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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이야기

세대? 계급? 젠더?

계급이냐, 세대냐, 젠더냐, 이런 토론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2013년 운동전략을 토론할 때 충분히 살펴보지 못했던, 2008년 이후 한국사회의 변화를 짚어보려던 계획이었다. 토론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세대에서 출발해 젠더와 계급에 대한 분석의 필요성이 드러났다. 운동전략워크숍을 할 즈음 ‘조국 사태’를 두고 많은 말들이 쏟아져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10년, 새로운 현상

2008~2018년은 민주정부의 성과를 부정하는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수립된 시기이자, 대중의 힘으로 다시 그것을 부정한 정치적 격변의 시기다. 미국발 금융위기와 함께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파산선고가 내려지는 한편, 신인종주의와 만난 극우 포퓰리즘이 확산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와 비교하면 박근혜 퇴진 촛불과 문재인의 대통령 당선은 한국사회가 그나마 나은 경로를 밟고 있다고 안도할 근거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87-97 체제의 위기, 즉 정치적 민주화와 함께 신자유주의가 전면화되면서 고용불안, 청년실업, 가계부채 등의 문제가 심각해지고 불평등이 심화되지만 다른 체제에 대한 전망은 뚜렷하지 않은 조건은 문재인 정부에서도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기존 정치의 문법이나 구도에는 딱 들어맞지 않는 목소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페미니즘 리부트’나 ‘20대 남자 현상’이라 불리는 흐름이 그것이다.

이런 흐름은 주로 ‘페미니즘’을 중심으로 분석되었다. ‘여성혐오’를 저항의 표적으로 삼은 새로운 여성 세대의 등장이나 반-페미니즘으로 스스로를 조직하며 여성혐오를 일상화한 남성 세대의 등장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페미니즘 또는 반-페미니즘이 20대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평창올림픽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이나 난민을 둘러싼 작년의 논란에서 20대의 반대 여론이 높았던 것은 이들이 처한 사회경제적 조건을 살피지 않고 설명하기 어렵다.

 

생존의 실천

사실 20대 ‘남자’에 대해서는 이들이 처한 사회경제적 조건을 짚어주려는 노력이 늘 있어왔다. 출구 없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타자/소수자에게 적대를 표출하며 형성하는 정동으로서 ‘혐오’가 분석될 때에도 그랬다. 불만 있는 청년-남성은 여성을 혐오하고, 여성-청년은 여성혐오에 대항하는 존재로만 표상되었다. 청년노동자의 얼굴은 여성이 아니었고, 혐오하는 청년-여성의 등장에 사회는 당황했다.

그러나 ‘페미니즘 리부트’ 역시 사회경제적 조건을 배경으로 한다. 87년 체제가 수립되면서 젠더지형이 변화하고 여성 노동력을 ‘자유롭게’ 만들었으나 이미 신자유주의적 구조 변환에 접어든 한국사회는 여성을 체제로 포섭할 능력이 없었다. ‘페미니즘 리부트’가 기존 여성운동의 흐름과 단절의 양상을 보였다면 그것은 여성정책과 의제를 제도화하며 변화를 만들어온 여성운동과의 단절이 아니라, 제도화할 수 있을 만큼의 조건을 누렸던 세대와의 단절일 것이다. 이들은 민주주의의 ‘남성성’에도 균열을 냈지만 앞선 세대의 ‘민주주의’에도 균열을 냈다.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보이는 페미니즘 리부트와 반-페미니즘 모두 지금의 청년 세대가 시도하는 생존의 실천으로 봐야 한다. (생존의 실천이 강요되는 물질적 구조의 변화를 더 살펴야 출구를 찾을 수 있을 텐데 이건 두번째 워크숍에서 토론할 예정이다.) 이때 페미니즘은 다시 중요하다. 생존의 실천이 남성 대 여성의 대립 구도로 드러나는 것은 87년 체제가 페미니즘을 ‘여성발전’의 문제로 대체해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여성이 정규직이 되기 어려운 구조에 맞서려면, 일의 세계에서 성차별을 철폐하는 운동만큼 노동 착취를 위해 비정규직-책임 없는 고용-을 만들어내는 자본에 맞서는 운동이 필요하다. 지금 한국사회에 주어진 과제는 여성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도록 개선하는 것에 그칠 수 없다. 불평등이 정당화되지 않는 체제의 재구성이 과제이며 이것은 ‘더 페미니즘’ 하는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더이상 특정한 세대의 문제가 아니다.

 

세대가 아니라

‘조국 사태’를 거치는 동안 ‘세대’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586 세대’로 불리는 이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젊음을 바쳤지만 거둘 것이 많은 세대였다. 87년 전후는 한국사회가 호황을 누린 얼마 안되는 시기였다. 정규직 일자리도 많았고 노동조합 조직률이 비약적으로 증가하면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울 수도 있었던 세대다. 이들은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지탱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이나 문화도 누릴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체제를 가져본 세대이기도 하다. 이들과 비교할 때 지금의 ‘청년’은 정치를 조직할 자원도 없고 이들을 조직하는 정치도 없는 상태에서 포퓰리즘의 가능성으로 부유하고 있다.

어느 사회나 ‘세대’로 드러나는 현상은 있기 마련이다. 세대에 따라 공유하는 정치적 경험이 달라지고, 같은 경험도 어떤 생애주기에서 겪는지에 따라 사회를 바라보거나 변화에 대응하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세대를 통해 드러나는 현상이 실제 인구구성에서의 세대를 대표하지는 않는다. ‘586’은 공단에서 파견을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50대 여성 노동자를 대표하지 않는다. 그들은 50대가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를 대표하는 것에 가깝다. 자신이 자신을 파견 보내고 관리해야 하는 지경이 된 20대 노동자를 대표하지 못할 것은 너무나 빤하다.

서울시가 만든 50플러스재단에서 50 이후의 삶을 준비하라는 메시지의 핵심은 다시 교육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불안정한 삶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노동시장에 적합한 '능력'을 갖추는 것으로 제시된다. 많은 청년들이 ‘인턴쉽’이나 ‘현장실습’이라는 이름의 노동착취를 강요당하는 것과 얼마나 다를까. 이건 ‘윗세대’의 성찰과 미안함, 다양한 '청년' 정책들로 해소될 수 없는 문제다. ‘청년’을 통해 드러나는 문제를 청년기의 사람들이 겪는 세대적 문제가 아니라, 청년기의 사람들을 통해 드러나는 보편적 문제로 바라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남겨진 과제

87-97체제의 위기가 불을 지핀 박근혜 퇴진 촛불은 세상을 얼마나 바꿔놓을까. 문재인 정부는 사회적 적대와 불안정성을 관리할 줄 아는 나라에 도전했지만 그 방식은 불안정한 사람들이 대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성소수자를 삭제하고 미조직 노동자들을 방치하면 나라는 나라다워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나라는 아니다. ‘세대’가 아니라는 진단이 ‘계급’ 분석을 대체할 수는 없으니 앞으로 차차 살펴야 할 것들이 많다.

화려했던 광장은 신기루처럼 사라졌지만 변화의 힘도 사라진 것은 아니다. 성폭력 고발과 함께 존엄을 선언하는 여성들이 만들어가는 미투운동, 발전소 하청노동자 김용균의 죽음을 애도하며 변화를 약속하는 거리의 정치 등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집단적 저항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브레이크를 거는 작은 움직임들도 있다. 이런 힘들이 어떻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힘들로 모일 수 있을까. 혐오는 손쉽고 평등은 어려운 때 우리는 누구와 함께 어디를 향해 싸워야 할까. 몇 번의 워크숍으로 답을 얻을 작정은 아니었으나, 답을 언제까지 미룰 수도 없는 때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