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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척이다] <반성폭력 규약>을 넘어 ‘성폭력 근절’로 가려면

성폭력 피해자의 고통, 여성들의 고통

사건의 경중을 떠나서, 성폭력 사건이 여성에게 고통 그 자체임은 말할 것도 없다. 피해자의 고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폭력 사건을 인지한 후 피해자의 심신을 위로하고 치유를 지지하고자 노력하는 여성들 역시 고통스럽긴 매한가지다. 그녀들은 성폭력 사건에 대해 언제나 일차적인 판단의 당사자일 뿐만이 아니라, 피해자의 고통을 공감하기 위해 자신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일정한 ‘상처들’을 끄집어내야 하기도 한다. 또한 발생한 성폭력 사건의 해결과정은 여성 활동가 및 피해자 대책위에 결합했던 사람들에게 일종의 운동적인 ‘성취감’조차 가져다주지 못할 때가 많다. 오히려 대책위의 결정사항을 가해자가 전혀 이행하지 않거나, 법적인 근거를 왈가왈부하며 성폭력 사건의 성립 여부조차 납득시키기 어려운 상황이 종종 벌어진다. 유사한 사건은 재발되기 쉽고, 또다시 사건이 발생했을 경우 성폭력 문제의 ‘전담책임부서’로서 여성 활동가들의 역할은 또 변화하지 않는다.

운동사회 내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평가

얼마 안되는 활동의 경력 속에서 여성인 나에게 성폭력 사건은 늘 이런 부담과 압박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 성폭력 사건 해결을 둘러싸고 나타나는 여성 활동가들의 이러한 고통은 단 한 번도 감축되거나 근본적으로 해결된 적이 없다. 심지어 1990년대 중후반 이후, ‘반성폭력 운동’의 물결이 대학사회와 운동사회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이제 거의 모든 단체나 조직마다 <반성폭력 규약>이 명백한 제도로서 존재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오히려 제도화된 반성폭력 규약이 여성의 고유한 권리들을 개발하고 공동체의 윤리로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들로 하여금 “규약만 어기지 않으면 된다”는 협소한 자기검열에 활용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현실에서 성폭력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고, 그 경중을 따져보아도 10년 전과 하등 달라진 것이 없다.

시야를 좀 더 넓혀보아도 마찬가지다. 제도법 상 성폭력 특별법이 재개정되면서 성폭력 개념이 확장되고 가해자 처벌이 강화되었다 해도 잔혹한 성폭력이 세상에 출현하는 빈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고 있다. 이러한 현상과 유사하게 운동사회 내 반성폭력 규약 제정 과정의 보편화 역시 운동사회 내 성폭력을 근본적으로 근절해내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반성폭력 운동이 명백히 여성억압적인 사회구조를 변화시키고자하는 하나의 ‘운동’이라면 왜 운동의 성과는 전혀 축적되지 않고 있는 것일까? 여성들의 자기해방을 위해 스스로의 아픔을 감수하면서 만들어냈던 절박한 몸부림. 그 반성폭력 운동은 왜 해가 갈수록 여성 활동가들에게 도리어 부담만을 안겨주는 것일까? 법과 규율이 여성의 편일까?

문제는 성폭력이라는 것이 남성 개개인의 폭력성 혹은 비도덕성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성폭력 자체가 매우 사회구조적인 문제 그 자체이기 때문이 아닐까? 가족, 결혼, 출산과 양육이라는 우리 삶의 기본적인 구조적 여건들은 여성억압적인 속성과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여성들 개개인이 이러한 구조에 존재하는 한 기존의 질서가 가지고 있는 속성, 즉 여성을 배제하고 착취하고 억압하는 구조적 폭력이란 여성의 일상 그 자체일 것이다. 성폭력 사건은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 끊임없이 발생한다.

그러하기에 여성들은 성폭력을 근절하기 위한 엄격한 규율로서 법과 제도를 필요로 했다. 여성운동과 대학사회에서의 반성폭력 운동은 성폭력 특별법을 제정하고 학칙을 개정하면서 성폭력 정의의 확장과 가해자에 대한 엄격한 처벌기준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운동사회 내 성폭력 뿌리 뽑기 100인위원회>의 문제제기와 활동은 사회운동 전반에 페미니즘에 대한 성찰과 각성을 촉구하는 절박한 몸짓이었다.

법과 규율을 통한 성폭력 근절은 근본적으로 불가능

그러나 법과 규율을 통한 성폭력의 근절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다. 법과 제도적 규율이 누구나 납득하며 따를 수 있는 ‘보편성’을 담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법과 제도적 규율에는 여성을 억압하는 구조적 폭력을 바꾸어낼 수 있는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반성폭력 규약은 이미 발생한 사건에 대해 피해자 혹은 여성의 시각을 투영하고 있는 것일 뿐, 사회 구조적인 억압에 대한 여성들의 권리를 명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발생하는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정한 규율이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지만, 현재의 반성폭력 운동의 자장은 성폭력 문제 해결에 유일한 지표로서 단체의 규율에 의거해 처벌과 조치를 취하는 것에 머물고 있다. 성폭력의 가해자가 그 단체 및 공동체에서 퇴출되는 것, 그리고 가해자를 피해자로부터 격리시키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가해자가 규율에 따른 처벌조차 제대로 이행하려 하지 않을 경우(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으나, 거의 대부분의 성폭력 사건은 이런 식의 문제에 늘 직면한다), 대책위 및 공동체는 가해자에 대한 더 높은 강도의 처벌을 시도한다. 그것은 때때로 공동체의 규율을 넘어서 제도적인 사법처리에 의존하기도 한다.

그러나 운동사회 내 규율이 담지하고 있지 못한 문제가 제도적인 법체계의 문제로 풀릴 리 만무하다. 운동의 원칙과 지향 속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성폭력 문제는 제도적 법체계 속에서는 ‘성폭력 사건’으로조차 인식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성 억압적이며 가부장적인 사회의 구조가 만들어 낸 법과 제도적 규율은 다소 돌출적으로 터져 나오는(그러나 사건은 늘 구조적인 모순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사건들을 처리하기만 할 뿐, 피해자가 구체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면 여성의 권리와 관련된 그 어떤 문제제기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반성폭력 규약은 늘 언제나 ‘사건의 발생’과 ‘피해자’를 필요로 할 뿐이지 않는가.

법적인 권리와 구별되는 여성의 권리

우리는 매번 성폭력 사건들을 통해, 피해자의 상처와 고통이 결코 그녀 개인사적인 문제로부터 기인하고 있지 않음을 언제나 확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해결은 ‘가해자’, ‘피해자’의 대립구도 속에서 가해자에 대한 처벌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이러한 성폭력 해결의 일정한 ‘매뉴얼적’ 방식들은 여성의 해방을 위한 일차적인 전제 조건으로서 ‘성폭력 근절’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될 뿐, 성별화된 여성의 권리를 창출하기 위한 공동체 전체의 성찰과 노력으로는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극단적이며 잔혹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은 일상이라고 해서 여성에 대한 폭력과 억압이 없는 것이 아니다. 나는 솔직히, 발생한 성폭력 사건에 대한 해결방식이 미봉적인 실용적 수단으로서의 법과 규율에 의존하고 있다고까지 생각한다. 물론 그조차도 미달하는 현실에서의 성폭력 사건 해결방식에 숨이 턱 막히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조심스럽지만, ‘성폭력 사건 해결’에 누락되어있는 여성의 권리에 대한 심도 깊은 토론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여성의 권리는 규율과 법제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규율과 법제도에 존재하지 않는 여성의 권리가 새롭게 창안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규약의 적용과 처벌에 국한되지 않는 공동체 윤리로서의 ‘여성의 권리’가 만들어지는 그 때까지 우리는 성폭력 문제 해결을 둘러싼 고단하면서도 지난한 토론을 계속해 나가야 할 것 같다.
덧붙임

이소형 님은 사회진보연대에서 활동하는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