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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기억하는 4.16] 세월호 참사 목격자들의 애도의 권리

[편집인 주]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겠다는 약속은 참사 당일에 벌어진 일을 기억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세월호참사국민대책회의 존엄과안전위원회'는 우리의 삶에서 이어지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참사에 직면하자고 제안한다. 세월호 참사 이전과는 달라져야 한다는 열망은,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지 끊임없이 질문할 때 사회를 바꿀 힘이 된다. 매주 <인권오름>에 실릴 글이 질문을 함께 품는 과정이 되기를 바란다.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 인권선'언은 함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되지 않을까.

우리는 왜 광장으로, 거리로 모였을까.

2014년 4월 16일,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일이라고 믿을 수 없는, 감당하기 어려운 마음이 끊임없이 출렁거리는 시간들이 이어졌다. ‘참사’라고 불리는 사건들이 충격적이고 비통한 일이기는 하지만 참사 초기의 오보부터 시작해서 304명의 생명이 속수무책으로 수장되는 과정을 생중계로 목격하는 것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수학여행길에 올랐던 학생들과 저마다의 계획을 품고 제주도행을 나섰던 사람들, 뱃길을 인도하던 승무원들이 왜 단 한명도 구조되지 못한 것인지, 배가 왜 뒤집혀 가라앉는 것인지 납득할 수 없는 상황과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의문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마음을 졸이고 슬픔에 잠기면서도 분노와 함께 질문은 계속 맴돌았다. 마치 바다 속에 잠긴 생명들이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슬픔을 가슴에 품고 스스로 그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움직였다. 포기하지 않고 실종자들을 찾기 위해 지원하고, 희생자들을 죽음을 애도하면서 유가족들을 위로했다. 무엇보다 진실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이 참사에 대해 우리 사회가 책임을 질 수 있기를 요구했다. 세월호 참사로 우리는 소중한 생명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민낯을 보았기 때문이다. 304명의 부재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무엇이 부재했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부재에 대한 책임은 우리를 슬픔 앞에서 무기력하게 놔두는 것이 아니라 더욱 적극적으로 애도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비통한 감정으로 세월호 참사를 겪어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후회스런 고통 때문이 아니었을까?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고통. 그 참사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에서 일어났고, 그 세계를 쌓아올린 우리 자신을 향한 후회와 책임. 배를 버리고 도망간 선장에게만 지울 수 없는 책임과 유가족들에게만 남겨놓을 수 없는 슬픔이 우리 안을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애도의 행동을 했다. 애도는 우리가 함께 연결되어있음을, 고통과 슬픔에 책임이 있음을 드러내는 행동이었다. 304명의 생명이 우리에게 던진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애도의 행동을 멈출 수가 없었다.

삶과 생명을 위한 애도의 권리

어떤 이들은 함께 참사를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관찰자(혹은 구경꾼)의 태도가 되어 저 무책임하고 파렴치한 선장을 처벌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자고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슬픔을 일시적인 감정이라고, 당사자들만의 문제라고 슬픔을 빨리 끝내고 제자리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그 관찰자들은 참사를 결코 ‘우리’의 문제라고 말하지 않고, ‘목격자’들이 받은 질문을 외면한다. 목격자들은 그저 참사를 바라보지만 않았다. 묻고 되뇌이고 다시 또 물었다.

세월호참사의 목격자가 된 우리는 ‘기억하겠다,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기억하겠다는 것은 참사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을 상기하겠다는 의미이다. 질문을 상기하고 해답을 찾기 위해 ‘함께 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나는 그 실천들이 애도라고 생각한다. 언론에서 밝히지 않는 의혹들을 제기하며 언론이 제 역할을 하도록 비판했다. 아픈 마음을 나누며, 연대하는 실천들을 제안해서 모였고, 참사의 실체를 밝히며 책임을 요구하는 집회에 참석했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과 고통을 슬퍼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 참사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지 진실을 밝히기 위해 연대하고 있다. 왜냐하면, 애도하는 실천이 비참과 고통에서 회복하는 힘을 키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망각하는 것이 아니다. 슬픔은 시간이 흘러 옅어질 수는 있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에게 슬픔과 고통을 품고도 살아갈 수 있는 힘과 희망이 필요하다. 삶을 회복하는 힘은 애도를 실천하면서 차곡차곡 쌓여간다. 같은 참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노력, 이윤보다 인간을 위한 사회를 만드는 변화가 우리의 애도의 과정이다. 그래서 애도는 ‘삶과 생명’을 위한 권리다. 함께 살아가기 위한 연대의 권리이고, 진실을 향한 권리이다. 애도는 시간이 흘러 슬픔이 옅어진다고 끝나지 않는다.

범죄가 된 애도의 권리

4월 16일, 그날로부터 진실을 찾아 한발 나아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해경과 대통령을 비난한 목소리들은 신속하게 검거되었으며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집회는 금지되기 일쑤였다. 특히 청와대 주변에 대한 집회는 전면적으로 금지되었고 1인 시위마저 방해받았다.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집회에서 경찰은 하룻밤에 백 명을 연행하고 대통령이 책임지라며 청와대로 향하는 국민들의 행진을 방해하고 마구잡이로 채증하기에 급급했다.
[사진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 [사진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곳은 어디나 경찰로 둘러싸여 있었다. 진실을 밝히고 책임을 져야한다는 목소리는 원하는 곳에 닿지 못하도록 봉쇄되었다. 참사에 분노했던 것만큼이나 아무 말도, 행동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정부의 대응에 분노했다. 그리고 공권력의 폭력으로 가로막는 것도 모자라 범죄자로 만들고 있다. 스스로 참사의 목격자로, 사회구성원으로서 당연한 행동이라도 믿었고 남겨진 사람의 몫이라 여겼던 행동들이 범죄가 되어 경찰서로 불려가고 몇 백 만원의 벌금 통지를 받게 되었다. 평화적 집회를 보장하는 권리가 집시법과 일반교통방해에 가로막히면서, 애도의 공간은 사라지고 애도의 권리도 실종되었다.

두려움을 긍지로

연행과 소환, 벌금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개인에게는 두려움이자 억울함이 공존하는 시간이며, 자신의 행동에 대한 긍지를 훼손당하는 경험이다. 거리에서 경찰에 둘러싸여 가로막혔던 순간, 두렵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긍지의 마음 때문이었다. 그것이 정의이고 인간의 행동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두렵지만 당당할 수 있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두렵지만 용납할 수 없는 시간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질문도 갖게 되었다. 왜 애도가 범죄란 말인가? 참사의 책임에 가장 많은 짐을 져야하는 하는 정부는 참사 이후 내내 외면하더니 이제는 애도하는 사람들을 범죄자로 만들었다. 애도를 폄하하는 구경꾼들처럼 정부도 애도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비겁하고 잔인한 정부 때문에 우리는 다시 두려움을 긍지로 바꾼다. 세월호 참사가 던진 질문에 행동으로 해답을 찾아 나섰던 것처럼 우리는 다시 행동으로 애도는 권리라고 답할 것이다.

의견을 표현하며 슬픔을 나누고 서로를 위로하는 권리, 진실을 찾아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고 정치적 항의를 하는 권리, 안전한 사회를 구축하고 함께 삶을 살고자 연대하는 권리. 이런 권리들을 지켜내기 위해 우리는 애도의 행동을 멈출 수 없다. 아직도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고 질문의 답은 아직 얻지 못했다. 애도의 권리를 가로막는 권력에 불복종하며 애도를 실천하는 것이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덧붙임

랑희 님은 인권운동공간 '활' 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