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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가해자인 국가가 소멸시효 주장 할 수 없다"

서울고법, 최종길 교수 의문사에 국가배상책임 인정

과거 고문 등 국가범죄에 대해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국가의 행태에 법원이 제동을 걸었다. 서울고등법원 제5민사부(재판장 조용호 판사)는 지난 1973년 중앙정보부(아래 중정)의 고문에 의해 숨진 최종길 씨(당시 서울대 법대 교수)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국가는 유족에게 18억4800여만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중정 직원들이 1973년 10월 16일 2시경 중정 남산 분청사에 임의출석한 최 씨를 구속영장 없이 18일 혹은 19일까지 불법구금했고, 잠을 재우지 않고 몽둥이로 엉덩이를 때리거나 발로 차는 등의 고문을 가했다고 인정했다. 최 씨의 사인에 대해서는 고문 등 가혹행위를 견디지 못하여 이를 피하려는 과정에서 사망했거나, 가혹행위에 따른 의식불명 상태를 사망으로 오인한 수사관들이 최 씨를 건물 밖으로 던졌을 것으로 판단했다.

또 중정은 △피의자신문조서 △긴급구속장 △현장검증조서 △압수수색장 등 서류 일체를 허위로 작성해 사건을 서울지방검찰청으로 송치했다고 재판부는 밝혔다. 중정은 같은달 25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을 적발했다면서 "최종길이 간첩임을 자백한 후 여죄를 조사받던 중 조직을 보호하기 위하여 스스로 변소 창문을 통하여 투신자살하였다"고 발표했다.

재판부는 "최종길이 간첩임을 자백한 사실도 없고, 그가 간첩임을 입증할 아무런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간첩이라고 조작하여 발표함으로써 최종길과 원고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국가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방어방식"

쟁점이 된 소멸시효에 대해 재판부는 "손해배상청구권은 원칙적으로 시효기간의 종료로 소멸하였다"면서도 "(중정이) 최종길의 사망과정에 관한 모든 정보를 감추었을 뿐 아니라…최종길이 간첩임을 자백하고 7층에서 투신하였다는 것에 대하여 외부에서 전혀 의심을 품을 수 없을 정도로 체계적으로 조작한 관련 문서를 완비한 다음 이를 언론 등에 대대적으로 공표"했다며 "원고들이…손해배상 청구를 하는 것이 법률상 불가능하였다고까지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피고 대한민국의 불법행위를 이유로 민사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원고들의 잘못을 탓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또 재판부는 "모든 정보를 중앙정보부가 독점하고 사건의 해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 중앙정보부 감찰실이 작성한 감찰자료(존안자료)에 (유족들이) 전혀 접근할 수 없었"다며 "원고들이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객관적 장애'가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자신에게 권리가 있는지 여부를 전혀 알 수도 없는 상황에 있었던 원고들에게, '왜 자신들이 이미 보유하고 있는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그 위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가'라고 질타하는 것은 신의칙에 반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재판부는 "(국가가) 피해를 입은 국민들에 대하여 정정당당하게 그러한 불법행위 자체가 있었는지의 여부를 다투는 것은 몰라도,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는 주장을 내세워 그 책임을 면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방어방식"이라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위법행위가 지극히 조직적이고 억압적이며 비도덕적이어서 그 불법성이 중대"하다며 "이 사건과 같이 처음부터 아예 유죄의 확정판결이 없어 재심의 여지가 없는 사건에서 민사소송의 길까지 막는 것은, 사법부의 판단을 통하여 명예를 회복하고 피해보상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를 봉쇄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제기준은 '반인권범죄 공소시효 배제'…"소멸시효에도 고려돼야"

재판부는 유엔 자유권규약의 고문금지 원칙을 구현하기 위해 국제형사재판소 등에서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 공소시효의 적용을 배제하는 것이 국제법의 일반원칙임을 상기하면서 "국가의 반인권적 범죄에 대한 민사상 소멸시효를 적용할 때에도 동일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해 눈길을 끌었다.

한편 재판부는 소멸시효 제도에 대해 "권리자로부터 정당한 권리를 빼앗으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채무자에게 근거 없는 청구를 받았을 때 사실의 탐지 없이 방어할 수 있는 보호수단을 주려는 데 있는 것"이라며 "이 사건과 같은 경우에 국가의 손해배상책임에 대하여도 시효소멸을 인정하는 것은 시효제도의 취지에도 반한다"고 못박았다.

사법부가 국가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을 배척한 사례로는 '수지김' 사건이 있다. 2003년 8월 서울지방법원은 고 수지김 유족들이 제기한 국가배상청구사건에서 "국가가 위법행위에 대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가 소멸시효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칙상 도저히 허용될 수 없다"며 국가 책임을 물어 유족들에게 48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한 바 있다.


"유사사건에서도 적용되는 원칙판결 돼야"

판결에 대해 인권단체연석회의는 이날 논평을 내 "진정한 과거사청산으로 가는 시작에 불과하다"며 "국가권력이 저지른 모든 범죄에 대해 그 피해자들에게 국가가 무릎꿇고 사죄한 뒤, 명예회복과 배상을 해야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종길교수 고문치사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추진위원회' 실행위원장 이광택 교수(국민대 법학)는 "선고전 1심 재판부가 10억, 2심 재판부가 15억의 강제조정 결정을 했지만 우리는 법원이 원칙적인 입장에서 잘 밝혀달라는 취지로 이를 거절했다"며 "결국 원칙을 찾아가려는 노력이 성공한 것"이라고 자평했다. 또 "국가의 소멸시효 주장을 인정하지 않은 이번 판결은 원칙판결로서 유사한 다른 사건에서도 적용될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2002년 5월 의문사진상규명위(아래 의문사위)는 중앙정보부(아래 중정) 수사관 차철권·김상원 등이 △심한 고문 등으로 소생이 불가능해진 최 씨를 7층 비상옥외 계단에서 바닥으로 던졌거나, 이미 고문으로 인해 사망한 최 씨를 △자살로 가장하기 위해 상당한 높이까지 운반해 아래로 던져 추락시켰거나 △바닥에 운반해 추락으로 인한 사망으로 가장하기 위해 발바닥에 둔기 등으로 외력을 가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최 교수가 위법한 공권력에 의해 사망했다고 인정하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에 유족들은 가혹행위치사 및 진상은폐행위 부분에 대해 국가와 당시 이후락 중정부장 등을 상대로 5억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또 주무수사관이었던 차철권 씨가 <신동아> 2002년 3월호에서 '망인(최종길)이 간첩이라고 자백했으며 북한에 다녀왔다고 했다. 자신이 망인을 고문한 사실이 없으며 망인은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자살했다'는 내용으로 인터뷰해 명예를 훼손했다며 5억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