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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 주춧돌 삼아 건설된 성역 지키기

인권위 차별금지법 제정 권고, 재계 맹공격 나서

25일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조영황, 아래 국가인권위)가 차별금지법안을 발표하고 정부에 입법을 권고하자, 재계와 보수언론이 총동원돼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그들은 무엇을 두려워 하고 있는가.

국가인권위가 발표한 차별금지법안은 차별로 인한 피해를 효과적으로 구제하고 차별을 예방함으로써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차별 관련 기본법으로서 총 4개장과 43개조로 구성되어 있다. 그동안 차별금지 관련법들이 특정분야에 한정되고 구제수단이 미흡했던 데 비해 이번에 마련된 법안은 차별의 정의를 구체화하고 범위를 확대ㆍ보완했으며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강도 높은 수단을 마련했다.


차별구제수단의 실효성과 다양성 확보

법안은 우선 차별을 직접차별과 간접차별, 괴롭힘(harassment)을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 정의하는 한편, 성별, 장애, 나이, 인종, 학력, 고용형태 등 20개의 차별 금지사유를 제시하고 고용, 교육, 재화ㆍ용역 등의 공급과 이용, 법령과 정책 집행에서의 공권력의 행사 또는 불행사를 차별의 영역으로 규정했다.

장애인계는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더라도 장애인차별을 다루는 독자적 법률이 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출처: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추진연대>

▲ 장애인계는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더라도 장애인차별을 다루는 독자적 법률이 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출처: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추진연대>

특히 법안에서 눈에 띄는 점은 차별 구제수단의 실효성과 다양성을 높이기 위해 마련된 장치들이다. 시정명령(안 제31조), 이행강제금 부과(안 33조), 손해배상의 특례로서 민사적 제재 활용(안 제39조), 증명책임의 전환(안 제40조) 도입 등이 그것. 현재 차별사안에 대해 국가인권위에 진정을 하면 국가인권위는 ‘권고’를 할 수 있는 데 그친다. 반면, 이 법이 제정되면 권고보다 강력한 구제를 제공받을 수 있다. 가령 국가인권위의 권고를 받은 뒤에도 차별을 한 자가 정당한 사유 없이 이행하지 않고 차별의 양태가 심각하고 공공의 이익에 미치는 영향이 중대한 경우, 국가인권위는 필요한 조치를 ‘명령’할 수 있게 된다. 또 시정명령을 받고도 그 정한 기간 내에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3천만 원 이하의 이행강제금을 부과할 수 있다. 이어 법안에는 법을 위반하여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자는 그 피해자에 대하여 손해를 배상하도록 책임을 부과하고 있는데, 특히 차별행위가 악의적인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 통상적인 재산상 손해액 이외에 별도의 배상금(손해액의 2배 이상~5배 이하)을 지급하도록 결정할 수 있다. 이 경우, 차별 관련 소송에서 증명책임은 피해자가 아니라 차별 가해자에게 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국가인권위가 ‘차별시정기구’로서 권한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으로 보인다.


노동자 개념, 시대 흐름 담아

한편 법안에서는 노동자를 정의하는 부분에서, 근로기준법의 한계를 넘어 노동법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다양한 조건의 노동자들을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법안 4조 11항은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은 자라도 특정 사용자의 사업에 편입되거나 상시적 업무를 위하여 노무를 제공하고 그 사용자 또는 노무 수령자로부터 대가를 얻어 생활하는 자, 동일 사업장에서 특정 사업자가 다른 사업자들을 사실상 지휘.감독하는 경우, 일방 사업자가 특정 사업자의 사업과 관련이 없는 업무를 수행하는 것임을 입증하지 아니하는 한 그 사업자의 근로자는 특정 사업자의 근로자로 본다’라고 정하고 있다. 이는 최근 특수고용직, 사내하청 등 다양한 간접고용 관계에 놓여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을 시정하고자 하는 의지의 발현이다.

올 3월 국가인권위가 연 차별금지법안 공청회 <출처: 시민의 신문>

▲ 올 3월 국가인권위가 연 차별금지법안 공청회 <출처: 시민의 신문>

차별금지법안은 국가인권위가 2003년부터 추진해온 중점과제 중 하나였다. 그동안 국가인권위는 차별관련 인권단체와 전문가, 법률가 등과 함께 주요쟁점과 외국 입법례를 검토하면서 법안을 마련해 왔고, 2004년 8월 초안을 마련한 후에는 공청회, 의견조회 등 다양한 의견수렴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지난 24일 국가인권위 전원위원회는 차별금지법 권고법안을 의결하고 입법 추진을 국무총리에게 권고했다.


재계 맹공격 뒤 숨은 노림수

차별금지법안이 공개되자 재계와 보수언론은 맹공격에 나서고 있다. 산업평화를 저해하고 기본 경제질서를 훼손한다는 항변부터 재산권과 기업활동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이들의 주장은 ‘왜곡된 인권관의 유포’, 나아가 ‘근거 없는 사회불안 조장’으로 요약된다. 이런 악의적 선동은 차별금지법을 무력화시키고자 하는 노림수에 불과하다.

지난 14일 열린 경총 총회 사진 <출처: 한국경영자총협회>

▲ 지난 14일 열린 경총 총회 사진 <출처: 한국경영자총협회>

차별금지법 제정은 헌법의 핵심 이념이며 원리인 ‘평등권’을 구체적인 입법으로 실현시키는 과정이다. 차별은 한국사회의 중요한 인권 문제이며 특정 사유나 영역에 한정되지 않고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차별금지법이) 자의적으로 차별사유를 확대하여 헌법상 보장된 재산권과 자유시장 경제 질서 및 기업 자율경영을 심각히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부분에서 한국경영자총협회가 헌법의 평등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헌법은 2장 11조 1항에서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평등권을 규정한 헌법 2장 11조 1항에서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 등의 차별금지 사항은 열거된 것만 인정되는 것이 아니고 사회˙정의 차원에서 얼마든지 추가할 수 있는 ‘예시적’인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게 통설이다. 차별금지법은 ‘헌법과 국제인권규범’의 기준에 근거해 차별금지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한국경영자총협회는 헌법을 배반한 기업 활동의 자유는 결코 보장될 수 없다는 당연한 이치를 모른 척하며, 자신들의 재산권과 ‘자율경영’만을 부르짖고 있다. 불평등과 차별로 점철된 사회구조에 기생해 온 기업 활동의 자유가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의 피와 눈물을 앗아갔고 이들을 빈곤과 배제의 나락으로 내몰았는지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 이들이 거품 물고 수호하려는 그 질서는 차별을 주춧돌 삼아 건설된 성역 아니었던가.


차별로 유지돼 온 기득권체계 흔들어야

이와 같은 재계의 반발과 노골적 편들기에 나선 보수언론의 반응은 오히려 우리 사회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이 얼마나 시급한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라고 봐야 한다. <중앙일보>는 사설에서 “이상에 치우쳐 밀어붙였다가 실패한 사례를 무수히 봐 왔다”며 정부에 대고 실현가능성을 먼저 따져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문화일보>는 아예 ‘반기업성’을 드러낸 법안이라며 아예 대놓고 반대하고 나섰다. 앞으로 한바탕 힘겨루기 속에 이 법안의 앞날이 순탄하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차별금지법안의 위상을 낮추고, 실효적인 구제구단을 무력화시킴으로써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이들의 의도가 성공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