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오름 > 인권연구_창

[인권연구_창] 연대 사상의 역사 (2)

서유럽 정치에서의 연대 사상

‘연대’는 인권운동의 주요한 실천양식이자 권리로서 주창되고 있다. 누구나 ‘연대’가 중요하다고 부르짖는다. 그런데 그 연대는 무엇을 목적으로 누구와 함께 하는 것이며 어떤 정책과 제도로 구체화되는 것인가는 모호하다. 자유, 평등, 연대는 어떻게 조화되는 것인가에 대한 논의도 마찬가지다. 개인주의의 증대, 연대를 보장할 수 있는 제도의 결여 속에서 심화되는 경제의 지구화, 빈부의 극심한 격차 등으로 연대에 대한 숙고와 실천이 더욱 요구되는 때이다.
이런 숙고와 실천에 참고가 될까 하여 유럽에서의 연대사상의 역사를 다룬 책의 내용을 3차례에 걸쳐 요약 소개한다. 필자는 연대의 기초가 되는 것은 무엇이며,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어디까지를 연대의 대상으로 포괄하며, 개인의 자유와 연대와의 충돌을 어느 정도 고려하는지에 따라 다양한 연대 사상을 분석하고 있다.
(출처: Steinar Stjernø, Solidarity in Europe: The History of an Idea, Cambridge, 2004)

<글 싣는 차례>

(1) '연대'의 세 가지 전통
(2) 서유럽 정치에서의 연대 사상
(3) '연대'의 현재의 위기


<Solidarity in Europe> 책 표지<br />
<출처 www.cambridge.org>

▲ <Solidarity in Europe> 책 표지
<출처 www.cambridge.org>

필자는 북·서유럽의 8개 사민주의 계열 정당의 강령을 중심으로 연대 사상의 변화를 분석한다.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및 영국의 정당들이다. 필자는 영국 노동당을 ‘연대’에 관한 한 유럽 사민주의의 예외로 다루고 있다. 자유주의 전통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연대 개념이 자리할 구석이 없었다고 분석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7개 정당들은 초기에는 노동자 계급 중심의 연대 사상을 취했다. 이것은 다양한 계기를 통해 타 계급을 포괄할 뿐 아니라 제3세계의 인민, 미래세대, 이주자와 소수민족을 포괄하는 연대로 확장‧전환되었다. 그리고 ‘연대’는 연설문에서나 가끔 수사어구로 쓰이던 수준에서 당 강령의 핵심적인 사상과 기본 원칙으로 고양되게 된다. 이 과정은 국가에 따라 20년에서 50년의 세월이 걸렸다. 연대 사상을 가장 먼저 반영하고 발전시킨 것은 스칸디나비아의 사민당이었고 가장 늦은 곳은 남유럽이었다.

전개 과정

1차 세계대전이 있기까지, 대부분의 사민당들은 전통적인 노동계급의 연대 개념을 고수했다. 즉, 연대는 노동자들의 공통된 이해에 기반해 다른 노동자와의 동일시와 일체감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가오는 전쟁의 그림자는 국제적 노동계급의 단결을 불확실하게 했다. 한 국가의 노동자들이 타국의 노동자들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가능성은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전쟁의 위협이 커질수록 연대의 호소도 늘어갔다. 사민당들은 군비와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과 ‘타국의 노동자와 연대할 의무’를 외쳤지만 노동자가 자국 정부 편에 서서 전쟁에 나서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로 인해 서로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내부 투쟁이 벌어지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와 정신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고, 어느 정도 이전의 정치적 및 사회적 갈등을 누그러뜨렸다.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기독민주주의자,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가 저항(레지스탕스)운동에 함께 결합했기 때문이다. 전후 재건과 경제 성장의 필요성 앞에서 계급투쟁은 대부분의 사회주의 지도자들에게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전쟁 전에 작동했던 탈급진화 과정을 강화했다. 빠른 재건과 생활수준 향상을 위한 협력이 긴요했다. 계급투쟁과 계급연대 같은 개념은 이전보다 어색하고 부적절하게 여겨졌다. 이 점이 당 강령에 반영되면서 ‘연대’는 이제 획득돼야 할 의미가 됐다.

이와 동시에 사민주의 정당은 선거에서의 지지를 확대했다. 정권을 잡은 사민주의 정당이 당면한 도전은 국가경제 성장과 국가의 재건이었다. 반면 야당에 머무른 사민당들에게 도전은 정치적 고립을 뚫고 선거에서의 지지를 늘리는 것이었다.

사민당들이 1951년 독일에서의 신 인터내셔널 회의에서 만나서 채택한 최종 결의안은 이 두 과제를 아우른 것이었다. 모든 임금 노동자의 연대에 호소했고 파시스트 독재하의 모든 민족들의 연대를 선언했다. 연대는 불명료하기는 하지만 뭔가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됐다. 결의안은 경제성장을 자극하기에 중요한 물질적 인센티브를 언급했을 뿐만 아니라 공동선을 위해 함께 일할 때 생길 수 있는 공동체 정서와 연대, 노동 노력에 대한 개인의 만족을 언급했다. 그러나 제3세계의 피억압 민족들과의 연대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영국과 프랑스가 거대한 식민 권력이라는 사실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신 인터내셔널 강령은 당시 사민주의 정당들의 이데올로기적 분위기를 반영했다.

이러한 전개는 이 시기의 사회‧정치적 맥락에서 이해돼야 한다. 1950년대와 1960년대는 자본주의의 ‘황금기’였다. 경제는 급속하게 성장했고, 실업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인구의 대다수에게 생활수준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리라는 전망을 안겨주었다. 케인즈주의 경제 이론은 사민주의 정당에 경제적 변동을 조정할 도구를 제공했다. 많은 국가들에서 고용주와 노동조직 간의 암묵적 또는 명시적 합의는 임금 요구가 이윤과 투자를 잠식하지 않는 한도 내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수의 증대는 사회개혁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정권에 관심을 가진 사민주의 정당들은 뛰어난 경제적 전망을 위태롭게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의회의 다수를 모으기 위해 새로운 선거 동맹을 취해야 했다. 사회민주주의는 구조개혁을 포기했고 그 대신 생활수준의 향상과 생활의 위협에 대한 더 많은 예측가능성과 보장을 만드는 사회개혁을 받아들였다.

여당에게 있어서, 이러한 진전과 합의의 분위기에는 계급투쟁과 결합되고 노동계급에만 집중한 연대사상의 여지가 없었다. 정권에 대한 야망을 가진 당들은 산업 노동계급보다 더 큰 부문의 인구를 포용해야 했다. 이전에는 농민이 중요한 잠재적 동맹이었다면, 이제 정치적 이해는 공사 부문의 새로운 화이트칼라 집단으로 전환돼야 했다. 노동계급이 어떻게 정의되느냐와 무관하게, 사회주의 지도자들에게 점차 다급해진 것은 노동계급의 구성원으로 간주되지 않는 사회적 범주에 대한 당의 호소를 확대하는 것이었다. “사민주의의 목적은 선거에서 다수를 획득하는 것이므로, 연대의 정의는 ‘계급’이 아닌 ‘인민’을 다뤄야 한다”, “노동자 연대는 사회적 연대로 확대돼야 한다”는 발언들이 대표적인 지도자들에게서 나왔다.

1945년부터 1968년의 학생봉기까지 사민주의 강령에서 연대의 개념은 더욱 포괄적이 됐다. 연대는 이제 억압받고 권리가 없거나 차별받는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사람들과의 동일시를 의미하게 됐다. 제제3세계 국가의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제3세계 민족들이 연대 개념에 포함됐다. 여성, 장애인, 인종적 및 성적 소수자가 대안의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과의 연대에 포함돼야 했다. 다른 한편 학생봉기는 ‘일치성’에 저항하는 투쟁과 부모세대로부터 독립된 자신의 개성을 발전시킬 권리 투쟁을 표현했다. 따라서 학생운동의 가치는 한편으론 집단적 연대를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론 개인의 자유, 자아실현, 개인의 정체성의 발전을 강조하는 일면 모순돼 보이는 요소를 조합했다. 많은 사민주의 지도자들에게 이것은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1968년의 문화적 변화에다가 석유파동이라는 경제적 위기가 부가됐다. 2차 대전 이후 오랜 호황은 끝났다. 실업이 늘어나고 복지삭감이 논의되고 실행됐다. 1980년대에는 위기가 심화됐다. 시장 이데올로기와 개인주의가 지배적이었고 사민당은 정권에서 물러나야 했다. 1989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는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불확실성을 심화시켰다.

이 속에서 새롭고 급진적인 언어의 필요성에 부응하여 복지의 보존과 개혁 둘 다에 이용될 수 있는 언어, 사민당의 정치력 확대를 위한 구호로서 ‘연대’가 재발견된다. 예전처럼 연설문에나 가끔 쓰이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당 강령의 기본원칙으로 ‘연대’가 천명된다.

제3세계와의 연대

필자에 따르면, 사민주의 정당에서 연대의 채택과 확대는 상당 부분 선거 전략이었다. 그런데 선거 전략에 별로 유효할 것 같지 않은 내용도 있다. 제3세계와의 연대가 그런 부분이다.

고전 맑스주의 연대 개념은 국제적이었고 국경을 초월하는 노동자 연대를 언급했다. 초기국면부터 사회주의 정당은 국제 문제에 몰두했고 국제협력, 국제적 계급의식, 지도원칙으로서 외국 문제에서의 반군사주의에 대한 신념을 일찍이 채택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독일사민당은 1905년 서남아프리카에서의 봉기를 상대로 한 독일의 전쟁을 지지하길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7년까지 제2 인터내셔널은 식민지 착취를 염려하지 않았고,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일부 예외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식민 정책을 비난하지 않았고 심지어 1914년까지 그것을 지지했다.

식민지도 또한 민족 자결권을 누려야 한다는 레닌의 견해는 식민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을 열었다. 공산당과 제3 인터내셔널은 식민주의에 맞선 투쟁에 일찍이 참여했고 제3세계 국가들의 자치를 지지했다. 이것이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충성의 표현이었는가 아니면 연대의 표현인가가 논쟁 지점이다. 사민주의 진영이 된 사회주의 정당들은 식민 체제를 지지했고 제3세계 민족들의 독립에 저항했다. 비록 그들이 자주 식민지 인민의 생활 조건에 대한 공감을 표시하기는 했지만. 이런 점에도 불구하고, 당 강령은 그 문제를 연대 사상과 결부지어 언급하지 않았다. 제3세계와의 연대 사상은 그 개념이 사민주의 개념으로 변형된 때인 20세기 후반부까지 사민주의 정당들의 강령에 제도화되지 않았다. 이때가 돼서야 연대 개념은 노동계급만이 아닌 계급과 집단을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됐고 연대의 기초는 이해(interest)로부터 보편적 연민으로 재표현됐다. 이런 상황에서 제제3세계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인민을 포함하려는 조치는 당연했다.

사민주의 정당들이 권력을 잡게 되자, 사회연대주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실천이 이런 점에서 동떨어지게 됐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사민주의 정당들은 식민지에 국가 자치가 부여돼야 한다는 것을 마지못해 수용했다. 영국 노동당은 2차 대전 이전에는 반식민지 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지만 전후 정권을 잡게 됐을 때는 덜 급진적이었다. 노동당 정부는 인도와 파키스탄에 독립을 부여했지만 아프리카에 대해 그렇게 하는 것은 주저했다. 프랑스 사회당(SFIO)은 인도차이나 전쟁에 일정한 책임이 있고, 알제리 독립에 맞서 싸웠고 1956년 이집트 침공을 지지했다. 다른 사민주의 정당들은 알제리 전쟁에서 프랑스를 지원했고 또한 베트남 전쟁의 처음 몇 년간 미국을 지원했다. 반면 제3세계 인민들을 연민의 눈으로 흔히 바라봤고 생활조건 향상의 필요성이 당 강령에서 강조됐다.

노르웨이 노동당(DNA)은 빈국과의 관계에 대해 연대의 언어를 사용한 선두주자였다. 1951년, 인도 남부에서 개발 프로그램에 착수했을 때, 이것은 세계의 결핍과 빈곤에 대한 진정한 관심의 표현이었다. 동시에 당 지도부는 이것을 재무장에 대한 지출의 증가로부터 ‘인민에게 긍정적인 것을 주는’ 것으로 관심을 돌릴 기회라고 봤다. 1953년 강령은 국가간 경제적 격차를 메울 필요성을 선언했고 유엔이 ‘진정한 국제연대의 중심’이 되길 원했다. 독일에서 고데스베르크(Bad Godesberg) 강령은 독일과 ‘미발전’ 국가간의 관계에서 연대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이어진 기간 동안, 스웨덴과 덴마크의 사민주의 정당들은 강령에 유사한 표현들을 도입했다. 하지만 남유럽의 사회당과 공산당은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까지 이같은 일을 하지 않았다. 1960년 무렵부터 1980년대 초까지 제3세계와의 연대 개념은 당 강령에서 현대 사민주의 연대 이데올로기의 일부가 됐다.

선거의 고려가 이런 발전에 이바지한 것은 거의 없다. 이 측면의 연대의 포함은 자기 이해에 관한 생각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빈곤한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곤궁에 대한 이타적 연민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논의할 수 있는 점은 이런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실천 간의 간극이다. 부국으로부터 제3세계 국가로의 지원은 GDP의 1%에도 미치지 않았고, 교역 조건은 제3세계의 이익을 위해 어느 정도라도 바뀌지 않았다.

다음 세대, 자연 및 인종적 소수자

1970년대 초, MIT 보고서 ‘성장의 한계(The Limits to Growth)'가 산업과 경제 성장이 생태와 지구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논쟁을 야기했다. 1980년대, 녹색당이 일부 국가에서 설립되거나 녹색 사상이 기존 정당에서 영향력을 얻었다. 1986년 유엔 환경발전위원회(the Brundtland Commission)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핵심 구호로 해서 경제성장과 그것이 환경과 자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고려를 결합시킨 발전의 필요성을 규명하기에 착수했다. 환경문제는 사민주의 정당의 강령에서 점차 더 많은 관심을 받게 됐다. 지구 온난화와 재생불가능한 자원의 이용이 미래 세대와의 연대를 요구한다는 사상이 점차 당 강령에 반영됐다.

같은 기간, 실업이 또다시 중요한 문제가 됐다. 1973년 석유 위기 이후, 실업은 치솟았다. 1970년대, 스칸디나비아 사민당들은 ‘연대주의 임금 정책’이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연대주의 임금 정책’이란 안정된 고용의 고용자들이 임금 요구를 억제함으로써 실업자와 연대를 표현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실업, 늘어가는 난민, 조금 후에는 발칸에서의 전쟁으로 인해 인종적 다수자와 소수자간의 관계가 뜨거운 이슈가 됐다. 이런 변화들이 사민주의 정당의 강령에 점차 반영됐고 어느 정도는 연대의 개념에서도 그랬다.

사민주의 정당들이 이런 집단과 양상(미래 세대, 자연, 이주자, 난민 등)을 연대 개념에 포함하기 시작하자 제대로 갖춰진 포괄적인 연대 개념이 발전했다. 일반적으로 당 강령의 연대 개념이 이들 집단 또는 양상을 포함하기 위해 확대된 것은 20세기 막바지 수십년 동안이었다.

덴마크의 사민당이 최초로 환경 문제가 연대의 문제에 포함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1977년 강령에서 강조됐다. 다른 정당들도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에 이를 따랐다. 하지만, 사민주의 정당들은 일반적으로는 주저하거나 신중했다. 일반적으로 생태에 관한 것과 미래세대를 위해 환경을 보호할 필요성을 강령에 포함하는 반면, 이것을 경제성장의 필요성과 늘어나는 실업과 조심스럽게 균형을 맞추려 했고, 아주 가끔씩 환경 문제를 연대의 문제로 강조했다.

당 강령에서 연대에 포함된 마지막 집단은 인종적 소수자, 난민, 이주자로 보인다. 사민주의 정당들은 이주자와 난민의 상황을 강령의 이슈로 삼았지만 1990년대까지는 이것이 연대의 문제로 표현되지 않았다. 덴마크와 스페인의 사민주의자들이 처음으로 1990년대 초 강령에서 그렇게 했고 대부분의 다른 사민당들은 몇 년 내에 선례를 따랐다.

선거의 고려가 아마도 계급으로부터 인민 또는 국가로의 확장을 설명할 수 있다. 연대와 복지국가 개념간의 연결을 마찬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지만 제3세계와 이주자와의 연대 주장을 선거의 이점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들 문제는 당 유권자간에 매우 논쟁적이어서 유권자간에 잠재적 득실을 평가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집단과 이슈를 포함한 것은 두가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모든 억압받고 차별받고 또는 결핍된 집단과의 연대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보편적 휴머니즘과 이타적인 연대개념의 표현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또하나는 타협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 한편으론, 좌파의 비판가들을 좀더 만족시키면서 당 강령에서 연대를 선언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론 그런 연대를 실제로는 아주 제한된 정도로 하는 정책을 이행하는 것이다. 제3세계에 대한 원조를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고 이민을 제한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이런 방식은 우파의 비판을 야기하지 않는다.

연대의 개념은 역사의 진행과 사회적 상황에 따라 변화되어 왔다.<출처; www.cyberunions.net>

▲ 연대의 개념은 역사의 진행과 사회적 상황에 따라 변화되어 왔다.<출처; www.cyberunions.net>


현대 사민주의 연대 개념

사민주의 정당들이 자신들의 연대 개념을 지속적으로 보다 포괄적인 것으로 만들어왔다는 것을 살펴봤다. 고전적 연대 개념과 구별되는 현대 사민주의 연대개념을 필자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첫째 유럽 사민주의 정당들의 연대 개념은 노동자만이 아니라 여타 집단, 그리고 다양한 문제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돼왔다. 연대의 기초는 ‘(자신 또는 자기 집단의)이해’가 아닌 ‘윤리, 휴머니즘, 공감과 연민’으로 보인다. 연대의 목적은 사회주의의 실현에서 공동체 정서의 창조, 사회통합, 위험의 공유로 변했다.

둘째, 연대는 ‘동질성’에 기반한 것으로부터 ‘차이’의 수용에 기반한 것으로 변했다. 연대는 상이한 계급, 상이한 성, 다양한 연령 집단과 세대와 인종을 포함해야 한다. 사민주의 연대가 노동계급과 중산층만이 아니라 상위 계급을 포함해야 하는가의 정도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확실한 점은 상위 계급이 특권을 덜 가진 사람들과 연대를 행사할 것이 기대된다는 것이다. 현대 사민주의 개념은 계급 이해보다는 윤리와 도덕에 기반해 있다.

셋째, 현대의 연대 개념은 ‘상호의존성’을 강조한다. 생산과 경제에서의 협력의 필요성이 고용주와 피고용인 간의 상호의존성을 창조한다는 주장이다. 양쪽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결과는 경제 성장의 축소와 봉급의 더 적은 증가와 복지 국가를 유지 또는 발전시킬 자원이 더 적어지는 것이다. 여기서는 고전 사회학자 뒤르케임의 유산이 분명하며 일부 사민주의 이론가들은 분명히 뒤르케임과 유사하다.

넷째, ‘이해’의 개념이 재정의됐다. 연대는 ‘자기이해’와 ‘통찰'에 기반한다. 이기적인 자기 이해가 아니라 계몽된 자기 이해를 말한다. 이러한 이해와 통찰은 아프고, 실업이고, 장애이거나 노령일 때 모든 사람에게 공통의 준비된 것을 제공하는 것이 모두에게 최상이라는 것을 알고 지지한다. 또한 자기 이해는 사회적 약자와 빈곤한 이들에 대한 공감과 연민, 자원을 공유하고 개인의 추구를 제한하려는 의지와 자기 구속 등을 만들어낸다. 전체로서의 사회와의 동일시와 자기 구속은 개인들이 사회통합을 해치는 방식으로 자기 이해를 추구하지 못하도록 한다. 최종적으로, 공동체와 집단적 합의가 사민주의 연대의 핵심 요소이다. 연대는 공통의 프로젝트를 통해 힘을 갖는 ‘함께함’과 ‘협력’을 의미한다. 개인의 행위로는 충분치 않기 때문에 집단적 프로젝트는 필수적이다.

다섯째, 연대의 목적이 재정의됐다. 고전적 개념의 연대의 목적은 투쟁을 강화하고 개혁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투쟁의 무기로서의 전통적 연대 사상은 일반적으로 20세기 후반부에 사민주의 강령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 당의 강령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오늘날 이것은 현대적 개념의 성격으로 희미해졌다. 대신해서 보편적인 공동체 정서를 발전시킬 필요성과 사회통합의 필요성이 강조된다.

여섯째, 일부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현대 사민주의 연대 개념은 고전 개념보다 포괄적이다. 일반적으로 연대의 한계는 표현되지 않는다. 오늘날 연대 개념은 인구의 대다수, 사회적 약자, 주변부화되거나 가난한 사람들(자국에서나 제3세계 빈국에서나)을 포함한다. 강령 작성자들이 남성이 여성과의 연대를 행사해야 한다는 요구를 피하는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성(gender) 문제는 이제 연대라는 용어로 흔히 표현된다. 연대는 또한 세대간 관계와 환경 문제를 포함해야 한다. 최근에 일부 강령에서는 인종적 다수자와 소수자간의 관계를 또한 연대에 포함시키고 있다.

마지막으로 고전적 및 현대적 연대 개념에서 집단 지향성은 둘 다 약화됐다. 20세기 후반부에, 집단과 개인 간의 관계에 대한 관심이 당 강령에서 출현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그들은 개인의 자유와 사회에서의 집단적 연대 간의 딜레마를 수용한다.

따라서 사민주의 연대의 개념은 더 이상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에 대한 투쟁, 부의 급진적 재분배 또는 사회 상위 부문의 특권에 대한 위협과 결합되지 않는다. 사민주의 연대 개념의 핵심적 구성요소를 꼽아본다면, ‘사회문제에 대한 집단적 해결을 추구하는 것’, ‘사회복지에 대해 국가에 책임을 주는 것’, ‘가장 결핍되고 차별받고 억압받는 이들에 대해 공감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 정치에서 의미하는 바는 아주 명확하지 않다. 다음에는 사민주의 연대 개념과 경쟁하는 또다른 연대 개념과 현대 사회에서의 연대의 ‘위기’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덧붙임

류은숙님은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