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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으로 말할 권리

표현할 자격? 표현할 자유!

장면1. 당신은 지금 다니고 있는 사립학교의 운영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부실한 급식과 물품 강매, 체벌을 비롯해 비인간적인 입시 위주 교육에 이르기까지 문제점을 모아 UCC를 제작하기로 했다. 조금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결국 양심의 목소리에 따르기로 했다. 다만 UCC를 만든 장본인이 알려져선 곤란하다. 학교에서 불이익을 받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일주일 밤낮을 꼬박 바친 끝에 드디어 UCC를 완성했다. 부디 이 고발이 사회 곳곳에 퍼져나가길 가슴 벅차게 기대한다. 어디에 올릴까? 학생들이 많이 보는 포털 게시판이 좋겠다. 그런데 글을 올리려고 클릭을 하는 순간, 다음과 같은 경고창이 뜨는 것이 아닌가. “실명확인을 하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습니다.”

장면2. 당신은 성소수자이다. 여론의 관심이 온통 대통령 선거에 쏠려 있는데 갑자기 법무부의 ‘차별금지법안’에 대한 논란이 불붙었다. 차별금지법에 대한 언론의 보도가 계속되었고, 인터넷언론의 관련기사마다 덧글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많은 덧글이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오해에 가득 차 있었다. 당신은 상처받고, 분통이 터진 끝에, 마침내 직접 글을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는 성소수자입니다. ……” 진심을 담아 덧글을 썼지만 아직 커밍아웃을 할 때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필명을 입력하고 ‘글올리기’를 누르는 순간, 경고창이 뜬다. “실명확인을 하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습니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실명을 써야만 표현할 자격이 있다고 말할 것인가? 우리는 지금 국가가 나서 실명 사용을 강요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터넷 검열 중단하라 (출처 : http://freeinternet.or.kr)

▲ 인터넷 검열 중단하라 (출처 : http://freeinternet.or.kr)


스스로 검열하도록 하는 것

현재 규모가 좀 있다할 포털, 인터넷언론, UCC사이트는 상시적으로 실명 인증을 하고 있다. 포털뿐만이 아니다.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하면 모든 공공기관 사이트에서도 주민등록번호를 제시하고 실명을 확인받은 사람만이 글을 쓸 수 있다. 특히 지금은 선거운동기간으로서 공직선거법에 의해 모든 인터넷언론에 실명확인이 의무화되고 있다. 웹하드, P2P 사이트로 실명제가 확대될 조짐도 보인다.

실명제 도입의 명분은 ‘실용’이다. 악플을 방지하기 위해, 허위사실 유포를 막기 위해, 후보자 비방을 차단하기 위해 도입한다고 했다. 하지만 실명제가 실제로 악플을 줄이는데 기여했는지는 알 수 없다. 실명제 도입 후 덧글 자체가 확 줄었기 때문이다. 주요 인터넷 서비스에 의무적인 실명제가 도입된 2007년의 대통령 선거는 2002년과 비교하여 네티즌의 활동이 눈에 띄게 줄었다는 것이 중평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중대한 인권침해가 있다. 사람들이 글을 올리는 것을 망설이거나 포기하게 되는 상황 말이다. 예전에 국가가 검열하는 방식은 언론·출판·예술이 발표되기 전에 그 내용을 검사하고 허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매순간 셀 수 없이 많은 표현물이 발표되는 인터넷에서 사전 검열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최근에 사용되는 방식은 사람들이 스스로 검열하도록 하는 것, 바로 ‘위축’이다. 국가가 국민의 의견 발표를 위축시키는 것은 중대한 표현의 자유 침해이다.

특히 소수의견이기 때문에, 편견 때문에, 불이익을 받을까봐, 개인정보 침해의 우려 때문에 의견을 밝히기를 꺼리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공간이 점점 줄어가고 있다. 모든 인터넷 게시판에 실명으로 글을 쓰도록 하는 것은, 이들에 대한 차별이다.

권력이 꿈꾸던 완벽한 통제

가장 큰 문제는 인터넷실명제가 수사기관의 편의를 위해 도입되었다는 점이다. 실명제는 수사기관이 이용자를 손쉽게 추적할 수 있도록 사전에 주민등록번호와 실명을 제출받는 제도이고, 제출에 응하지 않는 국민은 의견 발표에 제약을 가하는 규제이다. 이때 인터넷을 이용하는 모든 국민이 허위사실을 유포하거나 후보자를 비방하거나 악플을 올릴 것이라고 전제하는 것은 물론이다. 즉, 실명제는 ‘자기 주장에 대해 떳떳하라’는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권력이 범죄 단속이라는 명목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것을 어느 정도까지 허용할 것이냐는 문제인 것이다. 한미FTA 지적재산권 협정에서 논란이 되었듯이 불법소프트웨어를 다운로드 받은 이용자를 추적하기 위해 실명제가 확대된다면 이제 그 편의는 한국의 수사기관뿐 아니라 다국적 저작권업체들로 확대될 것이다.

물론 인터넷이라고 하여 모든 표현물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폭력적 표현물이 용납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에 대한 사회적 규제가 검열과 감시여서는 안 된다. 인터넷에서의 수사는 현실 공간에서와 똑같이 이루어져야 한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 사후에 책임을 지도록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누가 언제 범죄를 저지를지 모르니 모든 국민이 주민등록증을 가슴팍에 붙이고 다니라는 것은 답이 아니다.

인터넷실명제를 거부하며 저항하는 인터넷언론들이 있다. (출처 : http://freeinternet.or.kr)

▲ 인터넷실명제를 거부하며 저항하는 인터넷언론들이 있다. (출처 : http://freeinternet.or.kr)

주민등록번호를 제출하지 않으면 자신의 의견을 발표할 수 없는 일이 인터넷에서 벌어질 수 있는 것은, 인터넷이 특별히 무법천지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터넷이 그러한 권력 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기술적 규제는 사람보다 완벽하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피감시자의 저항을 누그러뜨린다. 이것이야말로 오랫동안 권력이 꿈꾸던 완벽한 통제가 아니겠는가.

익명이 범죄시되는 사회 속에서 인권은 기대할 수 없다. 실명 확인의 강박 속에 용기있는 발언이 사라지고 민주주의는 후퇴할 것이다. 특히 수사편의를 명분으로 확대되는 실명제는 경찰국가의 부활을 가져올 것이다. 아무리 인터넷 실명 확인이 우리 생활에서 흔한 일이 되었다 하더라도 이것이 참으로 기괴한 인권침해라는 점은 분명하다. 올해 총선에도 실명확인시스템 설치를 거부하며 저항하는 인터넷언론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이 가장 큰 증거이다.
덧붙임

장여경 님은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