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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인 인터뷰

건설현장에서도 감옥에서도 타고난 ‘조직가’

최명숙 님을 만났어요

영원한 건설노동자 양회동 열사를 떠올리는 5월입니다. 윤석열 정부의 ‘건폭몰이’ 탄압으로 구속됐던 건설노조 경인지역본부 사무국장 최명숙 님을 후원인 인터뷰로 만났습니다. 2023년 2월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 가서 사랑방 30주년 신문을 나누며 사랑방과 기꺼이 엮일 후원인을 구한다는 선전 부스를 운영했는데요, 명숙 님이 기꺼이 후원신청서를 써주고 가신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후 접한 구속 소식에 마음이 무거웠는데요, 2년이 지난 지금 명숙 님의 안부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20대 시절부터 명숙 님의 지난 40년 그리고 오늘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인터뷰였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또 묵직하게 들은 명숙 님의 활동, 기억, 꿈을 나눕니다.

 

자기소개를 부탁드려요.

건설노조 경인지역본부 사무국장 최명숙입니다. 노동당 당원이고요.

 

재판은 다 끝난 건가요?

네. 1심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는데 9개월 구속되어 있다가 2심 진행 중에 나왔어요. 대법원 상고했는데 안 받아들여져서 확정됐고요. 누구는 아예 1년 채워서 털고 나오지 그랬냐 하더라고요. (웃음) 예전에 집행유예 받은 것 때문에 투표를 한동안 못했거든요. 끝날 만하면 이어지고 끝날 만하면 이어지고 그래서 한 10년쯤 투표 못했는데, 이번엔 어떨지 모르겠네요.

 

건설노조 구속된 분들 통해서 감옥인권 문제를 접하기도 했었는데요.

네. 천주교인권위원회와 과밀 수용 문제로 국가배상 집단소송을 진행하고 있어요. 1인당 면적 기준이 있어요. 원래 정원이 5명인데, 실제로는 10명, 11명씩 있는 거예요. 남성들도 그렇지만 여성은 방 개수가 훨씬 적으니까 구속자가 생기면 그냥 막 집어넣는 거죠. 그래서 진짜 너무 힘들었어요. 소송은 스무 명 정도 같이 하고 있는데 건설노조에서는 구속자 중 반밖에 안 했어요. 뭔가 다시 얽히는 게 싫기도 하고 재판 나가는 것도 꺼림칙해서인지…. 그래도 소식 접하고 제주에서도 연락 오고 여기저기서 연락이 왔는데, 내가 대표 원고이고 법정도 나갈 거니까 같이 하자고 해서 17명이 같이 소송을 하게 됐어요. 저랑 같이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 3명도 조직했어요. 사기로 들어온 분들이었는데 빵동지들 너네도 하라고 연락했죠. 이거 민주노총에서 같이 하는 거니까 손해날 건 없을 거라고. (웃음)

 

양회동 열사 소식을 구속되어 들으셨다고 들었어요.

4월 25일 유치장 들어가서 5월 3일 구치소로 넘어갔거든요. 유치장은 하루 3번 면회가 돼요. 5월 1일 양회동 열사가 분신한 것을 면회 온 동지들이 말해줬어요. 보통 때도 유치장에서 잠이 잘 안 오는데, 그날 밤은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11시에 종이랑 펜 달라고 해서 동지들에게 편지를 썼어요.

양회동 열사는 또 다르게 다가오더라고요. 내가 지금 여기 들어와 있는 것과 같은 이유 때문에 이 동지가 죽었구나 생각하니까. 저는 활동을 오래 했지만 동지는 이제 한 3, 4년밖에 안됐는데, 들어보니 노조하면서 굉장히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건설 일을 할 수도 있구나, 직접고용도 하고 임금도 올리고 노조 활동하면서 건설 현장을 바꿔가는 것이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는데 이걸 공갈 협박범이라고 하니….
양회동 열사 묘역은 1주기 때 갔어요. 나오자마자 갈 수 있는 형편이 안 되어서… 그 날 열사가 활동했던 강원본부 동지들에게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굉장히 순수한 사람으로 노조 활동하면서 너무 좋아했다고 들었어요. 근데 하루아침에 그걸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상황이 되고, 공갈 협박범으로 영장실질심사를 받게 되니… 그래서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윤석열 파면시키고 나서 얼마 전 2주기를 맞았어요. 열사에게 승리해서 왔다고 이야기하는데, 전 별로 승리했다는 느낌은 안 들더라고요. 건설 현장은 여전히 힘든데 노조가 열심히 싸우면서 재도약하면 열사가 좋아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갈 길은 아직 먼 것 같아요.

 

건설노조 활동은 어떻게 하게 되신 거예요? 언제 어떻게 노조를 만나게 되신 건지 궁금해요.

85년에 고등학교 졸업해서 자잘하게 이것저것 하다가 87년부터 부천에 있던 반도스포츠라는 레저용품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거든요. 거기에 소위 위장취업 했던 이들이 있었는데, 어디 좀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갔던 게 88년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했던 제1회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 전국노동자대회였어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을 처음 보았고, 여의도까지 행진했는데 엄청 뜨거워졌죠. 그게 계기였어요. 회사에서 만든 유령노조가 있었는데 민주노조 싸움하면서 89년에 해고됐어요.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 90년에 출범했잖아요. 해고 싸움하면서 부노협(부천노동자협의회) 사람들 알게 되고, 해고노동자회 만들어 지역에서 같이 활동하며 본격적으로 운동을 하게 됐죠. 복직은 안됐고 회사에서 알량한 돈 주겠다는데 자존심 상해 안 받았어요. 그 이후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부천에서 더 일할 수 없었고 결혼하면서 인천으로 넘어오게 됐어요. 95년에 남동공단에 있는 아남 인스트루먼트라는 충전기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게 됐는데 민주노조였거든요. 중국으로 공장을 옮기면서 2003년 폐업할 때까지 거기서 일하면서 금속노조 활동을 했어요.

공장 없어지고 좀 쉬고 있을 때였어요. 2005년 덤프연대가 만들어졌거든요. 화물연대 사무실을 같이 쓰고 있었는데, 화물연대 지부장이 그때 쉬고 있던 저에게 덤프연대 파업을 도와주면 좋겠다고 했어요. 처음 투쟁하는 사람들인데 같은 지역이니 여기 와서 파업투쟁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호랑 노래 이런 것 좀 가르쳐주라고요. 잠깐 도와주러 간 건데 그냥 눌러앉게 된 거에요. (웃음) 덤프연대가 5월에 처음 파업해서 그 해에만 3번 파업을 했어요. 도로법 때문에 과적으로 단속되어 10범, 12범 이런 사람이 수두룩한 거예요. 과적 책임을 우리에게 묻는데, 많이 싣는 건 우리랑 무관하거든요. 덤프는 한 번 갔다 오는데 얼마 이렇게 탕수로 치거든요. 그리고 많이 실으면 차만 망가져. 그런데도 실은 사람은 아무 책임도 안지고 어쩔 수 없이 실어준 우리만 다 범죄자가 되는 거예요. 그게 한이었어요. 그래서 도로법 바꾸는데 5월, 10월, 12월 3번을 파업했고 12월에 결국 법이 통과됐죠. 12월 5일 날짜도 잊혀지지 않아요. 물대포 맞아서 온몸에 고드름이 열리는데도 아무 상관이 없었어요. 국회에서 통과됐다는 얘기 듣고 다들 춤추고 난리가 났어요. 해방구가 됐죠. 그렇게 덤프연대에 있다가 직종과 업종을 묶는 단일노조로 2007년 전국건설노동조합이 되고 쭉 같이 온 거에요. 덤프연대 사람들 보면 그때의 승리로 지금까지 온 거 같거든요. 저도 부천에서 활동한 걸 가지고 평생 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 지역에서 활동하며 투쟁하는 현장들 안 가본 데가 없어요. 여기저기 다 다니면서 학습도 많이 했거든요. 그때 보고 배웠던 것이 자양분이 되어 지금껏 오게 한 것 같아요.

 

구치소에서 명숙 님이 노동당 당원 동지들에게 쓴 편지를 보기도 했었어요.

2001년 노동자의힘부터 정치활동을 시작했어요. 그 이후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 사회변혁노동자당, 지금 노동당까지 쭉 같이 온 거예요. 예전에 학습하면서 노조만으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기에 정치활동을 함께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노조가 많은 것들을 바꿀 수 있지만 근본적인 변혁을 하려면 정치활동을 해야 한다는 걸 그때 공부하면서 배웠고, 그 뒤로 쭉 해왔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막 열심히 하거나 그러지는 않아도 항상 적을 두어왔고, 그게 저를 세우고 있는 힘인 것 같아요. 노조에서 정치적 신념이나 이런 이야기들을 같이 나누는 게 쉽지는 않아요. 그래도 세상을 바꾸는 통로 역할을 노조가 한다고 생각하고 노조 활동을 허투루 하지는 않았어요. 올바르게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어떤 게 옳은 건지 안내해 주고 함께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노조 활동을 열심히 충실히 했어요.

 

올바르게 노조 활동을 하는 것을 강조하셨는데 그건 어떤 걸까요?

조합원을 놓고 가지 않는다. 어느 순간 노조 활동하다 보면 조합원을 대상화시켜요. 조합원을 주체로 세우지 않고 간부인 나만 막 열심히 하는데, 조합원과 함께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잖아요. 노조 활동도 성과 중심이거든요. 물론 성과를 내기도 해야죠. 건설에서는 노조가 일자리를 잡아주는 게 엄청 중요해요. 너무 절박하니까 그렇기도 하지만. 근데 구조적으로 원청을 움직여야 해요. 제가 빵에 간 이유기도 하지만 모든 교섭을 본부가 함께 했어요. 원청 만나고 하청 만나고. 현장에서는 아무래도 ‘내가 저기서 일해야 하는데 회사 측을 기분 나쁘게 하면 안돼’ 약간 그런 게 있거든요. 그런데 저는 건설사한테 이해관계가 하나도 안 걸려있는 사람이니까 이것저것 눈치 볼 것 없이 굉장히 원칙적인 얘기를 하는 거죠. 그래서 신뢰를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얼마 전 2~3년 만에 현장 앞에 같이 모여서 집회를 했어요. 조합원들이 탄압 이후에 너무 움츠러든 거예요. 너무 저가입찰하면서 현장 상황이 정말 안 좋거든요. 건설사들이 볼멘소리를 하는데 우리한테 책임을 떠넘기면 안 되잖아요. 오랜만에 하는 집회, 그것도 퇴근시간 맞춰하는 집회다 보니 어떨까 했는데 300명 정도가 모인 거예요. 한 달에 한 번씩은 하자 이러면서 자신감이 좀 붙었던 것 같아요. 정당한 요구이니 당당하게 집회하고 투쟁을 겁내지 않고 했으면 좋겠어요.

 

노조활동 35년차, 정치활동 20년차인 올해 정년이라고 하셨는데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해요.

노조는 정년퇴직해도 내 삶의 뭐랄까 신념이기도 하고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고 싶다는 기반이기도 하고. 사회 변혁을 위해 계속 활동해야죠. 안 그러면 내가 뭘로 살아갈 수 있을지, 저에게 삶의 지표 같은 게 사라질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힘든 적은 있어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어요. 그간 활동해온 과정이 저를 계속 그렇게 안내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본부는 정년이지만 지역은 정년 기준이 다르거든요. 그래서 할 수 있으면 5년 정도는 더 건설 활동을 하고 싶어요. 다른 직종을 조직하는 사업이요. 본부는 5개 지부를 아울러서 무언가 함께 하는 것들을 만드는 역할이었다면, 지부 안에는 목수뿐만 아니라 철근, 시스템, 해체 등등 여러 가지 직종이 있거든요. 아직 없는 직종도 있고, 미약한 직종도 있고 그래서 직종 조직 사업 이런 것을 더 하고 싶어요. 저는 그게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조직 활동하면서 에너지를 더 얻었던 것 같고요.

 

타고난 조직가 명숙 님의 이야기 잘 들었어요. 사랑방도 대중의 힘을 변혁적으로 조직해보자는 포부로 활동하고 있는데 사랑방 활동가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적은 활동비로 자기가 지향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 동지들이 존경스럽고 자랑스럽고 고생하고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요. 그리고 인권이라는 영역이 굉장히 넓잖아요. 노조가 못하는 다양한 영역의 활동들을 하고 있는 동지들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노조는 명확한 자기 목표가 있지만, 그뿐 아니라 더 넓을 것들을 포용하는 활동을 사랑방 같은 운동단체들이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 사회가 갈수록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권리가 축소되고 무시되고 주변화 되는데, 그런 이야기를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해주고 있는 동지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막 달려가지 못하는 장소들에, 목소리 내야 하는 곳들에 동지들이 항상 있어요. 인권의 자리를 지키는 동지들 기운내서 열심히 하면 좋겠고 저희도 열심히 따라가 함께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