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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 살다] 서울인권영화제 거리상영 5년, 거리는 ‘자유’다

거리에서 외치는 표현의 자유

[편집인주] 17회 서울인권영화제가 ‘세상에 사람으로 살다’라는 슬로건으로 5월 25일부터 28일까지 나흘 간 청계광장에서 열린다. 강정, 용산, 그리고 재능농성장과 쌍용차 분향소... 우리 사회의 현 주소를 보여주는 투쟁장소들. 그들은 왜 그곳에서 그토록 오랜 시간 싸우고 있는 걸까. 개발의 이름으로, 이윤의 이름으로 삶터를, 일터를 빼앗으려는 국가와 자본에 대항하여 싸우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다. 터전이라 함은 단지 물리적인 의미만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 관계, 역사의 뿌리가 고스란히 뻗어있는 곳이다. 그러하기에 대체될 수 없고, 쉽게 떠날 수 없다. 그러나 장소를 갖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장애인과 성소수자 등 수많은 소수자들은 자신의 존재로 역사를 써나갈 장소를 찾기 위한 투쟁을 하고 있다. 상영관을 대관할 수 없어 거리상영 5년 째, 서울인권영화제가 인권영화관을 세우려는 거리는 어떤 의미일까. 장소를 지키고, 드러내고, 확장하기 위한 투쟁은 그 자체로 세상에 사람으로 살기 위한 외침이다. 그 외침을 들어보자.

사진작가들은 자기 몸이 공감하는 장소에 가면 그곳에 있는 생물, 무생물들이 말을 걸어온다고 한다. 비단, 사진작가들만 그렇게 느낄까? 아닐 것이다. 우리 몸이 기억하는 그곳에 가면 우리 역시 감응하고 반응한다. 그곳이 바로 ‘거리’이다. 거리에서 외침과 몸짓, 거리에서 풍찬노숙, 거리에서 연행과 체포 등 그 많은 기억 가운데 나의 뇌리에 또렷하게 각인되는 영상 하나, 거리에서 인권영화관 짓기. 2008년, 2010년, 2011년 마로니에 공원, 2009년 청계광장에서 서울인권영화제는 개막했다. 2012년 다시 청계광장에서 서울인권영화제가 시작한다.

사실 인권영화제를 하는 것 그 자체는 상영장을 확보하는 것과의 투쟁이다. 일정을 잡고 상영장을 정하는 것은 인권영화제 진행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한걸음이다. 인권영화제 모든 홍보는 일정과 장소가 정해져야만 시작할 수 있는데 장소가 결정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마음을 졸이면서 인권영화제를 준비할 수밖에 없다.

[사진: 제2회 인권영화제 풍경. 곳곳에서 불심검문, 발전기는 필수장비, 그렇게 만들어진 야외영화관을 관객들이 함께 지켜주었다.]

▲ [사진: 제2회 인권영화제 풍경. 곳곳에서 불심검문, 발전기는 필수장비, 그렇게 만들어진 야외영화관을 관객들이 함께 지켜주었다.]


서울인권영화제가 애초부터 거리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다. 사전검열이 존재하던 시절, 제1회 인권영화제(1996년)는 사전심의를 거부했다. 어느 극장도 ‘심의필증’이 없는 인권영화제에게 대관을 해주지 않았다. 결국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상영했지만 서대문 구청의 경고, 학교 측의 ‘공식불허’ 입장을 감수해야 했다. 제2회 인권영화제(1997년)도 험난한 길을 걸었다. 개최 장소였던 홍익대학교는 경찰에게 시설물보호 요청을 했고 경찰은 원천봉쇄라는 강경수를 들이댔다. 홍익대학교가 전기를 끊자 발전기를 준비해서, 교내 곳곳에 작은 야외영화관을 만들었다. 결국 예정보다 하루를 당겨 제2회 인권영화제를 폐막했다. 또한 공안당국은 제2회 인권영화제에서 상영했던 <레드헌트>라는 작품이 ‘이적표현물’이라는 이유로 서준식 인권운동사랑방 당시 대표를 구속했다. 같은 해 <레드헌트>가 부산영화제에서 상영한 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지만, 인권영화제에서 상영하는 것은 국가보안법 위반이라고 했다(이후 국가보안법 위반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인천인권영화제, 제주인권영화제는 불복종 차원에서 <레드헌트>를 상영하기도 했다. 서울에서는 공동대책위가 만들어져 명동성당에서 서준식 대표의 석방 촉구 농성과 함께 항의 상영에 들어갔다.

제5회 인권영화제(2000년)까지 주로 대학교 공간을 상영장으로 확보했다면, 2001년부터는 전문상영공간을 찾아 나섰다. 봄으로 옮겨온 인권영화제는 일주아트하우스와 아트큐브에서 다시 보는 명작선을 중심으로 제5.5회 인권영화제(2001년)를 개최했다. 제6회∼제9회 인권영화제(2002∼2005년)는 아트큐브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개최했다. 그러다 아트큐브를 운영하는 흥국생명이 노동자를 탄압하는 것이 문제가 되자, 제10회∼제11회 인권영화제(2006∼2007년)는 서울아트시네마(구 허리우드극장)에서 진행했다. 제10회 인권영화제는 서울아트시네마 뿐만 아니라 평화적인 생존권을 지키며 투쟁하던 평택 대추리로 상영장을 넓혔다. 서울인권영화제가 인권운동의 현장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명박 정권이 출범하던 2008년 서울인권영화제는 다시 거리로 나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영화진흥위원회의 추천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상영관을 대관하지 못했기 때문. 마로니에 공원에서 제12회(2008년), 제14회(2010년), 제15회(2011년) 인권영화제를 개최하면서 초심으로 돌아가 표현의 자유를 외쳤다. ‘누구든지’ 영화진흥위원회의 ‘추천’을 받거나 ‘등급분류’를 받아야만 영화를 상영할 수 있도록 강제하는, 사실상 ‘사전검열’인 현행 ‘영화 및 비디오에 관한 법률’의 문제점을 알리기 시작했다. 인권영화제에게 ‘공원’도 결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소는 아니었다. 신청서를 내고 허가를 얻기 위해 종로구청을 찾아다녀도 확답을 받지 못하자 만일을 대비해 혜화경찰서에 집회신고를 하는 묘수를 내야했다.

[사진: 13회 인권영화제 풍경. 무대 주변이 봉쇄되기도 하고, 우여곡절 끝에 청계광장에서 개막을 선포, 영화제에 함께 한 관객들로 청계광장이 꽉 찬 모습은 감동스러웠다.]

▲ [사진: 13회 인권영화제 풍경. 무대 주변이 봉쇄되기도 하고, 우여곡절 끝에 청계광장에서 개막을 선포, 영화제에 함께 한 관객들로 청계광장이 꽉 찬 모습은 감동스러웠다.]


제13회 인권영화제(2009년)는 ‘광장’을 선택했다. 그러나 청계광장을 관리하는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은 영화제 개최를 이틀 앞두고 청계광장 사용허가를 취소했다. 이유는 ‘시국관련 시민단체들이 집회장소로 활용’하는 것에 대해 시설보호를 해야겠다는 것. 청계광장에서 기업이나 지방자치단체가 벌이는 행사는 당연하고, 인권영화제가 영화제를 하면 불법집회로 변질될 위험이 있어 안 된다는 것이다. 사용허가 취소 이유치고는 궁색하다. 거리에서 인권영화관을 짓는 동안 거리마저도 시민의 것이 아닌 현실을 똑똑히 목격했다. 자유를 찾아 거리로 나왔지만, 거리와 광장은 이미 자본과 권력이 점령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거대방송이 자본에 독점되고 지식이 권력화 될 때, 거리에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몸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구럼비를 지키기 위해서 사람들은 거리로 나온다. 해고된 노동자들이 복직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걸고 사람들은 거리농성을 마다하지 않는다. 땡볕과 매연을 무릅쓰고 저상버스 100% 도입을 위해 광화문광장에서 1인 시위를 한다. 우리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도 불의에 저항하기 위해서도 거리로 나온다. 우리는 거리에서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현실을 집회와 농성으로, 기자회견과 1인 시위로 풀어낸다. 이제 서울인권영화제는 청계광장에서 ‘인권영화관’을 지어 함께 연대하는 ‘장소’를 마련하고자 한다.

[그림: 서울인권영화제 포스터 모음]<br />

▲ [그림: 서울인권영화제 포스터 모음]


가난한 인권단체이지만, 서울인권영화제는 관객들이 가능한 최고의 조건으로 영화를 볼 수 있도록 LED(스크린대용영상판)를 설치하고, 음향을 조율할 것이다. 변덕스런 초여름 날씨가 선사하는 비와 햇볕을 피하기 위해 천막도 세운다. 관객들은 여느 영화제가 줄 수 있는 안락한 의자를 포기하고 딱딱한 거리 바닥에 앉을 것이다. 이 모든 어려움을 감수하고 사람들이 거리로 오는 이유는 ‘거리’는 ‘자유’이기 때문이다. 거리에서 외치고 싸우고 울고 웃고 연대하면서 느끼는 자유, 그 자유가 주는 해방감으로 인해 사람들은 거리로 나온다. 움츠렸던 가슴을 펴고, 표현의 자유를 향해 커다란 숨을 터뜨린다.

그저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소박함과 간절함을 담아 ‘세상에 사람으로 살다’라는 슬로건으로 제17회 서울인권영화제가 5월 25일부터 28일까지 청계광장에서 열린다. 거리에서 몸으로 감응하고 반응하는 당신, ‘규제와 통제’를 거부하고 표현의 자유를 드높이자.
덧붙임

최은아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