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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지금 여기, 평화운동으로서 병역거부

<편집인 주>

세상에 너무나 크고 작은 일들이 넘쳐나지요. 그 일들을 보며 우리가 벼려야 할 인권의 가치,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 질서와 관계는 무엇인지 생각하는게 필요한 시대입니다. 넘쳐나는 '인권' 속에서 진짜 인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나누기 위해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들이 하나의 주제에 대해 매주 논의하고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인권감수성을 건드리는 소박한 글들이 여러분의 마음에 때로는 촉촉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다가가기를 기대합니다

6월은 국가에서 지정한 호국보훈의 달이다. 현충일과 6.25전쟁 기념일이 모여 있어서다. 그런데 이를 주관하는 국가보훈처장에 대한 국회의 해임촉구결의안이 6월 23일 의원 166명 명의로 제출되었다.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은 박정희 찬양 선전물 제작, 대선 개입 논란에 이어 ‘임을 위한 행진곡’ 5.18 기념곡 지정 반대에 앞장서더니 급기야 이번 6.25 기념행사로 광주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퍼레이드를 기획했다. 80년 5월 광주에 투입돼 수많은 시민들을 학살한 11 공수여단이 학살의 현장이었던 금남로를 당당히 행진하는 행사를 기획한 것이다. 비판 여론이 빗발치자 계획은 철회됐지만, 5.18 민주화 운동을 대하는 정부의 인식이 고스란히 드러난 사건이었다.

흔히 국립묘지를 관리하고 6.25 참전 군인과 가족들에 대한 생계지원을 하는 곳으로 인식되는 국가보훈처는 생각보다 광범위한 영역을 포괄한다. 일제 식민지 시기 독립유공자, 4.19 혁명 유공자, 5.18 민주화운동 유공자 선정과 지원이 그 예다. 일제 식민지배에 저항했던 독립운동, 독재를 무너뜨린 4.19 혁명, 군사쿠데타에 저항했던 5.18 민주화 운동은 모두 한국 사회 공동체의 형성과 발전과 큰 영향을 준 사건으로 우리가 함께 기억해야 할 집단적 경험이다. 그런데 국가보훈처는 호국과 보훈을 동전의 양면에 비유하며 동일시하려 한다. 국가 공동체에 대한 공로에 보답한다는 ‘보훈’이 군사안보(전쟁)를 뜻하는 ‘호국’과 동일할 리 없다. 6.25 전쟁-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지는 반공 전쟁이 보훈의 중심이 되면서 사회주의 독립운동은 배척되고, 5.18 민주화 운동은 왜곡 폄하되기 시작했다. 보수 세력들이 꾸준히 제기하는 4.19, 5.18에 대한 북 개입설 역시 정부의 이러한 태도가 부추긴 것이다. ‘보훈’을 둘러싼 싸움은 무엇이 공동체에 대한 공로인지, 어떤 경험과 기억을 전승할 것인지, 이를 위한 재원을 어디에 투여할 것인지를 둘러싼 싸움이기도 하다.

병역거부자 무죄판결, ‘안보’의 의미를 묻다

국가보훈처가 6.25 기념 퍼레이드를 요란하게 준비하고, 북한에서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잇달아 발사하면서 6월은 ‘호국보훈의 달’ 답게 군사적 긴장이 한창 고조되었다. 그런 가운데 병역거부자에 대한 무죄 판결 소식이 들려왔다. 2004년 첫 번째 무죄판결 이후, 5번째 무죄 판결이다. 대법에서 병역거부에 대해 유죄판결을 반복하고 있고, 병역법의 병역기피 조항에 대한 헌법재판소 합헌 결정이 2차례 내려졌음에도 하급심에서 5번째 무죄 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특히 이번 판결은 ‘국가 안보’의 의미를 군사안보에 제한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국방의 의무는 군대에 입대하는 사람들만 이행하는 것이 아니다. (중략) 소극적으로는 국가의 안전보장에 해가 되는 행위를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는 국가의 안전보장에 도움이 되는 행위를 하는 방법으로 모두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고 있다. 군인들이 그 복무 기간 동안 국방의 의무를 매우 적극적인 방법으로 이행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여성·장애인·노인·청소년, 군 면제자, 군 전역자 등을 포함한 모든 국민이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사는 동안 항상 국방의 의무를 이행할 의무가 있으며, 실제로 이를 위와 같은 방법으로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안보’를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상태라고 한다면, 공동체 성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안보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형태의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국가보훈처와는 반대로 ‘호국’(군사안보)의 의미를 ‘보훈’(공동체에 대한 기여)으로 확장하는 방향인 것이다. 이번 판결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병역거부자의 행위를 단지 개인의 침해할 수 없는 양심에 관한 문제로 제한하지 않고, 국가나 사회 공동체에 대한 비폭력, 평화주의 운동으로 해석하면서 이 역시 국가안보에 충분히 기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세게병역거부의 날, 전쟁없는 세상을 비롯한 활동가들이 병역거부권 인정 자전거행진을 마치고 국회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사진 출처-전쟁없는세상)

▲ 세게병역거부의 날, 전쟁없는 세상을 비롯한 활동가들이 병역거부권 인정 자전거행진을 마치고 국회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사진 출처-전쟁없는세상)


평화운동으로서 병역거부 운동

병역거부 운동은 처음부터 평화운동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며 활발한 활동을 해왔지만, 초기에 한국사회에서는 종교적 신념, 비폭력 평화주의 신념이 굳건한 ‘개인’들의 결단의 문제로, 국가 폭력에 의한 피해의 문제로 이해되어왔다. 그래서 병역거부를 옹호하는 주장들도 병역거부자들의 양심이 얼마나 진실된 것인지를 증명하는 데 집중되었다. 이는 2004년 첫 번째 무죄 판결문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양심을 빙자해 병역을 기피하는 자를 가려내기 위해서는 병역거부자가 일반적인 해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양심결정 과정을 분명히 밝혀야 하고 병역을 거부하기로 한 특별한 사정을 설득력 있게 설명해야 하며 병역거부 결정을 한 전후에 병역거부와 관련된 사회활동을 하였을 것 등을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무죄 판결의 근거로 병역거부자들의 양심이 병역법 88조 1항에서 규정한 병역의무 불이행의 ‘정당한 사유’에 해당된다는 점을 논증하는 데 집중한 것이다. 하지만 평화운동으로서 병역거부 운동은 지난 10여 년 동안 전쟁과 전쟁을 일으키는 사회적 구조에 대한 저항에 초점을 둔 운동을 꾸준히 펼쳐왔다. 2004년과는 사뭇 다른 이번 무죄 판결은 병역거부 운동이 만들어낸 성과이기도 한 것이다. 전쟁이 가능한 사회적 구조로서 현재의 징병제에 대한 문제제기는 공동체의 평화와 안전을 만들기 위한 사회적 노력과 구조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고, 이는 협소한 군사안보를 넘어 빈곤, 차별과 폭력, 재난, 전쟁위협으로부터 자유롭고 안전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안보’를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병역거부 운동은 남북이 대치하는 분단 상황이라는 현실에 비춰 순진한 이상주의이거나 몇몇 개인들의 결단이 만들어낸 특별한 사건이 아닌, 지금 여기 한반도에서 절실한 평화의 구조와 조건을 만들어내는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럴 때 공수부대 금남로 행진을 계획하는 게 아니라, 세월호 구조에 나선 민간잠수사를 국가유공자로 예우하는 국가보훈처를 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덧붙임

정록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