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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아의 인권이야기] 평화의 기억으로 무기를 녹여

평택 이주협상이 타결된 지난달 말 인권활동가들과 함께 대추리로 향했다. 특별한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다. “고생, 수고, 감사…무슨 말로도 충분하지 않을 거예요. 여러분들은 어떤 혁명가, 운동가보다도 우리 활동가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줬어요. 앞으로도 서로를 계속 기억하면서 살았으면 합니다.” 촛불행사에 참여해서 대충 그런 이야기를 한 것 같다. 여전히 촛불행사장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할머니들은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으로 되레 우리를 위로했다. “앞으로 혼자선 농사 못 지어. 몇 명이 같이 하자고 하긴 했는데……. 이 근방에서 살 만한 논이 없어. 평당 5만원 정도 해야 먹고 살 수 있는데 그런 게 있나. 어디 좋은 논 있으면 소개 좀 시켜줘.” 촛불이 끝난 후 마주 앉은 주민대책위 분들은 앞으로 농사는 어떻게 되는지 묻자 이렇게 대답한다. 정부가 보상한 건 ‘돈’이었을 뿐 ‘농사짓고 먹고 사는 생계’가 아니었다. 그 보상금마저도 곶감 빼먹듯 없어지기 마련이라는 게 먼저 떠난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 얻은 결과다.

<출처; cafe.naver.com/allnong>

▲ <출처; cafe.naver.com/allnong>



평택 미군기지확장 반대 운동을 평화적 생존권 운동으로 만든 산파, 운동의 대표적인 주체이자 평화운동의 강렬한 바람을 몰고 온 사람들은 바로 팽성 주민들이다. 전국에 산개해 있는 개인들, 풀뿌리 조직들에게 평화의 씨앗을 뿌리고 그들을 대추리, 도두리로 불러들인 대중 확산의 힘은 바로 주민운동의 자발성과 능동성이었다. 팽성 주민들은 1천일 째에 이르는 촛불집회, 2005년 전국 순례, 2006년 전국 트렉터 순례, 지장물 조사 거부, 주민등록증 자진반납, 불법 영농행위 차단에 맞선 직파 운동 등 불복종 직접행동의 다양한 실천을 주저하지 않았다. 2004년부터 시작된 이들의 투쟁은 피해 당사자들이 빠지기 쉬운 대리운동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들은 이해관계에 매몰되는 것을 경계하고 평화라는 보편적 가치에 입각해 공공의 목적을 내세우며 신념의 실천자로서 그 모습을 당당히 했다는 점이다. 대추리 전 이장인 김지태 씨에게 어떤 보상을 바라냐고 묻자 “그 너른 들판을 사시겠다고? 그 금액은 너무 어마어마해서 나는 상상을 못할 지경이니깐, 힌트를 드리자면 대추리, 도두리 들판에서 지금껏 거두었던 벼의 낱알의 개수만 하다고나 할까. 그것을 일구기 위해 굽혔다 폈던 관절의 운동 횟수만 하다고 해도 될 것 같다. 한 가지 더. 그들의 시간, 한숨, 울음, 웃음, 그것을 내려다보았을 별빛이나 시름을 달래주던 바람의 총량까지 합하면 대충은 나올 것 같다”는 시 같기도 하고 노래 같기도 한 대답은 물질적 보상이 도달할 수 없는 삶의 존엄성을 알려주었다. 우문현답이 바로 이런 말이리라. 국가의 보상이라는 게 결국 삶의 가치에 대한 보상은 아니었다. 보상 규정 그 어느 곳에도 이들이 지닌 존엄성, 그 훼손에 대해서는 대책이 없다. 심지어 위태롭게 된 생계에 대해서도 묵묵부답일 뿐이다.

두 번씩이나 군사기지로 자기 땅에서 내몰렸던 이들의 삶의 역사는, 국가권력이 말하는 ‘안보’는 사실 민중의 안보와 동떨어진 특권의 안전장치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전쟁을 준비하고 민중을 사지로 내모는 권력은 언제나 정당한 전쟁, 국익, 안보를 명분으로 자신들의 검은 속내를 감추어 왔다. 아프간 파병 군인이 흘린 피가 채 마르기도 전인 지난 17일 저녁 KBS뉴스는 이라크 파병의 실익을 챙겨야 한다고 떠벌렸다. 전 세계적인 반전평화 집회가 있기 하루 전날이었다. 자이툰 부대 군복으로 중무장한 기자는 아르빌 현지에서 “자이툰 부대 파병 2년6개월 째. 이제는 철군 여부를 떠나 국내 기업체들의 적극적인 진출을 통해 파병에 따른 실리를 찾아야 할 때”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라크 민중들을 학살하고, 가난한 젊은이들을 돈과 명예로 유혹해 더러운 전쟁에 가담하게 하는 권력자들은 결코 그들이 말하는 ‘애국의 길’에 직접 뛰어들지 않는다. 다만 이익을 챙길 뿐이다.

베트남전 당시 징병 거부 운동의 주역이었던 데이비드 오브라이언 역시 전쟁 이익이 누구의 것인지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악명 높은 미국의 징병법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전장으로 불러들였다. 개정된 징병법은 ‘병역시험’을 보게 해 낮은 성적순으로 징병했다. 흑인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징집대상자의 1순위를 차지했다. 아일랜드계 노동자 계급 거주지에서 살고 있던 오브라이언은 보스턴 법원 앞에서 징병카드를 불태워버리는 저항 행동으로 베트남전이 가난한 사람들을 총알받이로 만들고 있다고 항의했다. 그의 뒤를 이어 수많은 사람들이 징병거부 운동에 뛰어들었다.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도 전쟁이 국익이 아닌 권력자들의 이익에 봉사한다는 것을 널리 알렸다. 베트남전을 ‘백인의 전쟁’이라고 규정한 그는 “베트콩은 우릴 ‘깜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며 징집을 거부했다. 알리는 인종차별 반대 운동과 반전운동을 횡단하며 전쟁의 감춰진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그들의 저항은 곧 불이익과 희생으로 이어졌다. 오브라이언은 감옥에 갔으며 알리는 선수생활이 중단되어 고초를 겪어야 했다. 땅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 겪어야 했던 평택 농민들의 쓰라린 경험처럼 말이다.

20일 국방부는 평택기지 시설종합계획을 발표했다. 총 10조원 가량이 소요되고 이 가운데 한국 정부의 부담비용은 5조5천905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엄청난 규모의 전쟁기지가 만들어지게 된다. 이주민의 삶의 질이 현격히 떨어지는 것엔 아랑곳하지 않는 정부는 ‘미군의 삶의 질 유지 및 제고’를 위해 한국 정부가 전액 부담하는 병원과 골프장이 포함되어 있다. 가진 자들의 안보를 위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자기 땅을 잃거나 전쟁터로 내몰리는 것이다. ‘국익’이라는 말의 성찬이 이 모든 범죄행위에 면죄부를 주고 있다.

<출처; 평화바람 홈페이지>

▲ <출처; 평화바람 홈페이지>



평택 농민들은 이달 말이면 모두 이주해야 한다. 대추리, 도두리가 군사수몰지역으로 사라질 운명 앞에 놓여 있다. 다가올 24일이면 주민들이 그동안 이어 오던 촛불도 마지막 밤을 밝히게 된다. 하지만 대추리, 도두리에서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 평화를 지키기 위해 겪어야 했던 국가 폭력의 잔인한 기억들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그 기억이 다시 평화의 불씨가 되어 전쟁 무기를 녹이는 힘으로 되살아날 때까지. 평화의 기억을 길어 올려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또다시 평택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