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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탈북민에게 필요한 건 보호가 아닌 권리

탈북 모자의 죽음 너머를 보다

두 달 전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 탈북 모자의 죽음이 전해졌다. 복지 사각지대의 문제가 다시 제기되고, 탈북민에 대한 지원정책 점검도 요구되고 있다. 정부와 국회는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 개선에 나서겠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건을 제도와 정책의 문제로만 말할 수 있을까. 이들이 어떻게 살았고 죽음에 이르게 됐는지, 그 죽음을 아무도 몰랐다는 사실에서 더 들여다봐야 하는 이야기들이 있는 것 같다. 탈북민이 3만 명을 넘어서는 지금, 한국사회에서 탈북민은 어떤 삶을 살고 있고, 한국사회는 탈북민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말이다.  

탈북민이 처음 만나는 남한, 합동신문센터와 하나원  

'자유'를 품고 왔지만 탈북민의 첫 시작은 자유와는 거리가 멀다. 모든 탈북민이 남한에서 가장 먼저 경험하는 것은 기약 없는 구금 상태로 간첩 아님을 증명하는 시간이다. "여기 오기 전으로 되돌아간다면 절대 오지 않았을 거예요." 국정원 합동신문센터(합신센터)에서의 시간을 떠올린 한 탈북민의 말이다. 이곳에서 길면 6개월까지 탈북민은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상태로 조사를 받으며 정착 여부가 결정된다. 조사에서 탈북민은 자신이 북한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고 왜 왔는지 수차례에 걸쳐 적어내야 한다. 기록이 맞는지 틀리는지 끊임없는 질문을 받고 거짓말 탐지기도 사용된다.  

간첩인지 아닌지를 가려낸다는 조사에서 사실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기도 하다. 간첩 검거라는 공로가 필요하면 간첩은 만들면 되기 때문이다. 유우성 씨 간첩조작사건처럼 국정원은 폭언과 폭력, 협박과 회유로 탈북민을 간첩으로 만들어왔다. 이곳에서 탈북민은 '언제든 간첩이 될 수 있다'는 공포와 간첩이 되지 않으려면 순응해야 한다는 것을 체득한다. 간첩조작사건으로 비난이 일자 합신센터를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로 바꾸었다지만, 명칭 외에 탈북민이 남한을 처음 만나는 시간이 어떻게 바뀌었을지는 의문이다. 

정착이 결정된 탈북민은 하나원에 입소하여 12주 동안 합숙교육을 받게 된다. '사회적응'을 위한 교육과정은 직업훈련과 한국사회 이해를 중심으로 하며, 심리상담과 지원제도에 대한 교육이 함께 이루어진다. 교육 목표는 '대한민국의 국민 되기'이다. '세계 최악의 권위주의 독재 체제하에서 지내온' 탈북민이기에 갖추지 못한 역량을 습득하는 것처럼 소개한다. 최근엔 탈북민의 필요에 따른 교육방향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하나원의 교육 목표가 북한에서의 삶을 부정하면서 '대한민국 국민 되기'를 지향하는 한 큰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탈북민들은 합신센터에서 하나원까지 수개월 동안 고립된 채 '남한'을 처음 만난다. 이 시간은 국가가 규정하는 탈북민의 상에 대해 학습하고 길들여지는 시간이다. 하나원을 수료하면 주민등록증이 발급되는데, 비로소 한국사회에 살아갈 '자격'이 부여됐다는 벅찬 감정과 이걸 받기 위해 그토록 모진 시간을 겪었다는 회한이 뒤섞인다. 정말 간첩 아닌지, 얼마나 한국 사람다워졌는지 끊임없이 물었던 탈북민에 대한 적대와 의심은 이제 끝이 난 걸까? 탈북민이 만나는 진짜 한국사회는 자유의 땅일까? 

탈북, 생존 자원 또는 살기 위해 숨겨야 하는 것 

남한에서 다시 제3국으로 '탈남'한 탈북민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북도 남도 아닌>에서 감독은 말한다. 한국사회가 탈북민에게 듣고자 했던 건 언제나 북한에 관한 것일 뿐 남한에서 이들의 삶은 보지 않아왔다고 말이다.  

탈북민에 대한 호칭은 북한이탈주민, 새터민, 탈북이주민 등이 혼재되어 쓰이고, 과거 남한의 우월성을 보여준 영웅이라고 치켜세웠던 귀순자라는 말은 이제 잘 쓰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도 한국사회에서 탈북은 '적이었던 사람이 반항심을 버리고 스스로 돌아서서 복종하고 순종'한다는 의미인 '귀순'으로 여겨진다. 탈북은 악한 북한과 선한 남한을 보여주는 행위이며, 이에 대한 증언자로서만 탈북민은 유의미한 존재가 된다. 그래서 탈북민이 한국사회에서 드러나는 모습은 매우 전형적이다. '북한인권'이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되는 한국사회에서, 탈북민은 '북한 타도'를 외치는 보수정권의 친위 부대로 등장해왔다. 언론은 북한의 비인간성을 자극적으로 선전할 때만 탈북민의 이야기를 소비한다.  

'탈북' 경험을 생존 자원으로 삼는 탈북민의 전형에서 빗겨나 있는 수많은 탈북민은 어떻게 살아갈까? 이때 '탈북'은 감추고 숨겨야만 하는 것이 된다.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진행한 '북한이탈주민 인권의식 실태조사'에서 탈북민이 남한사회에서 겪는 차별 경험의 절반이 북한 출신에 따른 것으로 나타났다. 탈북민으로 첫 통일학 박사가 된 주승현 씨는 책 <조난자들>에서 '조선족이 2등 국민이라면 탈북자는 불가촉천민'이라고 말한다. 번번이 떨어졌던 취업 서류에서 탈북민임을 지웠을 때 비로소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탈북민 대부분이 겪는 경험이다. 북한 출신이 현실의 장벽이 되고, '서울 액센트'를 교육 받아도 어투를 숨기기 어려운 상황에서 많은 탈북민은 한국인이 아닌 조선족인 척한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탈북민이 살아가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안보강사가 되거나 보수정치세력과 교회에 동원되어 탈북이 체제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자원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아니면 탈북민이라는 것이 드러나지 않도록 철저히 숨기며 사는 것이다. 

고립으로 내몰리는 탈북민의 삶 

하지만 아무리 감추려 해도 탈북민이라는 꼬리표를 떼기 쉽지 않다. 한국사회에서 수년을 살더라도 신변보호라는 명목 하에 탈북민은 '잠재적 간첩'으로 취급되며 감시당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탈북민을 '위한' 정착지원 서비스인 것처럼 신변보호를 소개하지만, 신변보호가 오히려 정착을 방해한다는 문제가 계속 제기되어 왔다. 신변보호 담당 경찰로 인해 탈북민인 게 알려져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직장을 잃었다는 사례도 있다. 신변보호 제도는 탈북민의 '신변보호'가 아니라 탈북민을 감시하며 한국사회를 '보호'하겠다는 인권침해적 안보정책이다. 

탈북민이라는 게 알려지면 한국사회가 탈북민에게 부여한 역할이 일상에서 강요된다. 탈북민답다는 것은 북한사회에 대한 부정과 남한사회에 대한 긍정이어야 한다. 북한에서의 좋은 기억을 끄집어내면 '간첩인 것'처럼 경계하고, 남한에서의 어려움을 말하면 "고마워할 줄도 모르는데 그럼 북한으로 돌아가라"며 냉대한다. 이러한 시선 속에서 탈북민은 자신의 경험과 삶에 대해서 말할 수 없게 된다.  

지속적인 감시와 의심이 일상인 삶에서 탈북민이 안정적으로 사회적 관계를 맺기란 불가능하다. '잠재적 간첩'인 탈북민이 모이는 것은 불온하게 여겨지거나 '북한 타도'라는 보수정치에 이용되기 십상이다. 그렇다보니 탈북민의 자발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도 어렵다. 연고가 없는 한국사회에서 신변보호 담당 경찰을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관계인 것처럼 여기기도 한다는 것은 탈북민의 고립된 삶을 고스란히 말해준다. 이번 모자의 죽음에서 한국사회가 고립으로 내몰아온 탈북민의 현실을 보게 된다.  

탈북민 '보호'가 아닌 '권리'를 말하자 

그동안 탈북민에게는 북한에서의 삶을 부정하는 이야기만 요구되었다. 합동신문센터에서부터 살아가는 매 순간, 한국사회에서 탈북민이 살아남기 위한 방법은 자신이 살아온 시간과 정체성을 지우거나 왜곡하는 것이었다. 자기 자신을 이야기할 수 없고, 드러내서는 안 되는 사회에서 탈북민은 고립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살아왔던 시간, 맺어왔던 관계,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것을 모두 부정해야 하는 조건에서 누군가와 삶을 나누는 관계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이 탈북민 보호체계의 구멍을 보여줬다며 탈북민에 대한 '보호'가 강조되기도 한다. 하지만 보호는 이제껏 한국사회가 규정하고 옭아매 온 탈북민의 존재와 위치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탈북민이 이 사회를 함께 살아가는 동등한 주체라는 점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호'가 아니라 동등한 주체로서 탈북민의 '권리'가 이야기되어야 한다.  

동등한 권리의 주체로 탈북민이 등장할 때, 규정 지어진 탈북민이 아닌 다양한 탈북민의 존재와 이야기가 드러날 수 있다. 북한의 고향을 그리워하고 남한 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함께 살아가는 관계와 경험을 쌓아갈 때, 탈북민을 규정해 온 한국사회 구조와 관계의 문제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한국사회가 동원하고 소비해온 북한의 이야기가 아닌 북한 사람들의 일상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전하는 채널을 운영하고, 다양한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탈북민 네트워크가 이미 그런 변화들을 만들고 있다.  

많은 이들이 탈북 모자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했다. 이 애도는 한국사회의 변화를 요구하는 질문과 이야기로 이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