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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엄혜진의 인권이야기

말레이시아의 반인권적 국보법


지난 99년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서 열린 APEC 반대 민중회의 마지막날, 세계에서 제일 높다는 페트로나스 트윈빌딩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시위현장에 도착해서, 자못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주욱 늘어서 있는 경찰차 안에, 아마도 시위 참가자를 잡도록 훈련되어있을 경찰견때문이었다. 아니, 시위 때 개를 푼단 말이야! 하고 소리를 질렀더니, 옆에 있는 한 활동가가 그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웃으면서, 장장 2년씩이나 재판도 없이 구속수사할 수 있는 말레이시아의 저 악명 높은 국내보안법(Internal Security Law)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집회는 무사히 끝났지만, 국제연대운동의 일환으로 아시아지역 내 국가보안법 반대 연대망구축이 시급히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얼마전 당시 집회에서 사회를 맡았던 티안 츄아를 비롯한 10명의 말레이시아 활동가들이 지난 4월 말 ISA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들의 구속행진은 마하티르의 정적으로 숙청당하면서, 동성애혐의로 9년형을 선고받은 안와르 전 부총리에 대한 유죄판결 2주년 기념집회로 인해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 말레이시아 야당은 물론 “Reformaci” 즉, 개혁운동 세력은 정치적 음모로 규정하고 정권반대 운동의 일환으로 그의 석방운동을 전개하고 있어, 이번 구속은 개혁세력에 대한 정치적 탄압이라는 것이 현지 활동가들의 견해다.

말레이시아는 소위 “국가안보이데올로기”를 통해 정권을 유지하는 기제인 국가보안법 체제가 ISA 이외에도 다른 많은 보조 악법들과 함께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예컨데, 학자 및 학생의 단체가입과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대학법이라든가 치안법(한국의 집시법), 공무기밀법, 심지어 마약단속법까지도 정치적 반대세력을 탄압하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약간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한국을 포함한 다른 아시아 지역에서도 대동소이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식민지 종주국이 경제적․정치적 이권을 챙기기 위해 활용했던 국가보안법을, 독립 후 들어선 독재․엘리트정권이 그대로 차용하면서 극심한 인권탄압을 자행했다. 냉전이 종식된, 소위 지금의 세계화시대에도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독점재벌과 독재정권의 주요한 무기다. 냉전시기에는 공산주의자(혹은 중국의 경우는 반공주의자)가 적이었다면 이제는 “세계화시대 경제성장을 가로막고, 자유시장의 룰을 어기는” 노동자들과 민주세력 모두 이 안보이데올로기의 그물망에 걸리고 있는 것이다. 마하티르 또한 경제위기와 부정축재에 대한 저항을 잠재우기 위해 국가보안법이라는 벼린 칼날을 들이세우고 있는 것은 자명하다.

인권영화제가 열리는 이번 주말, PICIS는 이들 양심수 10명 석방․ISA 철폐를 요구하는 서명을 받을 예정인데, 극심한 고문에 시달리고 있다는 10명의 말레이시아 활동가들에게 많은 지지와 연대를 표명해 주기를 기대한다.

엄혜진(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 PICIS,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 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