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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주의와 청소년인권] ‘예의’ 속에 담겨 있는 나이주의

호칭, 상하관계, 그리고 나이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름 이외의 여러 가지 호칭을 가지게 되고 누군가를 어떤 호칭으로 불러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며 살게 된다. 그 호칭은 대개는 자신의 정체성이라기보다는 상대방과의 관계를 통해 드러난다. 언니, 오빠(누나, 형), 동생, 선배, 선생님, 이모, 누구누구 씨, 선생님, 누구 친구 등등 살면서 쓰게 되는, 듣게 되는 다양한 호칭들에 공통점이 있다면, 서로의 나이 서열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언니, 오빠 등은 물론이고, 실제 친인척 관계가 없는 이들마저도 이모뻘, 삼촌뻘, 이모, 삼촌 등 나이-친족 관계에 따라 부르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청소년인 사람들은 ‘선생님’이라는 존칭을 얻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언론에서 호명될 때마저도 비청소년들과 구분되어 ○○양, ○○군 등으로 하대를 받으며, 심지어는 영유아의 경우 ‘○○이’라 보도되기도 한다. 개인 간의 관계에서 아랫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에 더해 사회에서도 청소년이라는 집단을 나누어 공식적으로 낮은 자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호칭과 그에 따른 위치는, 그에 따른 대우로 이어진다. 아주 대표적으로, 청소년에게는 자연스럽게 반말을 하고, 이름만으로 호칭하거나 하대하는 현상을 들 수 있다. 어린 사람들은 서열로 보면 아래의 호칭, 더 적은 존중, 더 낮은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다. 또한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이 다가와 ‘○○ 친구’라며 스스럼없이 신체접촉을 하는 불쾌한 경험도 자주 하게 된다. 어린 사람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고 자신이 친하다고 ‘믿으면’ 상호 합의 없이 친근함을 ‘베푸시는’ 것이다.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는 나이 든 사람들에게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거의 세뇌와도 가까운 주문이 함께한다. 어떠한 갈등상황에서도 연장자에게는 예의를 지켜 말해야 하고, 얼마나 옳은 말이나 행동을 한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연장자의 심기를 거슬렀다면 예의를 지키지 않았다는 도덕적 불명예를 안게 되는 것이다. 연장자, 특히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연장자에게 예의를 지키지 않는 일은 한국 사회에서 굉장한 터부로 돼있다. 마치 군대에서의 하극상과도 비견될 만큼, 나이권력을 거스르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사실 나이 어린 사람이 먼저 깍듯이 인사를 해야 한다거나, 나이 많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존댓말을 해야 한다거나 하는 ‘예의’의 목록들은 군대에서 계급이라는 기준 아래 존재하는 격식을 그대로 차용한 듯 보이기도 한다. 청소년과 비청소년 간의 언쟁에서, 청소년에게 “내가 네 엄마(아빠)뻘인데 어딜 감히!”라는 반응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10주년 기념 스티커 <요즘것들의 말대꾸>

▲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10주년 기념 스티커 <요즘것들의 말대꾸>


어떤 예의는 자유로운 소통을 가로막는다

청소년운동 내에서 활동가들이 주로 토로했던 경험들은 청소년이기 때문에,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특정한 호칭으로 불리거나, 하대 등을 당했던 경험들이었다. 단순한 말 한 마디임에도 이것이 멸시나 무시 혹은 청소년혐오로 다가오는 이유는 어떤 호칭을 듣는지, 어느 정도로 예의를 차리는지가 얼마나 존중받고 있는지에 대한 바로미터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무례한 언행을 경험하는 이유가 단순이 나이가 어려서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들은 굉장히 난데없이, 경황없는 와중에 지나가는 말들로 맞이하게 되기 때문에 나이주의에 대한 깊은 논쟁보다는 “초면에 합의 없이 반말을 하지 말라”는 방식으로 대처하곤 했다. 때문에 많은 경우는 상대방이 예의를 갖추게 되거나 존중을 가지고 서로를 대하게 된다기보다는 반말을 하지 않는다는, 어떤 요건을 지키듯이 반응하는 것 또한 흔히 볼 수 있었다. 혹은 이러한 문제제기의 장에서 역시 나이권력이 등장하기도 한다. 좀 ‘정중하게’ 반응하는 경우 역시 “예의를 지켜서 문제제기해 달라”고 하는데, 사실 나이에 따른 호칭, 예의, 하대 등을 둘러싼 문제제기의 핵심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발언이다. 나이어린 사람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발언권을 제약 당한다. 한국 사회에서 ‘연장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이란 ‘연장자가 듣기 싫은 내용의 말은 하지 않는 것’에 가깝다. 반대로 연장자는 연소자에게 하대를 하고 무시하는 것은 물론 때때로는 폭력을 휘두르는 것조차 쉽게 용인된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먼저 태어났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연장자에게 예의를 지키고 높은 호칭을 부여하는 것을, 혹자는 “그 사람이 살아온 세월과 경험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 옹호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을 시간 환산해서 ‘경험과 시간’의 양을 존중받는 것은 온당한 일일까? 경험은 사실 양적, 질적으로 측량할 수 없는 어떤 것이므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존중받아야 하고, ‘높은 사람’ 대접을 받는 것은 굉장히 불합리한 일이다. ‘나이’를 기준으로 어떤 사람이 존중을 받을 가치가 있는가를 재단하는 것은 곧 어떤 사람은 나이를 이유로 존중받지 못하는 것 또한 정당화하는 것이다. 나이, 인종, 성별 등 사람 자체가 아닌 속성의 한 부분에 대해 존중을 표하게 되면, 그만큼 같은 이유로 어떤 사람을 존중하지 않기 또한 쉬워진다.

가끔 그 연장자에 대한 예의는 “말이 안 통하지만 늙은 분이니 원하는 대로 해 드리자”는 방식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예의를 지키고 존중을 하는 방식이라기보다는 어떠한 종류의 단절인데, 이 또한 나이에 따른 무시, 멸시에 가깝다. 또한 사회에서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존중받기 힘든 서사와 경험을 가진 이들’에게, 혹은 어떤 점에서 미숙한 사람들에게 “곱게 늙어야지”라거나, “노망이 났다”, 심지어는 “선거권을 주면 안 된다”라는 식의 멸시적 시선을 던지기도 한다. 나이가 어리면 미숙하고, 하대하거나 예의를 지키지 않아도 괜찮다는 고정관념이 ‘나이가 들었음에도 나이가 어린 사람처럼 미성숙하므로 나이 값을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존중할 필요 없다’는 방식으로 변형되어 발현되는 것이다.

나이, 그 획일적이지만 추상적인 개념

사람이 정한 나이라는 추상적인 기준은 사실상 살아온 날이 얼마나 긴지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나이 대에 적합한, 혹은 사회적으로 표준적이고 모범적인 어떤 기준에 충족하고 있는지에 가깝다. 청소년은 사회에서 정한 청소년이라는 자리에 얌전히 있는지, 20대는, 30대는, 40대는 그 나이대에 이뤄야 한다고 규정된 과업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는지……. 이러한 기준에 따라 촘촘히 나눠진 모범 답안이 ‘나이’라는 개념으로 환원된다. 때문에 그냥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인정받는 방식으로 오래 산 사람일수록 존중을 받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나이권력을 통해 상대방으로부터 깍듯한 대우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그 시간들을 통해 가치 있는, 성숙한 존재가 되었는지를 전시하는 화법을 취한다. 결국 그 존중과 예의는 자신이 받게 된다기보다는 자신의 나이에 바쳐지는 것인데도 말이다.

존중한다는 것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어떠한 이유로 서로 간에 존중하거나 예의를 지키기 힘들어지는 경우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사회에서 제도적, 문화적으로 어떤 사람을 존중할지를 두고 그 사람의 성별, 국적, 인종, 성 정체성, 외모, 재산 등에 따라 차별을 두는 것은 굉장히 문제적인데, 나이 또한 앞의 예들과 다르지 않다.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는 예의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곧 나이가 적은 사람은 나이가 많은 사람보다 아래에 위치한 사람이라는 뜻이며, 존중받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예의’는 존중의 표현이 아니라 나이에 따라 다른 정도의 존중을 표하는(혹은 표하지 않는) 어떤 관습에 가깝다.

나이에 따라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나누지 않고 서로 평등한 존중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현재 사용되고 있는 호칭과 예의의 방식을 나이 서열에서 분리해 내야 한다. 그리고 상호 존중이 가능하려면 어떠한 형태로 예의를 표할 것인가, 누군가를 어떠한 명칭으로 호명할 것인가를 재정의해야 한다.
덧붙임

둠코 님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