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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리] 전자주민증과 감시사회, 강박적 신분확인 시대가 도래한다

바야흐로 21세기는 개성의 시대라고 할 만큼 개인들의 자기 주장이 강한 때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신분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없다. 국가가 일련번호를 찍어 '우리 국민'이라고 확인해주지 않는 한, 개인은 끈 떨어진 외톨이일 따름이다. 결국 신분증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다. 각기 전문 분야를 맡고 있는 관청들이 합심해서 인증해준 공권력, 이게 바로 우리 신분의 주인이다.
- 『너는 누구냐? : 신분 증명의 역사』, 발렌틴 그뢰브너 저, 김희상 역, 청년사, 2005, 357쪽.


전자주민증이 돌아왔다. 현재 국회에는 정부가 발의한 주민등록법 개정안이 올라가 있다. 이 법안 제24조(주민등록증의 발급 등) 제3항에서는 "주민등록증에 수록되거나 표시되는 정보는 전자적으로 수록할 수 있다"고 하였다. 내용은 매우 간단하지만, 이것이 '전자주민증'의 법률적 근거이다. 법안은 지난 7월 8일 입법예고되었다가 9월 14일 국무회의를 통과하였다. 정부는 올해 국회에서 법안을 통과시키고 2013년부터 전자주민증을 발급할 것이라고 한다. 전자주민증이 공청회 한번 없이 초스피드로 통과될 위기인 것이다.

전자주민증을 "돌아왔다"고 표현한 까닭은 이렇다. 이 신분증은 과거 정부가 도입하려다 포기하고 공식적으로 "백지화"한 사업이다. 1996년 김영삼 정부 하 내무부는 ①등초본 등 각종 민원서류 제출이나 신분확인을 손쉽게 하여 생활 편리 ②각종 증명발급건수 감소로 경비 절감 ③주민등록증 위변조 방지 등의 이유로 주민등록증, 의료보험증, 운전면허증, 국민연금증, 주민등록등초본, 지문, 인감 등 7개 분야 42개 정보를 통합 수록하는 내용의 전자주민카드 계획을 발표했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국민적 저항이 크게 일었고, 1998년 김대중 정부 들어 감사원의 특별감사를 거친 끝에 사업이 중단되었다.

당시 반대운동이 계속되었던 이유는 전자주민카드의 프라이버시 침해 문제 때문이었다. 전자주민증은 단순히 플라스틱 신분증을 IC 카드 신분증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IC 카드 신분증의 도입은 신분증 안에 개인정보를 전자적으로 집적하거나 이를 온라인으로 전송하는 계획을 의미한다. 개인정보가 한곳에 집중되거나 통신망을 흘러다니다 보면 정보유출의 위험이 증가함은 물론 권력기관에 의한 오남용의 가능성이 매우 커진다. 특히 3,500만개의 전자주민증과 연결되는 어마어마한 국가전산망은 행정부의 권한을 거의 무한대로 확장시킬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권력분립의 기초마저 무너뜨릴 우려가 있다는 것이 당시 전자주민카드 반대자들의 주장이었다. 결론적으로 보면, 지금 도입 예정인 전자주민증 역시 마찬가지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집중된 정보는 또한 쉽게 복제되고 유출된다. 사진은 현금인출기에 설치되어 있던 카드복제기(skimmer)를 제거하는 모습.<br />

▲ 집중된 정보는 또한 쉽게 복제되고 유출된다. 사진은 현금인출기에 설치되어 있던 카드복제기(skimmer)를 제거하는 모습.



국가와 신분증

신분증명제도란 무엇일까? 평생 맺는 인간관계가 직접 얼굴을 마주보며 이루어지던 옛날에는 내 얼굴 자체가 나였기 때문에 굳이 증명서가 필요 없었다. 그러나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고 인구 이동의 범위가 늘어가면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문서로 증명해야 할 필요성이 늘었다. 즉, 신분증은 본래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선별적으로 발급받는 '특권'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근대 국민국가가 발달하고 인구통제의 필요성이 증가하면서 신분증은 '특권'이 아니라 '의무'로 변신하였다. 국가는 점점 더 많은 국민에게 신분을 등록할 것을 요구하였고 전국민 등록체계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국가는 자신이 발급한 신분증을 가장 많이 요구하는 주체가 되었다. 근대 경찰의 기능이 바로 그것이었다.

"훌륭하게 정비된 경찰 제도의 주목표는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즉 모든 시민은 필요할 때면 언제 어디서나, 아 이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알아볼 수 있어야만 한다. 특히 경찰관이 그 신분을 알아볼 수 없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각자 늘 신분증(여권)을 소지하는 것이다." - 피히테, 1796

오늘날 국가의 신분확인 요구는 계속해서 늘고 있다. 간첩이나 테러범 색출이라는 이유로 신분증 제시를 요구해 왔으며, 멀리 갈 것 없이 당분간은 11월에 서울에서 열릴 G20 정상회의 개최를 이유로 신분확인 요구가 훨씬 강화될 것이다. 더 나아가 정부와 여당은 불심검문을 강화하고 신분확인 요구를 보다 수월히 하기 위해 「경찰관 직무 집행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끝없는 신분확인은 '사회 안전'을 명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사회 안전에 잠재적으로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개인과 집단을 배제하기 위한 과정일 수 밖에 없다. 결국 최근 국가의 신분확인 강박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인권의 가치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납세와 복지로 이루어지는 사회적 국가를 지지하고 이를 위한 신분등록제도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 모든 것이 경찰국가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전자주민증은 이러한 논란의 한가운데에 있다.

전자신분증과 인권

지금까지 신분증의 역사는 수기 발급과 육안 확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발급과 육안 확인 모두 일시적이거나 제한적이었다. 이 사람이 누구이고 이 순간 이 지점을 통과하기에 혹은 어떤 일을 하기에 필요한 자격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만 확인할 뿐이다. 물론 국가는 신분증을 단순하게 발급하는 데에서 끝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관청이 보관하고 있는 기록과 대조하고자 했고, 이 사람이 어느 순간 어느 지점 혹은 어떤 일을 하고자 했는지 기록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육안 확인과 수기 기록은 그러한 권력의 욕구를 충족하기에 충분한 기술적 수단이 되지 못하였다. 전자신분증의 도입은 이제 권력의 의지가 완벽하게 반영되는 기술이 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곧 완벽한 추적 기술의 등장이다. 전자적으로, 그리고 실시간으로 기록이 집적되고, 공유되고, 검색된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철두철미하게 기록되고 손쉽게 추적될 것이다. 완벽할 수 있는 기술이 등장하였으니 고유성 식별에 대한 강박도 더욱 강해질 것이다. 사람마다 고유번호를 부여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지문 등 고유한 신체 정보가 전자적으로 기록되고 확인되기 시작한다. 언젠가는 DNA 등 나의 내부를 직접 확인하는 신분증도 등장할 것이다. 전자신분증은 괴물처럼 정보를 먹으며 더욱 거대한 존재가 될 것이다.

전자주민증의 가장 큰 문제 역시 통합신분증으로서의 우려이다. 운전면허, 건강보험 등 갖가지 신분증이 전자주민증과 연계될 것이다. 운전면허, 건강보험 등의 개인정보를 통합적으로 수록하지 않더라도 연계키를 통해 온라인으로 식별하여 사실상 통합신분증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통합정보나 식별키 없이도 전자주민증의 온라인 인식만을 통해 통합신분증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이는 곧 우리가 주민등록증, 운전면허나 건강보험을 필요로 하는 모든 장소에서 이 전자신분증을 긁을 것을 요구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공공기관에서 신분을 확인한다는 이유로, 병원에서 신분을 확인한다는 이유로, PC방에서 나이를 확인한다는 이유로, 지하철에서 나이를 확인한다는 이유로, 온라인에서도 실명을 재차 확인한다는 이유로 계속 긁으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긁는 모든 정보는 온라인으로 전송되어 집적되고 관리될 것이다. 그 정보는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나 건강보험 등 필요한 제 목적에 사용될 수도 있지만 경찰 역시 주요한 수요자가 될 것이다. 자신이 아닌 다른 권력 기관을 위하여 전자 신분확인이 일상적으로 요구되는 사회, 그것은 진짜 전자감시사회이다.

2008년 촛불시위에서 시민을 짓밟는 경찰. 이런 경찰이 정보인권을 짓밟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br />

▲ 2008년 촛불시위에서 시민을 짓밟는 경찰. 이런 경찰이 정보인권을 짓밟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모든 신분증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전자주민증은 인권침해성이 매우 크다. 전자주민증의 전제인 주민등록제도 자체가 인권침해적이기 때문이다. 출생당시 부여되여 평생 변치 않는 주민등록번호, 17살에 강제되는 열손가락 지문날인, 그리고 국민이 신분증을 의무적으로 발급받도록 국가가 강제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인권침해이다. 정부가 주장하듯이 단지 표면에 주민등록번호와 지문이 보이지 않는다고 인권침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자주민증은 주민등록제도의 인권침해를 확대재생산할 것이다. 주민등록번호와 지문이 전자적으로 확인되고 온라인으로 전송될 것이기 때문이다.

전자주민증을 긁을 때 그 주인은 어떤 개인정보가 어떻게 전송되는지 알 수 없고 통제할 수도 없다. 전자주민증이 공공 뿐 아니라 민간에서 여러가지 용도로 사용되다 보면 지금 주민등록번호에 대하여 닥친 재앙이 전자주민증에서 재연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주민등록번호처럼 전자주민증의 정보가 인터넷을 떠돌 날도 멀지 않았다. 정부는 전자주민증의 보안 기술이 유출이나 위변조를 불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장담한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신분증에 대한 위변조가 늘고 이를 위한 암시장이 존재하는 것은 그만큼의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늘어가는 신분확인 요구만큼 그에 대한 수요 역시 비례해서 늘어갈 것이다. 그 앞에서 어떤 기술도 완벽할 수 없다. 개인정보는 전자주민증에서도 얼마든지 유출될 수 있다. 그 날에는, 우리의 개인정보가 더이상 개인정보로서 보호받을 수 없을 것이다. 개인정보의 권리가 완전히 무력해질 것이다.

신분 확인 강박사회가 오고 있다

일찌기 일망감시탑, 즉 <판옵티콘>의 창시자인 제레미 벤담(1748~1832)은 완벽한 신분확인 사회를 꿈꾸었다. 그는 18세기 말에 당시 작명 풍속에 대해 분통을 터뜨렸다고 한다. 도대체 그 수많은 스미스와 존을 어떻게 서로 구분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벤담은 완전히 새로운 작명법을 제안한다. 개인마다 도저히 혼동할 수 없는 그만의 독특하고도 유일한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이름과 생년월일과 출생지만으로도 신분확인이 확실하게 이루어지도록 만들자는 주장이다. 더구나 그 이름을 손목에 문신처럼 새겨두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이름을 몸에다가 그처럼 확실하게 묶어두면 새로운 도덕의 봄이 도래해서 법치가 바로 서며, 그 많은 악행들도 씻은 듯이 사라질 것이라고 벤담은 눈에서 빛을 뿜어냈다(그뢰브너 : 331).

벤담의 망상일 뿐인가? 신체의 일부를 내장하는 신분증을 넘어서서 신분증 자체를 신체에 아로새기는 그 날이 멀지 않았다는 불길한 예감은 나만의 것인가? 전자주민증은 강박적 신분확인 시대의 겨우 서막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전자주민증을 반대할 수 밖에 없다.

덧붙임

장여경 님은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