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하루소식

'학교폭력' 대책에서 피해자 인권의 자리는?

학생폭력 피해자 지원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워크숍

△ 병원관련 팀 : 사법절차상 복잡한 절차를 피하기 위해서 숨진 상태라도 후송 중 숨진 것으로 하라.
△ 보상해결 팀 : 피해학생 가계와 친인척의 성분을 파악하라.
△ 언론, 사법기관 통제 팀: 동창회, 학교운영위원회, 학부모회 등의 협조를 얻어 보도와 수사로 인한 학교측의 피해를 최소화하라.
△ 기밀유지 팀: 수사기관이나 언론기관이 손쓰기 전 유서, 일기장, 편지 등을 찾아 사건 해결에 불리한 내용은 정리해 두라.
△ 사전교육 기록점검 팀 : 학급일지, 교무일지, 생활지도일지 등에 인간존중, 따돌림 예방과 치료교육 상황을 점검하고 기록이 없으면 즉시 보충하여 써넣어라.

지난 2002년 경남도교육청이 교내 학생폭력으로 인한 사망사고가 발생했을 때 학교가 취해야 할 행동수칙을 담아 일선학교에 배포한 <학생 생활지도 길라잡이>의 일부 내용이다. 피해자의 인권과 피해자 가족의 아픔을 진정으로 보듬고 사건의 뿌리를 근절하려는 의지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최근 이 자료가 언론에 공개되자 경남도교육청은 즉각 사과문을 발표했고 교육부도 부랴부랴 수습에 나섰다. 하지만, 이 지침은 경남도교육청만의 문제가 아니라 학생폭력 사건을 축소·은폐함으로써 그간 책임 회피에 급급해 왔던 교육당국의 인식을 적나라하게 고백하고 있다는 데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더구나 이 자료가 배포된 지 3년째가 되도록 일선학교에서 아무런 문제제기가 없었다는 점도 놀라움을 더한다.

문제의 교내 사망사건 처리지침이 담긴 경남도교육청 발간 자료

▲ 문제의 교내 사망사건 처리지침이 담긴 경남도교육청 발간 자료



'학교폭력' 대책에 피해자 인권은 없다

"학교에서는 가해자 편을 들어 사건을 축소해야 학교의 명예가 지켜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육당국도 피해자 가족을 돈이나 뜯어내려는 집단으로만 치부해 왔습니다. 그러니 피해자의 인권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피해자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지요."

학교폭력피해자가족협의회 대표이자 2000년 4월 성수여중사건 피해자의 어머니이기도 한 조정실 씨는 피해자의 절박한 외침을 외면하고 사건을 해결하려는 학부모를 '자식 팔아 한 몫 챙기려는 부모' 정도로만 바라보는 사회에 대해 울분을 토해냈다.

교내에 감시카메라(CCTV)가 들어서고 지난 2일부터는 부산에서 스쿨폴리스제도가 시범운영에 들어가는 등 학생폭력 대책들이 떠들썩하게 전개되고 있지만, 실효성있는 피해자 지원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가운데 학교 안팎에서 피해자를 실질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살펴보는 작지만 의미있는 자리가 열렸다. 지난 4월 28일 문화연대, 인권운동사랑방, 전교조, 평화를만드는여성회 등으로 구성된 '학교폭력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네트워크'(아래 학교폭력네트워크)는 1차 월례 워크숍을 개최하고, 학교 안팎의 피해자 지원체제 구축 방안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조 대표는 "지금은 피해자 가족이 자기 돈 들여 아이를 치료하고 생업까지 내팽개치고 증거 확보에 나서야 하는 형편"이라면서 "더구나 피해 입증을 위해 신체감정을 받을라치면 어른들조차 견디기 힘든 폐쇄병동에 갇혀 보름에서 한달간 관찰을 당해야 한다"면서 사건 해결 절차가 피해자 중심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행 '학교폭력예방및대책에관한법'에 심리상당 및 조언 일시보호 치료요양 등의 대책이 마련되어 있지만, 재정이 확보되지 않아 피해자측에 전적으로 비용이 전가되고 있다는 것이다.

학교폭력대책국민협의회 박병식 공동대표(용인대 경찰행정학) 역시 정부가 내놓은 피해자 지원 방안이 얼마나 실효성이 없는지를 하나하나 짚으면서,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쫓기듯이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는 현실이야말로 피해자에 대한 대책이 얼마나 빈곤한지를 잘 보여준다"고 꼬집었다. 박 대표는 또 학교 밖 지원대책에 관해 정부대책의 통일성 부족 지역사회의 현실에 맞는 대책 부재 해결과 지원을 요청할 일원화된 창구의 부재 등의 문제가 산적해 있다면서, 각 지역에 총괄적인 지원창구인 'One-Stop 서비스 시스템'을 구축하자고 제안했다.

송병춘 변호사는 "학내 징계절차나 사법조사 과정에서 피해학생에 대한 법적 보호장치가 전무한 실정인데다 검·경에서는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은 채 합의를 종용하거나 무혐의처분을 내리는 경우가 다반수고 법원에서는 정신적 손해를 인정받기 힘든 형편"이라면서 피해자를 위한 특별한 '법률구조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근본적인 대책은 급하지 않다?

이날 워크숍에서는 결국 학생폭력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은 학생들의 권한과 문제해결능력을 강화하는 데 있다는 광범위한 합의가 형성됐다.

이한섭 교사는 "학교 안의 관리와 통제 문화가 오히려 학내 폭력문제를 키우고 있다"면서 "관리와 통제 문화에 대항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학생회 법제화 등을 통해 학교 안 민주주의가 자리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고등학교학생회연합회 출범준비위원인 김한솔 학생도 "학생들 간의 유대를 회복하고 청소년법정 등 또래들 사이의 문제해결능력을 키워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병춘 변호사 역시 "학생폭력이 자주 일어나는 이유는 가해자는 패거리화되어 있는 반면 피해자는 무권리 상태에서 개별화되어 있기 때문"이라면서 긴 호흡의 교육적 해결책만이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박병식 대표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지금 당장 피해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대책이 절실하다"면서 장기적인 교육적 해결책도 중요하지만 학교 밖의 힘을 빌어서라도 지금 당장 학생폭력을 뿌리뽑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학교폭력대책국민협의회나 청소년폭력예방재단 등의 단체들이 스쿨폴리스 제도에 대해 적극적 반대를 표명하지 않거나 혹은 경찰의 적극적 개입을 요청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학교폭력네트워크는 근본적인 해결책이기 때문에 더더욱 시급히 시행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거듭 표명했다. 교육을 통한 가해학생의 변화야말로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하는 최선의 해결책일 수 있고, 피해자를 위한 긴급지원책과 함께 근본적인 해결책을 지금 당장 시작하지 않는다면 학생들은 영원히 대상화되고 무기력한 피해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낙인'의 문제, 어떻게 할 것인가

한편, 이날 방청객으로 참여한 한 학생폭력 피해자의 어머니는 "집단따돌림을 당한 아이를 전학시켰더니 전학간 학교에 이미 소문이 파다하고 심지어 학교장은 아이를 받아주는 대가로 기부까지 요구하더라"면서 피해자라는 굴레가 아이들에게 또다른 상처가 될 수 있음을 환기시켰다. 이와 관련해 김한솔 학생은 "피해사실이 드러나면 그 순간부터 피해자는 교사와 학생들 사이에서 묘한 차별에 시달리는 등 이중적 고통을 겪게 될 뿐 아니라, 가해학생에게도 지속적인 낙인이 따라붙게 된다"면서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가 이런 상처를 겪지 않도록 인권보호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날 워크숍 자리에서는 피해학생과 가해학생 공히 겪게 될 '낙인'의 문제와 관련한 뚜렷한 해결책이 제시되지 못했다. 피해학생이 폭력을 피해 전학을 가더라도 '폭력 피해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붙고, 가해학생의 경우에도 공적 해결이나 처벌 과정에서 '가해자' 혹은 '범죄자'로 자신을 정체화해 피해자에 대한 진정한 사과는커녕 폭력의 고리에 더 깊숙이 빠져드는 현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명확한 해답이 나오지 못한 것이다.

학교폭력네트워크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계속 이어나가는 한편, 다음 달 '학생인권과 학교폭력'을 주제로 2차 월례 워크숍을 개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