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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이야기

우린 왜 미끄러지는 걸까

성폭력 사건의 공동체적 해결과정 곱씹기 워크숍

지난해 8월 ‘성폭력 사건의 공동체 내 해결’이라는 주제를 놓고 인권단체 활동가들이 간담회를 열었다. 조직 내 성폭력이라는 화두는 운동사회도 예외일 수 없다. 이번 워크숍은 작년 간담회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잇는’ 자리다. 운동사회에서 ‘조직 내 성폭력’은 비교적 자주 일어나지만 문제가 발생하면 그 사건의 안팎으로 연루된 이들은 쩔쩔매고 쉬쉬한다. 성폭력이라는 화두는 다른 어떤 주제나 조직 내 어려움보다도 공동체와 그 구성원을 압도한다. 왜 우리는 성폭력 사건 해결 과정을 ‘더’ 힘들어 하는 걸까? 왜 조직 내 성폭력이 조직에 돌이킬 수 없는 신뢰의 위기를 초래하게 되는 걸까. 왜 매번 성폭력 문제 해결 과정이 실패했다고 느끼는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 앞에 눈을 질끈 감기보다 더 많은 말을 ‘이어’가보자는 마음으로 우리는 11월 22일 다시 만났다. 워크숍의 제목은 “우린 왜 미끄러지는 걸까” 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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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숍은 모둠 토론으로 진행되었다. 토론을 이끌어줄 열쇳말이 주어졌다. 열쇳말들은 ‘미끄러진 경험’과 연결되었다. 예컨대 ‘피해자중심주의’와 ‘조력자의 역할’, ‘2차가해’나 ‘비밀주의원칙’과 같이 모두가 익숙하지만 또한 잘못 사용하기 쉬운 개념어들이 등장했다.

 

참여자들은 성폭력 사건 초기 과정에서 주로 피해자의 호소를 제일 처음 듣고 조력하는 사람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참가자 중 일부는 피해자의 호소를 공동체에 어떻게 들리게 할 것인가에 대한 부담과 피해자가 원하는 바를 관철시켜야 한다는 책임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경험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자연스레 조력자를 위한 공동체의 노력에 주목하게 되었는데, 조력자가 공동체 안에서 고립되지 않도록 공동체 내 관계망을 구축하고, 적절한 시기에 심리 상담과 같은 지원을 배치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의견이 제시되었다.

 

한편 조직 구성원 누구나 문제해결의 ‘첫 사람’이 될 수 있기에 공동체의 일상적 노력이 중요하다는 점이 공감을 얻었다. 참여자들은 성폭력 사건이 언제나 상황과 맥락 의존적이기 때문에 사건을 ‘매뉴얼화’하여 기계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인지적 토대 위에 서 있었다. 참여자들은 한 발짝 나아가 조직의 일상적 노력의 목표는 공동체가 성폭력 문제에 더 좋은 판단력을 가지고 비슷한 수준의 감수성을 가질 수 있는 기획이어야 한다는데 의견을 함께 했다. 그 기획의 일환으로 성폭력 사건 해결 과정에서 ‘미끄러졌던’ 경험을 ‘더 이상 말하지 않기’보다 ‘더 많이 이야기’하며 공동의 기억을 만드는 일이 제시되었다. 사회를 맡은 성적권리와 재생산 정의를 위한 센터 Share 의 나영은 첫 사람이나 대리인과 달리 조직에서 사건을 조사하는 사람일 때는 피해자의 말을 정확히 듣는 것을 너머 사건의 주변의 맥락에 대해 적절하게 질문하고 피해자에게 다시 문제의식을 끄집어내는 역할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른바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해서는 피해자의 요구를 수용할지 여부라기보다, 피해자를 문제해결 과정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관계 맺을 것인가의 문제와도 연결된다는 점이 짚어졌다. 공동체는 피해자가 ‘과도하게 자기 요구만 하는 문제적 인물’ 혹은 ‘폭력 앞에 무기력한 사람’이 아닌 ‘문제 해결과정의 협상 주체이자 변화하는 주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토론되었다. 피해자에게 사건 해결의 시작과 끝을 맡기기보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문제를 해석하고 문제해결과정에서 조직이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피해자와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스레 피해자의 요구만이 문제해결의 중심에 있지 않고 공동체가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견지하고 피해의 공동체적인 의미를 해석해나갈 때 ‘사건에 대해 말하기’는 2차가해가 될 수 없다는 사실도 확인하였다. 관찰자나 지지자의 자리에서 폭력적인 말하기가 아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해당 사건에 대한 ‘더 많은 말하기’는 피해자의 입지를 좁히는 결과를 낳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워크숍은 사건 해결 과정 그 이후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사건 해결은 궁극적으로 피해자의 정의를 세우고 피해자의 일상을 회복시킨다는 점에서 가해자에 대한 징계 및 교육과도 연결된다. 가해자가 사건 해결 절차를 회피하지 않고 사건을 대면하고 궁극적으로 진정성 있게 반성하게 하는 것은 피해자 지원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대개의 경우 징계 절차가 형식화되어, 가해자가 자기 생각과 행동을 돌아보는 기회를 삼기보다는 그저 ‘해 내야 하는 절차’로 이해하는 측면이 있다는 문제도 제기되었다. 토론 중 가해자의 변화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는데, 가해자만 변해서는 성폭력이 일어난 조직의 성폭력 문화를 바꾸지 못한다는 점에서 사건해결은 반드시 조직의 변화와도 연결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성폭력 사건은 대개 평소 조직이 관계를 맺는 방식이나, 친밀성을 드러내는 언행, 업무에 대한 평가 기준, 뒷풀이 문화, 시간과 공간을 운영하는 방식 등이 총체적으로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제 해결 이후 공동체에 남겨진 숙제는 조직의 변화를 측정할 수 있도록 이야기 나누는 것, 이를 위해 단순히 가해자/피해자만의 사건이 아닌 우리와 연결된 누군가에게 생긴 일에 대한 공동의 기억을 만드는 과정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 확인됐다. 이때 피해자의 복귀가 성폭력 사건의 성공적인 해결의 지표가 되기보다는 피해자가 더 다양한 선택의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 복귀한 가해자가 과오를 끊임없이 대면하면서도 자기 자리를 찾도록 하는 것이 ‘변화한’ 조직의 할 일이자 키워져야 할 역량이라는 점도 짚어졌다.

 

워크숍의 끄트머리에서 사회자는 성폭력에 대한 운동 사회 구성원들의 고민들이 한 해 한 해 점점 더 구체화되고 변화하고 있다는 점을 느낀다고 말했다. 작년 간담회에 참가했던 한 참가자도 ‘이런 안전하게 말하는 자리’가 너무 필요했다고 소감을 나눠주었다.

 

워크숍의 제목이 “우린 왜 미끄러지는 걸까?”였지만, 더 잘 미끄러지는 것이 아니라 더 안 미끄러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지는 시간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미끄러졌던 경험들을 잘 정리해 쌓고 공유해나가자는 약속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