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비상계엄 직후부터 2025년 4월 윤석열 파면까지, 윤석열 퇴진 광장의 무대에서 빛나는 발언들을 쏟아낸 시민들 옆에는 항상 수어통역사들이 함께 했습니다. 갑자기 이루어진 변화는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기 위해 오랜 시간 함께 싸우고 노력해 온 수어통역사들 또한 그 변화를 만든 이들입니다. 2023년 3월 사랑방 30주년 후원의 밤에서 수어통역을 맡아주신, 하지만 사랑방과는 알게 모르게 연이 깊은 수어통역사 박미애 님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사랑방 후원인이신데, 사랑방 소식지도 잘 보고 계신가요?
네, 전에는「인권오름」(사랑방에서 2006년부터 시작해 11년째 이어지다 2016년 종간한 주간인권신문)을 잘 읽었는데요. 지금은 사랑방 소식지를 잘 보고 있어요.
사랑방 후원인으로 가입하신 날이 2023년 3월 31일, 사랑방이 30주년 후원의 밤을 한 날이더라구요. 그 날 수어통역을 맡아주셨는데, 후원 결심까지 해주셨네요.
사실은 ‘내가 사랑방 후원을 안 하고 있었나’ 싶기는 했어요. (웃음) 제가 계속 장애인권운동 단체들에 있었고, 인권교육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인권오름」의 도움을 많아 받았다고 생각해요. 30주년 행사에 수어통역을 하러 가서 사랑방이 인권의 가장 기본적 토대를 쌓아온 곳이 아니었을까, 내 삶에서 알게 모르게 도움을 받고 있었는데 아직 후원을 안 하고 있다니,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 인권운동사랑방 30년 후원의 밤
제가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활동하면서 수어통역으로 오랫동안 뵈었는데, 처음 여쭙네요. 수어통역을 직업으로 하신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수어통역 일은 그 전에도 했지만 ‘국가공인수화통역사’ 자격증은 2005년 정도에 취득했어요. 한 20년 정도 된 것 같네요. 자격증이 없으면 정식으로 활동하기는 어려운데, 지금은 자격증 따기가 더 어려워져서 300명 중 15~20명 정도 취득한다고 해요. 제 선배 세대는 수어통역을 돈을 버는 직업이 아니라 ‘봉사’로 시작하신 분들이 적지 않아요. 직업을 별도로 갖고 있거나 밤이든 낮이든 부르면 가서 통역을 하면서 활동하다가, 협회도 생기고 자격증 제도도 나중에 생겼거든요. 그러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수어통역센터가 생기면서 센터에서 근무할 통역사들을 고용하기도 하고, 센터에서 수어통역을 배운 분들도 많아지게 되구요. 지금은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수어통역 학과나 수어통번역 전공이 생기고 있어서 수어통역사를 전문 직업인으로서 전망을 가지고 하시는 분들도 나오고 있어요. 저는 그 중간에 ‘낀 세대’라고 할 수 있어요. 지금은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구요.
그럼 전국에 공인자격증을 가진 수어통역사 규모가 어느 정도 되나요?
2천 명이 안 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 「한국수화언어법」이 2016년에 제정되었으니 이제 시간이 꽤 흘렀네요. 법제정으로 ‘수화’가 아닌 ‘수어’가 정식 용어로 채택되고, 국어와 마찬가지로 한국수어가 공용어로 인정받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한국은 단일 언어를 사용하는 국가가 아닌 거죠.) 그런데 수어통역사들이 일할 곳은 많아졌는데, 수어통역사 권리나 처우와 관련한 제도와 체계가 충분하지는 않아요. 아직은 수어통역사가 별도 직업군으로 분류될 만큼 숫자가 많지 않아서, 사회복지종사자 중에서도 ‘기타’로 분류되고 있구요. 한국수어통역사협회가 6~7년 즈음에 생겨서 통역사들의 목소리로 권리를 이야기하기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어요.
수어통역비도 들쭉날쭉 일 것 같아요.
협회가 생기고 새로운 수어통역 단가표도 만들기도 했는데요, 저 같은 경우에는 과도기적 시기에 일을 시작해서 딜레마가 좀 있죠. 예를 들어서 단체에서 농인이 있는데 1박 2일 워크숍을 해야 한다고 하면, 그냥 가는 거죠. 그래서 과거에는 정말 터무니없는 금액을 받고 통역을 하는 일도 많았어요. 장애단체나 인권단체는 예산이 많지 않은 걸 뻔히 아니까요. 그런데 앞 세대 수어통역사들이 일에 비해 너무 적은 금액을 받으면 다음 세대의 통역사들이 그만큼 정당한 대우를 받기 어려운 조건이 만들어지는 문제가 생기기도 하니까요. 지금은 단체들도 인식이 많이 바뀌었고, 저희가 예산을 미리 책정할 수 있도록 먼저 알려드리기도 해요.
저희가 처음 일로 만난 게 2020년이었어요. 운동사회에서도 누구에나 열린 행사를 할 때 수어통역을 배치해야 한다는 고민을 의식적으로 하게 된 계기는 코로나19 시기였던 것 같은데, 어떠세요?
사실 그 전부터 수어통역사들의 여러 노력들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제가 수어통역을 시작한 건 미군 장갑차에 의해 여중생들이 숨진 ‘미선이·효순이 사건’ 집회 때였어요. 그때는 자격증이 없었는데, 같이 활동하던 곳에 농인이 있었거든요. 같이 집회에 갔는데 수어통역사가 없었고, 수어학교 사람들이 돌아가며 통역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고 세월호가 중요한 기점이었죠. 세월호 참사가 있었던 첫 해는 집회에서 수어통역사를 배치했었는데, 그 다음 해부터는 저희를 부를 수 있는 여력이 없는 거예요. 무대를 세울 예산도 줄어들고 참여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마음이 가다 보니까 매주 가서 통역을 하게 됐어요. 세월호 집회 당시 행진에 여러 번 참여한 농인분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분이 수어통역을 보시고는 행진은 그냥 조용히 가는 줄 알았지 사람들이 이렇게 소리치면서 가고 있는 줄 몰랐다는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그리고 오래 전에 민주노총 노동자대회에서 수어통역을 한 적도 있는데, 집회 참여한 노동자 중에 울산에서 오신 농인이 계셨던 거예요. 통역을 마치고 저희가 무대에서 내려오니 그 분이 막 뛰어오셔서 자기는 노동자대회에서 수어통역을 처음 봤다면서, 반갑다고 말씀해주시고는 다시 버스 타러 가야 한다면서 급하게 뛰어가신 적도 있어요.
정말 신기한 게 뭐냐면, 집회에서 수어통역을 하고 있으면 어느 순간 농인분들이 집회에 오세요. 박근혜 퇴진 운동 당시에도 집회 주최 측에서 먼저 수어통역사를 섭외하지는 않았어요. 저희가 하겠다고 해서 시작했는데, 다들 정신이 워낙 없는 상황이라 저희도 팀을 급하게 구성해서 들어간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시작을 하니까 농인 분들이 오시고, 뒤에 있으면 수어통역이 안보일 수 있으니까 앞에 좌석을 배치하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저희가 깃발을 만들어서 같이 행진하면서 행진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어요. 행진을 하면서 퍼포먼스를 하기도 하는데,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어떤 의미인지를 통역하구요. 그런 경험들이 있다 보니 큰 집회가 있으면 저도 모르게 ‘수어통역이 있나’ 하고 보게 되더라구요.
아… 운동사회에서도 기억해야 할 중요한 역사네요.
저와 같이 활동했던 수어통역사 한 분은 광우병 촛불집회 때 수어통역 한 걸로 고발도 당하고 재판하느라 엄청 고생하기도 했어요. 행진하는 농인이 있으면 저희도 계속 행진하면서 통역을 하는데, 당시에 무차별적으로 다 잡아넣던 때라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걸어서 실제 무죄를 받기까지 오래 걸렸어요. 저보다 앞선 선배 수어통역사들은 더 힘든 조건이 많았죠. 그래서 박근혜 퇴진 운동 당시에는 파면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다들 ‘우리도 기소되거나 고발당할 수 있다’는 각오를 하면서 수어통역사들을 모으기도 했어요. 그리고 말씀해주신 것처럼 코로나19 시기에 수어통역을 필수적으로 배치하는 흐름이 생겼구요.
코로나19 당시 질병관리청 브리핑에 수어통역사가 빠르게 배치됐고,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긴급성명을 내면서 농인의 정보접근권과 언어권을 보장하기 위해서 뉴스 화면에 수어통역사를 반드시 포함시키라고 했었죠. 정은경 전 청장 옆에 제가 아는 수어통역사 분이 계셔서 반가웠던 기억도 떠올라요.
그 당시에 수어통역사들은 ‘우리는 어깨 모델’이라는 푸념을 할 정도였어요. 왜냐하면 화면에는 브리핑 하는 사람과 수어통역사를 다 보여줘야 하는데, 카메라가 수어통역사 어깨까지만 잡는 경우도 많았거든요. 실제로 사람들이 수어통역사에 대한 인식이 바뀐 큰 계기였는데, 처음에는 여러 오해도 많았어요. ‘저 사람들은 왜 마스크를 안 쓰냐, 위험한 거 아니냐’ 항의도 있었고, ‘수어통역사 인권 보호를 위해서 마스크를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구요. (아… 수어는 손짓과 몸짓뿐만 아니라 입모양과 얼굴 표정으로 의미를 전달하기 때문에 마스크를 쓰면 통역을 제대로 하기 어렵다는 걸 잘 모르기 때문에 생긴 해프닝이군요.) 수어통역을 하면서 농인분들과 경찰서나 법원도 가는데, 마스크를 안 쓰거나 권장마스크에 속하지 않는 투명 마스크를 쓰면 다 잡았거든요. 그래서 매번 다 설명드리기도 했죠.
이제는 정부 기관에서 하는 행사는 거의 다 수어통역사를 배치하게 됐는데요. 그런데 아직도 ‘의무’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수어통역은 서로 논의하면서 맞춰가는 과정이 필요하고 정말 중요하거든요. 처음에는 수어통역사 위치도 깃발 뒤나 카메라에 안 담기는 곳에 배치했었는데, 이야기를 들은 후에는 발화자 옆으로 가거나 수어통역사에게 별도 카메라나 조명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어요. 사실 정부나 행사 주최 측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해서 문제라기보다, 수어통역과 관련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저도 그랬어요. 생각해보면 행사 하나를 위해서 여러 수어통역사분들이 함께 애를 정말 많이 써주셨어요. 기획․준비 단계에서 연락드리면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어떤 방법이 좋을지 사전 논의도 같이 해주시고, 또 용어나 표현을 어떻게 통역하면 좋을지 서로 논의하고 공부하시기도 하구요. 준비 과정부터 함께 하는 게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드는데, 항상 죄송하고 감사했어요.
행사나 토론회가 열리면 수어통역사들이 사전에 자료집을 받아보잖아요. (그런데 토론회 전 날이나 시작 몇 시간 전에 드렸던 기억도 떠올라서 찔리네요.) 수어통역에서 제일 중요한 건 발화자의 의도를 잘 이해하는 거예요. 같은 단어라도 뉘앙스가 다르고, 수어통역이 단순히 말만 전달하는 게 아니라 발화자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라 배경지식이 없으면 굉장히 힘들거든요. 그래서 오히려 그런 사전 논의 과정을 제안하고 준비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요. 통역사들에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하긴 하거든요. 한국농인LGBT 활동가분들이나 다른 프리랜스 수어통역사들과 용어에 대한 생각도 나누고, 저희가 잘 이해가 안 되는 의도에 대해서 주최 측에 질문도 하고, 진행할 때도 수어통역사를 발화자들 사이 양쪽에 배치하는 새로운 시도도 해보고요. 이런 저런 시도를 같이 해보고 논의하면서 배워갈 수 있었던 과정이 저도 고맙고 좋았어요.

▲ 2021년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쟁점토론회
그리고 코로나19 이후에 또 하나 크게 바뀐 문화 중 하나가 바로 ‘영상’이잖아요. 사실 그 전에는 행사를 실시간으로 중계하거나 녹화한 영상을 온라인에 업로드 하는 일이 많지 않았거든요. 온라인 플랫폼을 이용한 회의나 토론회도 폭발적으로 늘어났구요. 그러다보니 집에 거의 작은 스튜디오 세팅을 하게 됐어요. 왜냐면 수어통역사의 배경이 흐리면 손가락 동작들도 흐리게 보이니까 천을 사다가 뒤에 치고. 얼굴이 어두우면 안 되니까 조명이랑 스탠드도 설치하고. (웃음) 상황에 맞춰서 여러 준비들을 떠올리고 하게 된 건 좋은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에는 운이 좋았던 게 여러 인권시민단체들과 함께 하면서 낯선 용어도 익숙해지고 온라인 환경에도 익숙해지면서 여러 가지들을 알게 되었는데, 그러지 못한 수어통역사분들도 계시거든요. 사랑방도 차제연도 나름대로 새로운 활동가를 찾고 활동가 재생산을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저희도 이런 정보나 노하우를 나눌 수 있는 통로들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 여러 변화가 많았는데, 어떤 것 하나도 그냥 저절로 바뀐 게 없네요…!
맞아요. 여러 단체들과 함께 활동했으니 그 어느 하나도 우리 손으로 바꾸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잖아요. 제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회 소통관에서 수어통역 하는 일을 했거든요. (국회 소통관은 국회의원들이 주최하는 기자회견이나 각 정당 브리핑이 열리는 장소) 2년 정도 했는데, 처음에는 거의 싸우다시피 했어요. 무대에 국회의원들이 쫙 서고 얼굴이 나와야 되는데, 수어통역사가 가리게 되니까요. 그리고 처음에는 ‘신청주의’였어요. 수어통역사는 대기하고 있지만 각 국회의원실이나 정당에서 수어통역을 하겠다고 신청하지 않으면 무대에 못 올라가는 거죠. 한 번은 어떤 정당에서 브리핑을 하는데, 대변인이 수어통역사를 내려가라고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 정당에도 농인인 당원 분들이 있을 거잖아요. 그 정당의 장애인 대표 분과 상황을 이야기를 하고, 그 대표 분이 또 정당 대변인실과 면담하고, 그 다음부터는 다 수어통역사를 배치하는 걸로 바뀌었어요. 지금은 신청주의가 아니고 수어통역사도 당연히 같이 올라가요.
그 다음에 한 일은 각 정당의 대변인들이 브리핑 하고 내려오면 다 쫓아갔어요. 대변인들이 브리핑 하는 시간을 미리 알면 좋은데, 시간이 안정해져 있잖아요. 농인들도 궁금해 하시니 우리가 준비하고 있다가 올라가겠다, 몇 시에 진행하는지 미리 시간만이라도 우선 알려주실 수 있냐고 말해서 단체 대화방을 만들었어요. 각 정당들과 기자단 대화방이 있지만 수백 명 규모니까 복잡해서 별도의 대화방이 필요했거든요. 그래서 이제 어느 정당이 몇 시에 브리핑 한다는 걸 미리 알게 됐죠. 지금은 자료를 미리 올려주기도 하고, 수어통역사들이 자료를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대변인들도 있고, 급하게 오느라 자료 미리 못 줘서 미안하다고 하기도 하구요. 실제로 가서 문 두드리고 이야기하고 그러면서 서로 맞춰가는 과정이 있었죠.
혹시 이번 윤석열 퇴진 광장에서도 수어통역으로 무대에 서셨나요? 매주 퇴진 광장에 나갔는데, 못 뵌 것 같아요.
이번 퇴진 광장에서는 구성된 수어통역 팀이 있었어요. 저는 윤석열이 파면되고 나서 딱 한 번 수어통역으로 광장 무대에 섰어요. 갑자기 펑크가 났다고 해서요. (웃음) 어쨌든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요. 이번에는 예전 촛불광장과는 또 다르게 깃발 부대가 있었잖아요. 그게 너무 좋았죠.
전에 사랑방의 ‘쉽게 풀어 쓴 세계인권선언’을 지금까지도 인권교육에 잘 활용하고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요. 수어통역 외에 인권교육이나 다른 활동도 하시나요?
제가 예전에 ‘나야 장애인권교육센터’에서 1년 정도, 그 다음에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에서 3년 정도 활동을 했어요. 인권교육이나 농인들을 대상으로 한 인권상담에도 관심이 있었구요. 장애인권운동을 하면서 인권교육이 너무 비장애인 중심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또 올해 초까지 활동보조인 교육을 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쉽게 풀어 쓴 세계인권선언’이 처음 인권감수성을 배워갈 때 너무 좋은 자료인 거예요. 초중고 학교에서는 세계인권선언을 가르치는 곳이 거의 없잖아요. 시민으로서 책임이나 의무는 가르치지만 시민들의 ‘권리’가 무엇인지 알려주지는 않으니까요. 가장 기본적인 건데도 우리가 어디에서도 이걸 배우지 못하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도 못하구요. 세계인권선언을 이야기할 땐 사실 ‘소통’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시작해요. ‘쉽게 풀어 쓴 세계인권선언’을 읽으면서 이해가 안 되는 단어가 하나라도 있었는지, 의문이 가는 게 있었는지 없었는지. 그래서 저에게는 너무 이 자료가 지금까지도 너무 유용하고, 그 때마다 사랑방에 감사하다고 매번 이야기를 해요. 쉽게 풀어 쓴 자료가 있어서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세계인권선언이 알려질 수 있었는지.
아, 그런데 ‘쉽게 풀어 쓴 세계인권선언’에서 한 가지만 수정해서 써요. 결혼이나 가정생활이나 이혼에서 ‘남녀’는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부분이 있는데요. 그 문장에서 ‘남녀’만 바꾸면, 초반에 인권의 기반을 설명할 때 사실 이걸 대체할 만한 자료가 없더라구요.
※ ‘쉽게 풀어 쓴 세계인권선언’은 세계인권선언 원문과 국제앰네스티, 유니세프의 축약본을 참조해서 1997년에 인권운동사랑방 인권교육실이 쉬운 말로 고쳐 쓴 것으로, 사랑방 홈페이지 자료실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다른 분도 전화하셔서 ‘쉽게 풀어 쓴 세계인권선언’ 자료를 어디에서 볼 수 있냐고 문의하시기도 했어요. 기쁘고 감사한 이야기네요.
그리고 예전에 제가 주간보호시설에서 수어통역을 하던 때였는데요. 제 아이들이 학교에서 장애인권교육을 받았다고 하는데 장애 유형별로 나뉘어져 있는 거예요. ‘이건 아닌 것 같은데…’ 싶고 인권교육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이었거든요. 그런데 어떤 분이 ‘인권교육센터 들’의 인권교육 워크숍을 들어야 한다고 추천해주셔서 간 적이 있어요. 그리고 그 워크숍에서 제가 엄청 ‘깨지는’ 경험을 했거든요. 저는 나름 그래도 인권시민사회 영역에서 계속 수어통역도 하고 인권교육 공부도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가지고 있던 차별적인 인식을 진짜 생생하게 느끼게 된 계기였어요. 제가 충격 받았던 질문은 바로 ‘몇 살부터 투표권을 가져야 하는가’ 였어요. 제 아이들이 당시에 유치원생, 초등학생이었거든요. 그때 제가 ‘아이들이 부모에 의해서 휘둘릴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각자 토론하고 설명을 들으면서 제가 아동에 대한 ‘소유’의 관점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하게 됐어요. 다른 차별에 대해서도 처절하게 저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워크숍이었구요. 그때 ‘나도 차별적인 사람이었구나, 이렇게 작은 것도 차별일 수 있구나’ 생각하게 되면서 조금씩 바뀔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제가 사랑방 30주년 행사에 가서 ‘내가 아직 후원을 안 하고 있었구나’를 느끼게 된 것도 이런 과정들이 쌓여서 그런 것 같아요. 굉장히 오래 전에 했던 활동들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게 저에게도 힘이 되고 있잖아요. 사랑방의 활동들이 있어서 저도 아직까지 다른 분들에게 세계인권선언과, 아직도 바뀌고 있지 못한 현실과, 선언에 담긴 것들 외에도 여성의 권리나 새롭게 등장한 동물권 등을 더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죠. 너무 감사한 일이죠.

▲ 2021년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국회 앞 농성
관심이 가거나 해보고 싶은 다른 활동은 없으세요?
지금은 수어통역 일에 집중하고 있지만, 인권교육을 하는 농인 분들을 위한 교육을 하고 싶었던 게 있어요. 인권교육을 할 수 있는 농인 강사진이 있었는데, 사실 코로나가 터지면서 이런 활동들이 많이 줄어든 상황이거든요. 그래서 속상하죠. 인권상담도 사실 제가 좀 더 배워서 해보면 좋겠다 싶었는데 제 역량이 부족하기도 하고, 이런 분야가 좀 더 늘어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한국농인LBGT와 같은 단체가 등장하고 활동하고 있다는 게 너무 좋고 멋지다고 생각해요.
사랑방에 대한 애정을 듬뿍 전해주셨는데요. 마지막으로 사랑방에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오래 전에 만든 ‘쉽게 풀어 쓴 세계인권선언’이 아직도 누군가에게는 힘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계속 전달되고 있는 것처럼, 지금 사랑방의 활동이 70년 후에도 누군가에게 굉장히 큰 힘이 될 거예요. 그러니 계속 파이팅!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