통가옥과 교회모형을 만들고 퍼포먼스를 준비하고 있었다. 2003년 4월 인도네시아 군대는 군대 무기 도난 사건과 관련해, 혐의자가 거주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와메나(Wamena) 지역과 그 인근지역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을 진행했다. 이때 9명이 살해됐고 38명이 고문당했으며 15명이 불법구금 되었고, 25개 마을에서 약 7000여명의 사람들이 군인들을 피해 정글로 도망갔다. 활동가들은 퍼포먼스로 와메나 사건을 고발하려 했다.

그들을 따라 집회장소에 갔는데 역시나 수많은 무장군인들이 집회 장소 입구를 통제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 사람인척 하고 자연스럽게 집회 대열에 합류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누군가 나를 향해 "미쓰 리!"(Miss Lee!)라고 부르며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여행증명서를 발급 받을 때 만났던 경찰이다. 갑자기 경찰들이 우리를 에워싸더니 집회 장소에 들어갈 수 없다면서 경찰서로 가자고 한다. 여행증명서를 내보이며 뭐가 문제냐고 항의해보지만 경찰들은 무조건 택시를 잡고 경찰서로 데리고 갔다. 그들이 주장하는 이유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집회현장 사진을 찍었기 때문이란다. 아무 것도 모르는 관광객인척 하고 일단 경찰서에서 나왔다. 그 날 경찰 6명이 우리가 머무는 호텔 로비를 서성거렸고, 경찰 한 명은 밤 늦게 여권제시를 요청하며 웨스트 파푸아에 들어온 이유를 집요하게 캐물었다.

웨스트 파푸아에 도착한지 5일째 되는 날인 2005년 8월 12일 인도네시아 정부에 대한 대화 촉구 및 특별자치법 철회를 위한 대규모 평화 집회가 열렸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1963년 웨스트 파푸아를 침략하고 자유투표법(Act of free choice)을 통해 침략을 합법화하려고 했으나 이에 대한 웨스트 파푸아인들의 저항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무력과 차별 및 배제정책을 통해 웨스트 파푸아인들의 저항에 대응했다. 그러나 웨스트 파푸아인들의 저항이 계속되고 동티모르 사태를 통해 인도네시아 군경의 잔혹함이 전세계 비난의 대상이 되자, 와히드가 1999년 특별자치법을 제안했다. 그리고 메가와티 전 대통령이 2001년 특별자치법을 제정했다. 주된 내용은 △국가인권위원회의 역할을 겸하는 '화해와 진실위원회'를 설립하고 △국제관계·방위·재정정책·대법원 기능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권한을 웨스트 파푸아 지방정부에게 이양하며 △종교·종족·여성을 대표하는 기구로 파푸아 의회(Papuan peoples assembly)를 설립하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특별자치법 시행 이후 웨스트 파푸아인들의 삶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인권침해는 계속되었고 특별자치법 시행 후 3년 만인 2004년 12월 설립된 파푸아 의회는 의사결정기구가 아니라 단순 자문기구에 그쳤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정부는 2003년 9월 웨스트 파푸아를 3개의 도로 나누는 법을 통과시켰는데, 웨스트 파푸아인들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특별자치기금은 부패한 공무원과 군인들의 주머니로 들어가 나오지 않고 있다. 웨스트 파푸아인들은 처음부터 인도네시아 정부가 실행의지 없이 웨스트 파푸아인들을 분열로 몰아넣기 위해 특별자치법을 제정한 것이고, 이제 특별자치법은 완전히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날 약 1만여 명의 웨스트 파푸아인들이 오전 7시 아베뿌라(abepura)의 트리코라(trikora) 광장에서 1차 집회를 가진 다음 오전 9시부터 약 25킬로미터 떨어진 자야뿌라의 의회 건물까지 걸어가서 2차 집회를 열었다. 시위 행렬은 특별자치법의 죽음을 의미하는 관을 앞세우고 걷기 시작했는데, 강렬한 햇빛 때문에 1시간도 걷기 어려운 상황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자야뿌라를 향해 언덕을 오르내렸다. 일부 학교·회사·상점들은 충돌을 우려하여 문을 닫았고 시위대를 지지하는 일부 상점과 주민들은 그들을 위해 물과 음식을 준비하기도 했다.

트리코라 광장에서 집회 준비를 하고 있다.

▲ 트리코라 광장에서 집회 준비를 하고 있다.



트리코라 광장이 마침 우리가 묵던 대학 게스트 하우스 바로 앞이라 아침부터 서둘러 집회 장소로 달려갔다. 며칠 전 만난 경찰이 신경 쓰였으나 그들의 열망을 사진에 담고 싶어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그런데 몇 분 후 호텔에서 우리에게 여권제시를 요청한 경찰이 나타나더니만 어금니를 꽉 물고 으르렁거리며 화를 낸다. "호텔에서 주의를 줬는데, 왜 또 사진을 찍느냐?", "웨스트 파푸아에 온 목적이 무엇이냐?"며 한바탕 난리를 폈다. 우리 기세가 꺾이지 않는 것이 더 화가 나는지 "내가 누군지 아느냐, 보안군(security force)이다"라며 주변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위협한다. 미국 국무부의 각국 인권보고서는 인도네시아 보안군을 무차별 살해·고문·강간·구타·불법구금 등 온갖 인권침해의 책임자로 지목하고 있다. 보안군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외국인에게 그것을 협박으로 사용하니 웨스트 파푸아인들에게는 어떻겠는가?

그 후 경찰 몇 명이 계속 우리를 주시하고 따라다닌다. 계속되는 경찰의 주목과 미행이 숨막히게 만든다. 어쩔 수 없이 자야뿌라에서 다시 결합하기로 하고 트리코라 광장을 떠났다. 그 날 트리코라 광장에서 만나기로 한 아눔(Anum) 변호사에게 "경찰이 계속 따라다녀 먼저 자야뿌라에 가겠다"라고 핸드폰 메시지를 보내니 우울한 회신을 해왔다. "The police follows everyone, dont worry but take care"(경찰은 모든 사람들을 따라다니니 걱정하지 말라) 마을이 작아 모두가 서로 다 알만한 공간에서 서로 감시하고 감시당하며 사는 곳, 그곳이 웨스트 파푸아이다.

아베뿌라에서 자야뿌라까지 25킬로미터 되는 거리를 약 1만여 명의 사람들이 행진했다.

▲ 아베뿌라에서 자야뿌라까지 25킬로미터 되는 거리를 약 1만여 명의 사람들이 행진했다.



땀으로 범벅된 시위대가 특별자치법 관을 앞세우고 자야뿌라 시내로 들어올 때 많은 사람들이 박수와 환호성으로 이들을 맞이했다. 원주민들은 의회 마당에 들어가 2차 집회를 진행했고, 미처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의회 밖 공원에서 집회 내용을 전해 들으며 서로의 의견들을 나누고 있었다.

아눔 변호사를 기다리기 위해 뜨거운 뙤약볕을 피해 광장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는데, 갑자기 아침에 자신을 보안군이라고 이야기한 그 사내가 어디선가 나타나더니만 다짜고짜 경찰서로 가자고 한다. 역시 어금니를 악물면서 이곳에 온 목적이 무엇이냐며 으르렁거린다. 그리고 옷을 잡아당기며 경찰서나 출입국관리 사무실에 가자고 한다. 이번에는 사진도 찍지 않고 그냥 집회 현장 부근에만 있었을 뿐인데 말이다. 그리 간단하게 해결될 거 같지 않았다. 어처구니없고 염치없게도, 독립운동으로 가장 위험에 처해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베니 교수에게 전화로 도움을 청했다. 다행히 인권단체 '엘스함 파푸아'(ELSHAM PAPUA)에서 활동하는 인권변호사 알로이시우스(Aloysius Renwann)와 함께 경찰서에 가서 겨우 위험한 상황을 모면했다.


인권단체를 통해 본 웨스트 파푸아 상황

웨스트 파푸아에서 가장 열심히 활동하는 인권단체 '엘스함 파푸아'와 사무국장 알로이시우스와의 인연은 웨스트 파푸아의 현재 상황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단체는 네덜란드 교회의 지원으로 운영되었는데, 2년 전부터 자결권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지원이 중단되었다. 더구나 최근에는 인도네시아 군부의 인권침해 문제를 제기한 것과 관련하여 명예훼손으로 인한 손해를 배상하라는 1심 판결까지 받았다. 인권침해 사건 조사에 대한 인도네시아 군경의 협박과 위협은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 단체가 미국인 교사 살해 사건을 조사했는데, 군부의 협박으로 그 때 같이 조사했던 활동가는 미국으로 건너가 아직 웨스트 파푸아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군부는 웨스트 파푸아 국민총생산(GNP)의 1/2을 차지하고 있는 초국적 광산 회사 '프리포트 인도네시아'(Freeport Indonesia, 미국 'Freeport-McMoran Copper and Gold Inc.'의 자회사임)로부터 보호의 대가로 매년 엄청난 지원금을 받고 있다. 군부는 프리포트 인도네시아로부터 더 많은 재정지원을 받기 위해 군사충돌을 조장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2002년 8월 31일 프리포트 인도네시아에 고용된 미국인 교사 2명과 인도네시아 교사 1명이 매복한 괴한이 쏜 130발의 총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다. 인도네시아 경찰과 '엘스함 파푸아'의 조사 결과 이 사건은 인도네시아 군부의 조작으로 밝혀졌다. 미국 측도 인도네시아 군대가 독립운동 단체인 '자유파푸아 운동'(OPM)을 미국의 테러리스트 명단에 포함시키고 프리포트 인도네시아로부터 더 많은 군사지원비를 받기 위해 사건을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그러나 군부는 이를 강력히 부인하며 이를 조사한 '엘스함 파푸아'를 계속 협박하고 있다.


알로이시우스가 만나는 사람들

그러나 알로이시우스 변호사의 얼굴은 열정으로 가득차 있다. 알로이시우스는 자기 몸집만 한 스쿠터를 몰며 인권침해 사건이 발생하는 현장과 경찰서·교도소·법원을 부지런히 다니고 있었다. 마침 그가 2004년 12월 1일 웨스트 파푸아 독립의 상징인 국기 '모닝스타' 게양식을 가졌다는 이유로 각각 15년형과 5년형을 선고받은 필립 카르마(Filip Karma)와 유삭 파카쥐(Yusak Pakage)를 접견하러 간다고 해 함께 했다. 와히드 전 대통령이 모닝스타 게양을 허가했는데도 인도네시아 군경은 이를 국가 모독행위로 보고 처벌하고 있는 것이다.

가운데가 필립 카르마, 맨 왼쪽이 유삭 파카쥐. 2004년 12월 1일 모닝스타를 게양했다는 이유로 각각 15년형과 5년형을 선고받았다.

▲ 가운데가 필립 카르마, 맨 왼쪽이 유삭 파카쥐. 2004년 12월 1일 모닝스타를 게양했다는 이유로 각각 15년형과 5년형을 선고받았다.



필립 카르마와 유삭 파카쥐는 재판과정에서도 인권을 침해당했다. 법원은 2005년 5월 11일 당초 선고시간보다 1시간 앞당겨 변호사도 참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에게 선고를 했다. 이날 이들의 석방을 주장하며 법원 앞에서 항의시위를 하던 웨스트 파푸아인들은, 법원이 변호사의 참여 없이 재판을 진행하는데 대하여 항의하며 해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경찰은 이들을 강제진압했고, 법정 안에 있던 판사들은 경찰을 피해 법정 안으로 도망간 학생들을 구타하기까지 했다.

판사에게 구타당한 학생 가운데 한 명인 미라(가명)를 '엘스함 파푸아' 사무실에서 만났다. 미라는 그날 약 30여명의 집회 참가자들과 함께 경찰서에 강제 연행되었는데 경찰서에 도착하자 경찰이 그녀의 허벅지에 원인불명의 액체를 주사했다고 한다. 병원에서도 그녀의 몸에 주입된 주사액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공포스러운 상황에서도 그녀는, 자신은 웨스트 파푸아인이고 웨스트 파푸아인과 함께 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소리 높일 책임이 있다고 말하며 저항운동을 계속 하겠다고 한다.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진지하게 답해 준다. 첫째는 웨스트 파푸아의 독립이고, 둘째는 다른 나라 사람들처럼 우리도 인간으로 대우받고 인권이 존중되는 것이라고.

인권단체 '엘스함 파푸아'가 전하는 인권 상황은 끔찍했다. 알로이시우스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사건을 소개해달라고 하니, 인권침해 사건을 국내외적으로 공론화하는데 기여한 1994년 티미카 사건을 얘기했다. 1994년 '자유파푸아 운동'의 지도자 켈리 콸릭(Kelly Kwalik)은 프리포트 인도네시아와 군부가 티미카 지역 근처로 확대되는 것에 저항했다. 이에 대해 인도네시아 군부가 1994년 10월 6일 켈리의 평범한 형제 4명, 세바스티아누스 콸릭(Sebastianus Kwalik), 로물루스 콸릭(Romulus Kwalik), 마리오스 콸릭(Marios Kwalik), 호에사 콸릭(Hoesa Kwalik)을 켈리 및 '자유파푸아 운동'과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체포했다. 군부는 이들을 배 컨테이너에 감금하고 고문했는데 이들은 지금까지 실종상태이다. 콸릭 형제들이 체포된지 3일만에 추가로 5명이 동일한 혐의로 체포·구금되었는데, 이 가운데 켈리 콸릭의 어머니인 율리안 마갈(Yulian Magal, 당시 나이 50세)과 또 다른 여성 요세파 알로망(Yosepha Alomang, 당시 나이 37세)은 오물이 무릎까지 차는 화장실에서 한 달 동안 구금되었다.

'엘스함 파푸아'의 사무국장인 인권변호사 알로이시우스

▲ '엘스함 파푸아'의 사무국장인 인권변호사 알로이시우스



웨스트 파푸아를 떠나는 토요일 오전, '엘스함 파푸아' 사무실을 방문했는데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알로시우스도 아침부터 분주하게 무엇인가 준비하더니, 작별의 인사를 나누기 바쁘게 스쿠터를 몰고 또 다른 어딘가로 향했다.


"인간들의 사랑과 유대감은 고독하고 절망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싹튼다."

웨스트 파푸아에 있는 동안 감당하기 어려운 시선들을 너무 많이 받았다. 웨스트 파푸아인들은 노골적으로 진행되는 인도네시아의 대량 학살 앞에서 국제사회의 압력 없이는 그들의 광기를 멈출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억압과 공포가 일상이 되어버린 현재 상황에서 연대만이 그들을 지켜준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나 뜨거웠고 간절했다. 그러나 나는 자야뿌라 교도소에서 그리고 '엘스함 파푸아' 사무실에서 그들의 눈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내 일기장 맨 마지막 장에 인쇄된 체게바라의 어록이다. "인간들의 사랑과 유대감은 고독하고 절망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싹튼다." 연대를 원하는 그들의 호소에 언제쯤 화답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