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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개발의 첫 단추] 잘못 끼워진 단추는 다시 끌러야

인권과 민주주의의 원리에 바탕을 둔 개발 사업 제도 재구성 필요


‘재개발’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그러나 지금은 온갖 갈등과 분쟁의 씨앗이 되어 버렸다. 정확히 말하면, 예전부터 지금까지 ‘재개발’은 언제나 갈등과 분쟁의 씨앗이었다. 개발 사업은 대다수 주민들의 참여를 배제하고 밀어붙이기 식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부동산 시장이 상승세를 보이던 때에는 어느 정도 상쇄되었던 개발이익의 불균등한 분배가, 조합원인 소유주들에게 직접적인 문제가 되고 있어 분쟁이 더욱 잦아지고 격해지는 것이다. 특히 뉴타운이 본격화된 2005년부터 ‘재개발’과 관련된 각종 소송이 두 배 가까이 급증한다. 이런 분쟁의 씨앗은 과연 누가 뿌리는 것일까.

‘주민’이 설 자리 없는 개발 구역 지정

흔히 ‘재개발’이라고 묶여 불리는 도시재정비 사업은 다양한 방식으로 추진된다. 주택재개발사업, 도시환경정비사업, 주택재건축사업 등이 그것이다. 사업 방식은 다양하지만 주거환경개선사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조합이 주도한다. 그러나 조합은 조합원들의 이익을 가장 먼저 고려하는 사적 주체다. 도시재정비 사업이 지속 가능한 도시를 만든다거나 지역 커뮤니티를 활성화한다는 목표에 번번이 실패하는 이유다. 그런데 조합이 설립되기 전 개발 사업이 시작될 수 있도록 길을 트는 것은 지방자치단체의 몫이다.

도시재정비사업은 해당 지역 주민들의 퇴거를 수반하는 사업이다. 주거뿐만 아니라, 일자리, 교육, 생계, 문화, 사회적 관계 등 삶의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치는 사업이다. 그만큼 신중하게 시작되어야 하며 주민들의 의견을 충실히 수렴해야 한다. 그러나 재정비사업의 구역 지정은 물리적 요건만 충족하면 법적으로 문제가 없어 주민들이 사업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시작되어 버린다. 구역 지정 요건은 개발 사업을 시작하기에 유리한 방향으로 완화되어, 재정비사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기 어려운 주거지가 ‘낙후․불량’이라는 딱지를 달고 정비 대상이 된다. 정비구역을 지정할 때에는 ‘정비사업의 시행계획 및 시행방법 등에 대한 주민의 의견’(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법)을 묻도록 하고 있으나 실제로 주민 의견 수렴 조사는 개발에 대한 찬성을 유도하는 문항과 낮은 응답률로 주민 의사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2009년 12월 기준으로 전국에 2,129개의 정비사업 구역이 지정돼있다. 그 중 서울 472개, 경기 327개, 인천 175개로 40% 가량이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 구역 지정부터 착공까지는 5~10년이 소요되는데 지금은 대부분의 구역들이 장기간 지체되어 주민들 사이에 의견이 갈리고 갈등이 심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장치가 미흡해 대부분 소송으로 이어진다. 소송의 내용 역시 보상 문제 외에 정비사업 자체를 반대하는 내용이 증가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의 무책임

안양시 냉천/새마을 주거환경개선사업지구나 부천 원미뉴타운지구와 같이 구역 지정의 위법성을 따져 구역 지정 취소 처분을 받은 지역도 있지만 구역 지정 단계의 소송은 다른 단계에 비해 많지는 않다. 이 단계에서는 주민들이 자신의 삶에 개발 사업이 미치게 될 영향을 충분히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리적 요건만 충족하는 경우 법적으로 문제 삼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는 노후불량 건축물 비율이 잘못 산정되었다거나 조례에서 정한 구역지정 요건이 상위법의 위임 범위를 벗어나 지나치게 완화됐다는 주장 등이 소송의 주요 내용이 되는데 이런 소송을 통해 정비구역 지정이 취소되기는 쉽지 않다.

결국 지방자치단체의 무책임한 구역 지정은 주민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만들지만 주민들로서는 이에 대응할 적절한 수단이나 절차를 갖지 못한 셈이다. 지방자치단체와 주민들 사이에는 정보 격차가 매우 크다. 주민들은 ‘재개발’에 대한 막연한 소문은 듣지만, 무슨 무슨 사업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얻기 어렵다.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알리지도 않는다. 지자체가 구역 지정을 추진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지나가는 경우가 태반이다. 지방자치단체는 주민들로부터 반대할 권리를 빼앗고 있는 것이다.

중림동 도시환경정비사업 구역 지정을 추진 중인 서울시 중구청은 “어차피 조합이 만들어져야 사업이 추진되는 것이니 조합이 설립되는 단계에 반대하시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조합 설립 단계에서는 세입자들이 의견을 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대개의 경우 개발 사업 추진을 주도하는 세력이 갖은 방법을 동원해 조합 설립 동의서를 받아내고야 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조합 설립 무효 소송이 많아지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한 번 구역으로 지정돼 개발 사업의 고삐가 풀리면 그 후로 몇 년이 걸리든 개발 사업은 추진되며 이 시기가 길어질수록 주민들 간의 갈등의 골은 깊어진다. 최근에는 이런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 일정한 기간 동안 사업이 추진되지 않는 정비예정구역이나 정비구역을 해지하는 ‘일몰제’ 도입이 정부 차원에서도 검토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나치게 많은 정비구역의 지정은 토지 가격을 상승시키는 악영향을 미치고, 구역 지정 이후 장기간 사업이 방치되면 오히려 개별 건축행위가 규제되어 주거환경 관리를 방해한다. 일몰제는 이런 문제를 해소하는 데에 일정 정도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개발 사업이 모든 주민들의 의사를 바탕으로 추진되어야 한다는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이 있지 않고서는 갈등이나 분쟁을 해소하기 어려울 것이다. 현재의 개발 사업은 모두에게 찬성과 반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한다. 법으로 정한 사업, 지자체가 구역 지정 요건에 맞춰 선택한 사업이 아닌 다른 ‘개발’의 가능성은 없다. 주민들이 주거환경이나 거주지에 대해 느끼는 아쉬움이나 개선의 필요성은 손쉽게 개발 사업으로 환원되어 버린다. 주민들이 겪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최적의 방안은 주민들과의 소통과 합의를 통해서만 찾을 수 있다.

반대할 권리를 넘어

주민들의 의견을 모으고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구조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것은 인권과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만들어져야 한다. 개발 사업은 주민들의 인권현실에 다양한 경로로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주민들의 사회경제적 상황이나 성별, 나이에 따라 서로 다른 영향을 받게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개발 사업 구역을 지정할 때에는, 물리적 요건뿐만 아니라 개발 사업이 미칠 수 있는 다양한 인권영향을 섬세하게 살펴야 한다. 또한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공공의 사업에 대해 직접 의견을 제시하고 결론을 도출하는 데에 참여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다. 개발 사업 역시 인권과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데서 출발할 때 비로소 주민을 위한 사업이 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공공의 책임성이 강화되어야 한다. 80년대 합동재개발 방식이 도입되면서 개발 사업은 시행자의 조합과 시공사인 건설사의 사적인 사업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개발 사업 때문에 피해를 입게 되는 사람들은 조합, 건설사, 지자체 어디에서도 책임지지 않는 무권리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용역업체 직원들의 폭력에 무방비로 내던져진 상태 역시 시작부터 이어진 것이다. 개발 사업으로 인해 발생하는 인권침해나 지역 공동체의 파괴를 ‘분쟁과 갈등’이라는 관점에서만 접근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도 그것이다. 개발 사업 구역 지정으로 개발의 첫 단추가 끼워지는 순간부터 형성되는 권력은 동등한 권리의 경합 따위를 허용하지 않는다. 권리를 박탈당하는 사람들은 ‘분쟁과 갈등’에 끼어들 여지조차 빼앗긴다.

잘못 끼워진 막개발의 첫 단추는 끄르고 나서 다시 끼워야 한다. 무분별하게 지정된 정비구역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 충분히 논의한 후, 주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참여할 수 있도록 개발 사업 제도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이때 강제퇴거금지법의 제정도 필수적이다. 건물의 철거는 개발 사업으로 훼손된 주민들의 삶과 마을의 역사를 확인시켜 주는 풍경일 뿐이다. 건물이 철거되기 전 개발의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우는 것을 더 이상 늦춰서는 안 된다.
덧붙임

미류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