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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손쓸 방법 없는 주민등록번호 도용

개인정보는 무관심한 빅브라더



최근 국방부에 민원을 제기할 일이 있어서 게시판을 이용하다가 뜻밖의 사실을 확인했다. 몇 달 전 누군가 행정부에서 담당하는 <참여마당신문고> 게시판에 내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해 글을 올렸던 것이었다. 그(녀)는 기상청 민원게시판에 내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해서 버젓이 글을 게재했다.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동일인으로 추정되는 그(녀)는 여러 사이트에 내 주민등록번호로 이런저런 ‘활동’을 버젓이 하고 있었다.

내 주민등록번호로 글을 쓴 그(녀)는 어디에

정보인권의 중요성을 누구 못지않게 인식해 세심하게 보호해왔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겪은 개인정보 침해 수준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 결코 경미하지 않은 듯했다. 이후 여러 관련기관에 문의해, ‘개인정보보호법’이 발효·시행됨에 따라 피의자를 신고할 수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하지만 사건을 정식으로 신고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았다. 개인정보를 침해한 이를 신고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물증을 직접 확보해야 했다. 비교적 유명하다는 신용정보회사에 유료회원으로 가입한 뒤 내 주민등록번호가 사용된 인터넷 기록을 샅샅이 뒤져야 했다. 그러자 내가 들르지 않은 여러 사이트가 이내 눈에 띄었다. 개중에는 포르노그래피 사이트보다는, 다소 황당무계하게 국회나 만화구독, 쇼핑몰 등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 피의자는 신용정보회사조차 검색할 수 없는 아이피 주소로 접속하는 등의 용의주도함을 보였다.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가장 유명하다는 그 사이트가 추적할 수 있는 개인정보침해 사례는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결국 나는 또 다른 신용정보회사에 유료회원으로 가입한 후 다시 한 번 검색해야 했다. 그러자 이전의 사이트에서는 아예 검색되지 않은 여러 사이트가 게시됐다. 문제는 여러 신용정보회사에 유료로 가입할지라도, 100% 자신의 주민등록번호가 등록된 사이트를 검색할 수 없다는 한계였다.

가해자를 찾기 위해 요행을 기다리는 수밖에

앞서 언급했다시피, 개인정보침해가 발생한 사이트 목록은 대부분 피의자가 아이피주소를 조작하기 때문에 무용지물의 자료에 불과했다. 정보인권침해자의 추적이 어렵다는 내용을 정리해서 며칠 후 경찰서를 직접 찾았다. 경찰은 정작 수사능력에는 중차대한 한계를 지닌 것 같았다. 일단 신고할 수는 있을지언정 이 정도의 증거로는 범인을 잡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설명을 했다. 다시 말해, 국내에서 포착되지 않은 아이피로 접속하고, 대부분 허위정보로 게시판에 회원가입을 하기 때문에, 범인의 실마리를 포착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고 했다. 실제로 사이버범죄수사대는 다른 범죄자와 달리 어리벙벙하게 행동한 중학생 한 명을 잡은 성과가 그동안의 실적의 전부라고 토로했다.

어차피 잡을 확률도 그다지 없는 가해자를 신고하기 위해 조퇴까지 한 나로서는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수사력이 지극히 부족한 경찰과 나름대로 용의주도함을 발휘하는 가해자 사이에서, 마냥 운 좋게 가해자를 찾는 요행을 바라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일벌백계로는 해결할 수 없어

나는 기상청 민원게시판에 개인정보를 침해해서 게시된 글을 즉각 삭제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참여마당신문고에 올라간 글을 완전히 삭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황당무계한 답변을 듣게 되었다. 그나마 게시된 글의 열람 정도를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또 다시 증거를 모아서 관련기관에 제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경찰서 민원실에서 사건수사의뢰서를 발급받은 후 그것을 신분증 사본과 더불어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경찰서에서는 직접 방문해야만 사건수사의뢰서를 발급할 수 있다는 답변을 들었다.

이러한 과정은 내가 몇 주 간 겪은 일의 요약이다. 나는 일련의 주민등록번호 도용사건과 신고과정을 접하면서 일종의 무력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런 사건의 궁극적인 해결책은 가해자를 색출해서 일벌백계로 처벌하여 재범 방지를 꾀하고, 나아가 정보인권을 강화하는 법을 강력하게 집행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전대미문의 힘을 지닌 주민등록번호

주민등록번호제도는 2005년 11월 한국의 첫 빅브라더상 시상식에서 이미 '가장 끔찍한 프로젝트상'을 수상한 바 있다.

▲ 주민등록번호제도는 2005년 11월 한국의 첫 빅브라더상 시상식에서 이미 '가장 끔찍한 프로젝트상'을 수상한 바 있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유례가 드물 정도로 국가가 개인정보를 마구잡이로 움켜잡고 있다. 요즘 한국인들은 지갑을 잃어버리면 금전적인 손실과 각종 카드를 재발급해야 한다는 번거로움 못지않게, 자신의 개인정보가 부정적으로 사용될 가능성을 걱정하는 측면이 더욱 강하다. 그도 그럴 것이, 주민등록증을 습득하면 소지자의 얼굴, 나이, 실명, 생물학적인 성, 현거주지와 거주지 변동사항, 출신지역 등을 모조리 알 수 있다. 단지 이러한 정보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는 분실된 주민등록번호를 통해 더욱 광범위하게 개인정보가 유출·악용된다.

한국에서 거주하려면 거의 모든 활동을 할 때 주민등록번호가 필요하다. 이렇게 전대미문의 힘을 지니고 있는 개인식별번호가 단 한 종류라는 사실은, 행정당국이나 우리에게 일말의 편리함을 줄지 모른다. 행정편의주의 말고도, 국민 개개인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주민등록증만 소지하고 있으면 대한민국 어디에서나 다양한 신분확인절차를 쉽사리 할 수 있다는 이점을 호소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만큼 가공할 만한 위험요소가 산적하다는 점도 뜻한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사람은 정보인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향해 소심하고 ‘선진국스럽다’고 비난한다. 괜한 일에 과민하게 신경을 쓴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실제 피부로 느끼지는 못할지언정, 개인정보침해범죄를 당할 확률이 결코 적지 않은 한국에서 살 때 필요한 최소한의 자기보호의지는 아닐까. 우리는 종종 거대기업에서 개인정보를 불법적으로 유출하거나, 그것을 이용해서 이윤을 얻으려고 한다는 보도를 접한다. 몇 년 전 대학도서관에서 분실된 주민등록증을 이용해서 유영철을 두둔하는 글을 포털사이트에 여러 차례 올렸다가 구속된 이도 있었다.

숱한 개인정보침해사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경찰은 실질적인 수사력이 부족하고 개인정보보호법은 화석화된 조항에 그치고 만 현실에서 그 누가 안심하고 살 수 있을까. ‘빅브라더’가 국가라는 권력을 이용해서 전 국민의 주민등록제도를 운영한다면 양심과 책임감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피해자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야 하고, 유료로 운영되는 사이트에 가입해야만 최소한의 자기보호를 할 수 있다는 점이 과연 정당한가.

국가는 자신들이 거대하게 지니고 있는 무수한 사람들의 개인정보를 세심하게 관리해서 안전함을 느낄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지금의 주민등록제도를 없애고, 유럽 국가들처럼 병원진찰이나 전입, 군복무, 참정권, 고용 시에 각각 다른 새로운 아이디를 발급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좀 더 불편하게 살 지라도 개인의 정보인권을 소중하게 여기는 의식을 국가와 개개인이 지녀야 할 것이다.

덧붙임

박정준 님은 서울대 비교문학 박사과정에 재학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