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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특집 : 고문후유증 사례 1 최영미 씨

"내가 먼저 죽으면 영미는 어떻게 되느냐" 어머니의 절규


편집주부: 여기 고문으로 인한 한 맺힌 절규가 있습니다. 문국진과 함께 하는 모임의 도움을 받아 이'절규'를 싣습니다. 다소 거칠은 내용이지만 되도록 가감 없이 싣겠습니다.


1.인적사항

생년월일 : 1961년 1월 11일생
학력 : 83년 대헌공업전문대 통신과 졸
주소 : 인천주안
현재 어머니, 오빠 내외와 살고있음.


2.병명

정신분열증(의사는 원인 불명으로 진단)
1982.4-1987.4. : 17차례 입원

3. 사건개요

1981.6.10. (대학1년 재학중) 오전 7시경 집에서 잠을 자다가 중앙정보부 인천분길 소속의 직원 3명이 "잠깐만 물어볼 말 있다"면서 영장도 없이 연행한 후 안기부 지하 취조실에서 11시간 동안 조사 후 당일 오후 7시경 전화해 데려가라 함. 오빠가 데리고 왔음.

오빠가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으나 겁에 질리고 창백해 있을 뿐 별말이 없었으며, 다만 "부모가 왜 일본에 갔느냐고 자꾸만 추궁하면서 최 양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보여 주더라"고 말함. 그 편지에는 별다른 내용도 없었음. 부모님은 황해도 출신임. 그 당시 부모님은 결혼 후 일본에 있는 딸이 박람회 초청장을 보내와 일본에 간지 하루 뒤의 일이며, 20일간 체류하고 왔음. 그 후 부모님이 돌아와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으나 별일 없었다고 함.

그 후 1-2달 후부터 최 영미가 이상해짐. "누가 들어온다"며 문은 잠궈놓고 쭈그리고 앉아 있었으며 2층에서 넥타이로 목매달고 동맥 끊고 자살 기도함. 이후 이런 식의 자살을 수차례 시도함. 상태가 나빠질 때마다 최 양은 "살아서 뭐하느냐, 죽고 싶다" "그 놈들이 '너 여기서 있던 일 발설하면 너희 식구들 다 몰살하겠다'고 했다"면서 그 말이 생각나서 "우리 식구들 모두 죽일 것 같다"고 함.

최 양이 하도 고통스러워하며 안기부에 가보자고 하기에 어머니와 최 양이 안기부에 갔더니 큰 개가 사납게 짖었으며 검문하는 직원이 최 양을 한참 쳐다보다가 "예전에 와서 조사 받았던 학생이구만!"하며 최 양을 알아보았다. 최 양이 위 직원에게 "편지 입수된 게 있으면 달라"고 했더니 없다고 함.


1982. 2월 첫 발작 일어남.

악쓰고, 부수고, "내가 뭘 잘못했느냐"며 소리소리 지르면 밖으로 뛰쳐나감. 옷 벗고 인천 안기부 앞에 앉아 있는 걸 어떤 목사님이 집으로 데리고 왔음. "두 사람은 나이가 먹었고 유독 한 사람이 더 심하게 했다"며 악을 씀.

그 후 서울대병원에 두 달 반동안 입원시킴.

병원에서도 의사들보고 "저놈들 다 중앙정보부에서 나온 사람들이다"며 날뛰었으며, 창문틀에다 목메고 자살 기도하다 떨어져 뇌진탕에 걸려 3일만에 깨어났음. 병원 측에서 약물치료 중단하고 6개월 동안 상태 지켜보자고 했으나 부모님은 병이 악화될 것을 염려해서 이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음. 퇴원 때 병원 측에서 자퇴서 쓰라고 요구했으며 이후 서울대병원에서는 입원 안 시켜줌. 이 당시 의사들에게 원인이 무어냐고 물었더니 원인불명이라고 함.

이후 1년에도 몇 차례씩 짧으면 20일, 길면 3개월 간 입원 치료했으나 퇴원 후에는 다시 나빠지고 별로 효과 없음.


1985년 청와대에 탄원서 냄.

1986.2월 안기부에서 나와 아버지(경찰관 출신)의 회사(퇴직 후 택시 회사 경영하던 상태)로 찾아와서 좋은 회신이 있을 거라고 함.

1986.6. 아버지 화병으로 죽음.

1987.7. 또다시 어머니가 청와대에 탄원서 냄.

이때 법률구조사무소(주안 소재. 부모님은 연락한 적 없음)에서 오라고 해서 갔더니 "시효가 지나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고 함. 이에 어머니가 청와대로 직접 찾아가겠다고 하자 다음날 안기부(?) 직원 2명이 나왔음. 어머니가 "치료비가 엄청나게 들었다. 보상금을 달라"고 했더니, "그렇게는 못하고 이전 치료비는 우린 책임질 수 없다. 지금부터 평생토록 최영미씨 치료비는 책임지겠다"고 함. 이 당시 어머니가 편지의 입수 동기를 물었더니 "주안에서20년 동안 약국 하던 어떤 사람이 알고 보니 간첩이었다. 최양 부모님이 일본에 갔길래 한번 조사해봤다"고 답함. 영미 편지 내용이 어땠느냐고 부모가 재차 묻자 안기부 직원들 우물쭈물 함.

1987.9-1992.10.30까지 5년 동안 관비로 치료받음.

1987.9-1988.4 용인정신병원

1988.2-1992.10.30. 삼영정신병원 입원(인천시 서구 심곡동 소재) : 의료보험 해당기간은 40만원 선이며 의료보험 비 해당 기간은 100만원 선임.

1988. 사회복지로 명칭 바뀌면서 관비처리. 이때 보호자가 요양원으로 되어 있으므로 가족이 자유로이 입·퇴원시킬 수도 없었으며, 4년 동안 외박은 2번 정도 했음. 퇴원하고 다시 입원하면 관비 처리 안될까봐 퇴원도 못시켰음).

92년 1년간만 의보처리(어머니가 영미를 단독 세대주로 요구해서 92년 의보 나옴). 이후 정부에서 동회에 감사 나와 부모 형제가 있고 부모가 자기 집이 있으므로 생활보호 대상자가 될 수 없다며 위법이라고 지적하자 시, 구청, 동회에서 함께 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동직원이 "영미 씨가 불쌍해서 해주었다"면서 시말서를 씀.

이 사건 이후 의보증 회수되었으며 치료비 지급도 중단되었다.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모 신문기자가 안기부에 전화해서 그 당시 생활보호자 처리를 해주어 관비치료를 받게 해준 박씨를 찾았으나 "그런 사실이 없다, 치료비 대준 적 없다"며 딱 잡아 뗌. 어머니가 다시 안기부에 가서 박씨를 찾았으나 전혀 다른 사람이 나옴.

최양은 상태가 안 좋아질 때마다 "내가 무슨 죄가 있어서 지하실 골방으로 끌고 다니며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느냐"고 외치고, 주위 사람들이나 의사들을 보고도 "저 놈들 다 중앙 정보부에서 나온 놈들이다"라며 취조 받았던 당시의 심리적 두려움과 압박상태를 짐작하게 한다.

또한 같이 사는 조카가 "고모 헛소리 좀 하지마, 나 무서워"라고 할 때마다 어머니는 "차라리 나 죽기 전에 내 앞에서 죽었으면 좋겠다, 내가 먼저 죽으면 영미는 어떻게 되겠느냐"며 눈물을 흘림. "청와대 앞에 가서 단식농성이라도 하고 싶다, 김영삼 대통령도 그렇게 군사정권에 의해 고생했는데 이런 사람들을 위해 최소한의 치료비라도 해주어야 하지 않느냐"면서 안기부 직원이 치료비를 대준 일조차 없다고 발뺌을 하는데 기가 막히다고 함.


4. 현재상태

1993.5월 탄원서 다시 냄(치료만 해달라는 내용).

최양은 현재 발작도 하고 상태가 안 좋다. 그러나 치료비가 없어 입원도 못시키고 또 입원해봤자 낫지도 않는다. 혼자 나가지도 못하고 항상 어머니와 같이 다닌다. 라디오 음악방송 때 엽서 보내는 일이 유일한 소일이고, 일주일에 한번 어머니와 함께 성당 나가고 약 타러 가는 일이 유일한 외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