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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주의와 청소년인권] ‘나이주의 반대’에 대한 의문과 오해에 답하다

“나이 어린 사람에게 반말을 하는 것은 그냥 한국의 문화인데, 그런 정도 했다고 청소년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하는 건 너무하지 않나?”

청소년활동가들은 그동안 곳곳에서, 개인적으로 나이주의 문제를 지적하고 성찰을 촉구해 왔다. 그러나 나이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낯선 환경에서 청소년활동가들의 문제제기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저 ‘반말하지 않는 것’이나 ‘<아이들>이 아닌 <청소년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이주의 타파인 양 단편적으로 생각되기도 했고, 사소한 일을 가지고 나이주의 같은 거창한 말을 써가며 남을 ‘꼰대’로 몰아붙인다는 식의 반발을 마주하기도 했다. 가령 앞서 소개한 저 말은 실제로 최근 다른 시민사회단체 활동가에게 반말을 하지 말라고 요구했던 청소년활동가가 들었던 이야기이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선, 좀 더 체계적으로 나이주의가 무엇인지 제시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운동을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그런 운동을 기획하고 실천하는 것은 앞으로 우리가 함께 해나갈 일이다. 여기에서는 그에 앞서, 나이주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주 맞닥뜨리게 되는 의문과 오해들 몇 가지에 대답하며 나이주의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려고 한다. 이런 응답과 논의를 통해서 나이주의가 어떤 점이 문제인지, 나이주의에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맞서 싸울 것인지, 더 많은 이야기들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1. 반말 좀 했다고 나이주의자이고 ‘꼰대’라고 하는 거냐? 너무하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분들은 보통 나이주의적 행동에 대한 지적을 자신이 특별히 더 꼰대적이라거나 인권감수성이 없다는 지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또한 나이주의를 개인의 인식의 문제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자신은 청소년인권 보장을 지지하고 청소년들을 존중한다는 자기변호를 덧붙이기도 한다.

청소년들에게 일방적으로 반말을 하는 사람이더라도 청소년인권을 지지하고 청소년을 존중하려는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일방적인 반말’이라는 행동 자체가 이미 나이주의적인 맥락과 문화 속에서나 가능한 모습이다. 과연 반말을 듣고 존댓말을 해야 하는 청소년들 모두가 자신이 평등하다고 느낄지, 혹은 제3자가 그 모습을 보고 그들 사이가 평등하다고 느낄지는 의문이다. 일방적인 반말도 여러 나이주의적 차별의 한 요소인데 그런 요소를 남겨두고서 다른 부분에서는 평등하게 대하고 있으니 괜찮다고 주장하는 것은 난센스다.

이런 항변은, 그럼 존댓말만 쓰면 되는 것이냐며 너무 형식적인 기준 아니냐는 논리로 이어지기도 한다. 물론 존댓말만 쓰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보다 연소자나 청소년들에게 형식적으로는 존댓말을 쓰더라도, 청소년들을 무시하거나 나이주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언행을 보이는 경우는 많다. 반면 청소년들을 존중하고 평등하게 대하더라도 연소자이거나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반말을 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가 나이주의적인 행동이다. 형식과 실질을 나눌 문제가 아니고, 그것도 사람들 사이의 관계나 언행을 구성하는 여러 실질적인 요소들 중의 하나인 것이다. 역으로 정말 평등한 관계를 지향한다고 하는 분들에게 묻고 싶다. 서로 평등하다면 서로 존댓말이나 서로 반말을 쓰더라도 별 문제 없지 않겠는가?

나이주의는 단순히 개개인의 의식 문제가 아니다. 가족이나 학교, 경제시스템이나 여러 정책으로 실체를 갖고 있는 사회적 이데올로기이고 구조이다. 우리는 이미 나이주의 사회 속에 살고 있고 나이주의를 경험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가정에서부터, 어린이집이나 학교에서부터, 나이주의는 당연한 문화이자 사회의 모습으로 학습된다. 특히 학교에서는 나이를 학년과 결부시켜서 눈에 보이는 서열로 만드는데, 여기에서는 군대식 계급 문화에서 따온 부분도 보인다. 나이주의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극복하자는 것은, 이러한 사회와 문화를 바꾸고 대안을 만들자는 것이지, 단지 우리 각자가 청소년들을 존중해주는 착한 사람이 되자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청소년들 역시 대개 연장자가 연소자에게 존댓말을 쓰면 어색해 하더라는 항변도 곧잘 듣게 된다. 청소년들도 나이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고 나이주의를 받아들이고 있으니 당연히 그럴 것이다. 나이주의와 맞서 싸우는 것은 이런 당연한 일상을 바꾸려고 하는 것이므로 어색함을 감수하고 도전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반말/존댓말 문제에서도, 단지 반말을 쓸지 존댓말을 쓸지만을 정하는 게 아니라, 나이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충분히 공유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이 나이주의에 반대하는 실천이기도 할 것이다.

2. 한국에는 한국의 문화가 있는데, 서양식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 아닌가?

언어습관, 예컨대 나이에 따른 존대/하대의 문제는 한국을 비롯하여 주로 동양권 문화에서 두드러지는 것이기는 하다. 과거 어린이날·소년해방 운동을 주도한 천도교소년회의 김기전이 ‘장유유서를 철폐하자’라고 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유교적인 문화나 관념이 나이주의에 일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이주의가 한국만의 문제라는 것은 큰 오해이다. 나이주의는 대부분의 나라에 있다. 나타나는 모습이나 문화, 제도가 다를 수도 있고 정도의 차이도 있겠지만 말이다. 나이주의 비판은 ‘한국의 문화’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류 사회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차별과 폭력 문제를 짚는 것이다.

따라서 “영어처럼 언어에서 존댓말/반말 구분을 없애자는 소리인가?”, “그래 영어식으로 해서 편하게 하자”라는 주장은 나이주의를 비판하는 맥락을 벗어나 있다. 언어가 문제가 아니다. 그 언어가 나이에 따라 차별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문제이다. 나이에 따라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나뉜다는 개념, 그리고 그 개념이 반영된 언어 관습을 비판하는 것이지, 높임말과 낮춤말과 평대가 존재하는 언어를 그렇지 않은 언어로 갈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보편적인 인권과 평등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가령, 과거 한때에는 아내가 남편에게 존댓말을 쓰고 남편은 아내에게 반말을 쓰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고 대중매체에서도 대부분 그런 묘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것이 성차별적이라는 지적이 이어지면서 최근에는 변화하고 있다. 우리는 나이 관계가 호칭에 잘 나타나지 않는 외국의 사례를 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고 낯설게 보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외국이라고 나이주의가 없는 것은 아니며, 나이주의 반대는 꼭 ‘외국처럼’ 하자는 것이 아니다.
 '비정상회담'에서 타일러는 영어에는 존댓말이 없다는 오해를 해명했던 적이 있다.<br />

▲ '비정상회담'에서 타일러는 영어에는 존댓말이 없다는 오해를 해명했던 적이 있다.



3. 나이주의 반대는 연장자/노인을 적대시하는 건가? 사실 청소년 차별보다 노인 차별이 더 심각한 문제 아닌가?

나이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물론 연장자가 연소자보다 더 윗사람이라는 식의 나이 위계에 반대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윗사람처럼 구는 연장자와 평등을 요구하는 연소자가 대립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때도 많고, 살아온 시대의 문화 때문에 나이주의적 행동을 더 노골적으로 하는 노인 세대들이 마치 나이주의의 화신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그러나 나이주의 반대가 특별히 연장자나 노인을 적대시하는 것은 아니다.

나이주의, Ageism이 원래 노인 차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점을 기억하자. 나이주의 체제 속에서는 노인도 차별의 대상이 되고 때로는 ‘노인혐오’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늙는다는 것은 부정적인 현상으로 취급받고, 노인들은 많은 편견의 대상이 되며, 노동의 면에서 경제적으로도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노인 차별과 청소년 차별은 종종 닮은꼴을 하고 있다. 시위에 나온 청소년들을 ‘미성숙한 아이들이 선동당해서 거리로 나왔다’라고 하는 것과, 시위에 나온 노인들을 ‘노망이 나서 / 과거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용돈 준다고 해서 나왔다’라고 하는 것은 매우 흡사하다. 또한 노인들이 대중교통요금 면제, 연금, 복지 혜택 등을 받는 것을 비난하는 모습과 청소년들이 무상교육·무상급식 등의 복지 혜택을 받고 친권자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것을 비난하는 모습도 통하는 부분이 많다. 나이주의 시스템 속에서 청소년과 노인은, 서로 다른 점도 많지만 비슷한 점도 많은 집단인 것이다.

또한 나이주의는 청소년과 노인 말고도,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이 정도 나이면 결혼해야지’ 등의 방식으로 ‘생애주기’ 규범을 요구하고 사회 재생산에 기여하라고 하는 등의 방식으로 말이다. 나이주의를 분석하고 비판한다는 것은 이처럼 모든 사람들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노인들로 구성된 단체들이 거리에 나왔을 때도, 청소년들과 비슷한 비난과 편견 어린 평가를 받곤 한다.<br />

▲ 노인들로 구성된 단체들이 거리에 나왔을 때도, 청소년들과 비슷한 비난과 편견 어린 평가를 받곤 한다.


4. 나이주의 관련 주장들은 일종의 세대론 아닌가? 세대보다 성별이나 계급이 더 중요한 문제 아닌가?

나이주의를 가시화하고 비판하는 것은 나이가 중요한 사회적 요소라고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간혹 세대론과 혼동되곤 한다. 그러나 세대론이 특정한 경험을 가진 특정 시대 특정 연령 집단을 강조하는 것인 데 반해, 나이주의 비판은 사회의 이데올로기이자 제도로서 나이의 의미와 현실을 논하는 것이다. 가령 ‘88만원 세대’ 이야기는 2000년대 후반 한국에서 비정규직 일자리를 갖기 쉬운 저소득 청년 세대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나이주의를 분석하는 것은 20~30대 청년들이, 나이에 따른 사회적 권력과 자원의 분배 때문에 어떤 처지에 처하게 되는지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접근 방법은 ‘88만원 세대’라는 세대 현상을 낳은 원인으로서 우리 사회의 나이주의의 작동 방식을 살피는 것이지, ‘88만원 세대’라는 특정 시기의 특정 세대 현상에 집중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특정한 세대에게 나이에 관한 이미지를 부여하고 세대에 과한 의미를 부여하는 현상(X세대는 새롭고 젊고 발랄하고 등……)도 나이주의의 일면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세대론이 비판받는 여러 이유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계급이나 성별의 차이를 무시하고 세대 개념으로 묶는 것에는 빈틈이 많다는 것이다. 나이주의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은, 나이가 절대적인 결정 요인이라고 보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나이는 성별과 계급, 장애 등 다른 사회적 정체성과 요소들과 항상 결합하여 작동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여성의 노화와 남성의 노화는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늙은 여성은 여성성을 상실한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남성과 여성은 요구받는 ‘생애주기’도 차이가 난다. 또한 저소득 노동자의 노화와 자본가-전문직의 노화도 다른 이미지로 받아들여진다. 우리의 과제는 성별이나 계급, 장애 여부, 인종 등의 요소들이 나이와 어떻게 결합하여 사회 재생산에 이용되고 개인을 규율하고 차별하는지 살피는 것이다.

5. 나이에 따른 특성은 분명히 있고 청소년이 미성숙한 것도 사실인데 그걸 무시하는 것인가?

나이는 계급 등의 다른 요소에 비해 자연스럽고 생물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나이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러운 일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성별과 성차(性差) 역시 자연스럽고 생물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매우 사회적으로 구분되고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떠올려보자. 분명 나이에 따른 대략적인 특성이나 차이점은 존재한다. 평균적으로, 10세의 근력과 20세의 근력과 60세의 근력 사이에 차이가 난다는 것이나, 나이가 들수록 어떤 질병들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은 자연적인 문제이며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차이들 중 어떤 것에 주목하고 무어라 이름 붙일 것인지, 또 차이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는 사회적인 문제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어휘량은 그 사람이 듣고 말하고 읽고 써온 언어의 경험치에 비례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10대인 학생과 40대인 교사 사이에는 어휘량이나 언어 경험치의 차이가 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10대 학생들이 40대 교사들이 회의 때 쓰는 개념들이나 용어들을 잘 모른다고 해서 그것이 학생들을 회의와 의사결정에서 배제해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일까? 반대로 10대 학생들도 이해할 수 있는 말들로 회의 자료를 만들거나, 10대 학생들이 충분히 함께 대화할 수 있게 사전에 설명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이유는 아닐까? 이처럼 나이에 따른 차이를 그 나이의 사람을 규정하고 차별하는 근거로 쓸 것인지, 또는 그 사람에게 적절한 지원을 하고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참고 사항으로 삼을 것인지, 이것은 자연스러운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와 원리의 문제이다.

오자와 마키코는 나이에 따라 어린이·청소년들이 ‘발달’한다고 보는 심리학의 개념을 비판하면서, “생명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법인데, 그 변화의 방식에 소위 과학적인 잣대를 들이대 어린 시기에는 월 단위로 변화의 양상이 측정된다. ‘생명의 변화’에서 ‘발달’이라고 말이 바뀐 순간에 삶의 모습은 왜곡되고, 축소되고, 경직되어버렸다.”(《심리학은 아이들 편인가》, 34쪽)라고 이야기한다. 동일한 현상도 ‘성숙/미성숙’, ‘발달’, ‘노화’라고 볼 것인가, 생명의 변화라고 볼 것인가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대우받는다. 나이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나이에 따른 특성에 우열을 매기고 차별하는 것에 반대한다.

게다가 나이에 따라온다고 믿는 어떤 특성들은 나이주의의 원인이 아니라 나이주의가 낳은 결과물일 수도 있다. 청소년들이 무책임해 보이는 것은 그들에게 책임감을 지우지 않고 보호 대상으로만 대하며 주체가 될 기회를 주지 않는 환경 때문은 아닌가? 노인들이 경직되어 보이는 것은 그들을 사회경제적 트렌드에서 배제시키고 고립시키는 상황 때문은 아닌가? 이런 현상들을 살펴보면 나이주의는 자기 재생산을 충실히 해내는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더욱 신중하게 나이주의를 비판하고 살펴봐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덧붙임

공현 님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