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2일 차별금지법제정연대(차제연)에서 전체회의를 진행했습니다. 작년 12월부터 윤석열의 비상계엄으로 정부도 국회도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상황이 펼쳐졌고, 이 조건 속에서 차별금지법 입법운동만을 이어가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오히려 극우의 반동에 맞서 평등세상을 요구하는 이들과 함께 전선을 형성해야 하는 과제를 확인하고 차제연도 윤석열 퇴진 광장에서 부지런히 움직여왔는데요. 4월 4일 윤석열 파면과 함께 다시 질문이 당도했습니다. 윤석열은 물러났지만 ‘윤석열들’은 남아 여전히 정치와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지금, 차별금지법 제정이라는 과제는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말이죠.
지난 윤석열 퇴진 광장을 거치며 차별금지법 제정운동이 확인한 가장 큰 성과는 광장의 요구로서 반차별과 평등, 차별금지법에 대한 요구가 전면으로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차제연을 비롯한 사회운동이 페미니즘과 소수자의 권리에 기반한 보편적 요구를 꾸준히 던져왔기에 구조적 차별과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대안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문제는 사회적 불평등이라는 조건 속에서 동시에 극우화된 대중운동도 함께 성장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더는 부정할 수 없는 사회적 힘을 발휘하는 세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힘을 바탕으로 윤석열과 다르지 않은 이들이 정치적 권력을 유지하고, 다시 세력을 불려나갈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소위 탄핵을 함께 외쳤던 민주진보 정치세력도 극우가 비토 놓을 정책은 회피하면서 무너진 민주주의 원칙을 새롭게 세우는 일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윤석열 퇴진 광장에서 두드러진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는 외침이 윤석열을 파면시키고도 입법에서 진척을 좀처럼 이루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요. 불평등한 사회를 변화시키자고,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서 보다 근원적인 평등을 이루자고 이야기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정치에 담는 것은 차별금지법 제정을 우회하면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걸 확인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는 정치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윤석열과 극우의 등장이 민주주의 사회의 원칙이 허물어지면서 가능했다는 사실은 지금 우리 사회가 새로운 민주주의의 원칙을 세워야하는 조건에 놓여있음을 의미하기도 할텐데요. 구조적 성차별을 백안시하고, 성소수자 혐오를 당연시하고, 비정규-불안정 노동자의 권리를 탄압하는 정치를 가능케 했던 사회를 바꾸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따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 사회를 바꿔내기 위해 한 가지 해답은 없기에 수많은 운동들의 요구가 ‘사회대개혁’이라는 이름으로 100가지 이상 도출되었습니다. 이 과제들은 모두 실행해나가기 위한 방안이 필요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 요구들이 쏟아져 나오며 교차하는 지점에 대해서도 살펴야 합니다. 한국사회 민주주의가 달라져야 한다는 요구에는 그저 잘 먹고 잘 사는 사회를 약속하는 정치가 아니라, 불평등한 사회를 바꾸고 평등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나서는 정치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정치의 경로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지는 결국 사회운동 모두의 숙제이기도 합니다.
2025년 4월 뒤늦은 전체회의를 통해 차별금지법제정연대도 여러 계획들을 세웠습니다. 지금까지 차별금지법이 ‘소수자 의제’라는 한정된 의미로 받아들여지던 흐름을 ‘보편적 권리 보장’의 의미로 조금씩 바꾸어왔다면, 지금보다 폭넓은 사회운동에서 차별금지법이 빠질 수 없는 공통의 요구이자 사회적 과제로 여겨질 수 있도록 만들어가려고 합니다. 힘겹게 지켜낸 민주주의 속에서 시민들이 새로운 세상의 방향으로 바라는 것이 ‘평등’이라면, 새로운 민주주의 사회는 반드시 차별금지법 제정과 함께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불어 22대 국회에서 차별금지법에 관한 논의 역시 계속 조금씩 진척시켜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보수양당 정치가 강화될수록 차별금지법에 대한 제도정치의 논의는 점점 실종되어가고 있습니다. 지역구 눈치를 보는 국회의원들은 시민의 요구와 상반되게 차별금지법을 언급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책임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런 정치와의 간극을 줄여나가기 위해서 국회 내에서 차별금지법 논의의 장을 열고, 사회의 요구와 호흡하는 운동의 제안도 또한 이어갈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스텝이 궁금하실텐데요, 사랑방에서 전하는 소식을 관심있게 지켜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번 차제연 전체회의는 윤석열 퇴진 직후 짧은 시간에 준비된 자리임에도 40여개가 넘는 소속단위 활동가들이 참석해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앞으로의 고민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남은 조기 대선 국면, 대선 이후 펼쳐질 정치적 장을 떠올려보면 입법 전망이 밝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차별금지법 제정운동이 다시 바꿔내야 할 현실을 확인하고 또 다른 가능성을 만들기 위한 자리가 필요했기 때문에 많은 단위들이 뜻을 모아준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현실이 녹록치 않다고 극우의 반동과 제도 정치의 무능에 가로막혀 차별금지법 제정에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차별금지법 제정운동의 역사는 혐오 선동을 일삼는 이들과 맞서고 사회적 합의를 운운하는 정치권을 비판하며 반차별의 원칙을 사회적으로 진전시켜온 과정이었습니다. 지난 구태 정치가 담지 못해 흘러넘쳤던 광장의 목소리를 끌어안고 더 큰 힘을 조직하여 다시 한 번 차별금지법 제정운동을 진전시켜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