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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법무부, 호주제 폐지 취지에 역행하려나

신분등록법안 입법예고…각계 의견서·성명서 발표 등 항의 잇달아

법무부가 호주제 폐지 이후 새롭게 마련한 '신분등록제'의 정부법안 '국적 및 가족관계의 등록에 관한 법률안(아래 법무부안)'이 각계의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여성·인권·사회단체가 긴급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의견서를 발표하는 등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어 향후 입법과정에서 신분등록제가 어떤 방식으로 구현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25일 목적별신분등록법제정을위한공동행동이 주최한 기자회견

▲ 25일 목적별신분등록법제정을위한공동행동이 주최한 기자회견



목적별신분등록법제정을위한공동행동(아래 공동행동)은 25일 오전 10시 안국동 느티나무 까페에서 법무부안에 대한 의견서와 성명서를 발표했다. 공동행동은 "법무부의 안이 새로운 신분등록제도가 가져야 할 인권의 원칙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호주제 폐지 및 새로운 신분등록제 대안 마련을 위한 그간의 노력을 오히려 후퇴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공동행동은 법무부안이 △신분증명 업무의 주무부처를 법무부로 삼고 있는 점 △사실상 가(家)별편제 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점 △개인정보 보호에 매우 취약한 점 △성평등에 부합하지 못하고 있는 점 등을 지적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회(아래 여연)도 24일 의견서를 통해 △법안 및 등록부의 명칭 △관장 기관 △상세증명서 발급 △자가 모의 성과 본을 따르는 경우 출생신고서에 취지 및 사유를 기재하도록 한 점 등을 문제점으로 지적한 바 있다.


행정효율? 수사·수형 업무의 효율!

무엇보다 법무부안에서 놀라운 점은 새로운 법률의 주무부처를 법무부 자신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간 법무부는 호적사무를 법무부로 이관시키기 위한 작업을 추진해왔다. 법무부는 지난 2004년 국회 법제사법위 국정감사에서 "호적사무는 본질적으로 국민의 신분관계 공시에 관한 국가행정사무로 업무의 사법적 성격상 법무부가 관장하는 것이 타당"하다며 "법무부가 관장하는 국적 및 수형 사무와 통합·연계를 통한 업무의 효율성을 제고"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25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지문날인반대연대 윤현식 활동가가 법무부안을 설명하고 있다.

▲ 25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지문날인반대연대 윤현식 활동가가 법무부안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주무부처를 법무부로 정하는 것에 대해 인권단체들의 반발은 거세다. 공동행동 타리 활동가는 "법무부가 수사기관인 검찰을 지휘하는 기관임과 동시에 인권침해에 앞장서왔던 과거의 행적을 놓고 볼 때 과연 새로운 신분증명제도의 주무부처로서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고, 광범위하게 수집한 국민의 개인정보를 하부기관인 검찰이 수사에 사용한다면 이것은 매우 끔찍한 일"이라고 말했다. 즉 검찰이 '빅브라더'가 된다는 우려이다. 여연도 의견서에서 "새로운 신분등록사무는 대법원이 관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호적감독사무는 국민의 신분 및 재산·상속 등 법률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준사법적 성격이 강한 사법행정사무로서 호적비송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법원에서 관장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밝혔다. 신분등록사무를 법무부가 아닌 대법원이 해야 한다는 배경에는 80년 이상 법원이 호적사무를 관장·감독해오면서 필요한 모든 인적·물적 설비가 완비되어 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기관으로 위임하게 되면 신분등록담당공무원을 새로 배치하고 신분등록전산시스템의 연결을 구축하는데 불필요한 추가 비용이 소요되어 국고의 낭비가 초래된다는 것이다.


개인이 아닌 가별 편제 여전

법무부안은 '개인별 신분등록제도'를 도입한다는 취지와는 달리 본적과 하등 다를 바 없는 '등록준거지'를 신설하는 등 사실상 호주를 중심으로 '가(家)별 편제방식'을 취하는 현행 호적법의 문제점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가족을 통해야만 개인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다는 구태의연한 법무부의 발상은 결국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보호하기는커녕 이들에 대한 차별을 불러일으킨다. 한국여성민우회 김유경 대표는 "법무부안은 개인별 안을 내세우기는 했으나 여전히 가족을 통해 개인을 보는 관점이 여전하다"고 비판했다.


법무부안, 정보 집적 심각

법무부안의 또 다른 문제점은 개인정보의 침해를 들 수 있다. 법무부안은 '국적및가족관계등록부'를 기본으로 두고, 여러 증명서들을 각기 다른 형태로 발급하는 절차를 두고 있다. 법무부의 안에서 각 증명서들은 현재의 신분상태뿐만 아니라 그 변동사항까지도 한눈에 드러나도록 기록하고 있고 가족증명서에는 본인을 비롯하여 부모 및 양부모, 배우자, 배우자의 부모 및 자녀의 개인정보를 모두 수록하며, 심지어 기본증명서·혼인증명서·입양증명서·가족증명서의 내용이 모두 담겨있는 '상세증명서'까지도 별도로 만들어두고 있다. 진보네트워크 지음 활동가는 "여러 가지 목적에 따라 구분될 수 있는 정보를 집중하고, 현재의 상태와 과거의 신분변동내역을 구분하지 않고 통합하는 것은 정보의 집적이며 개인정보 보호 원칙에 어긋난다"고 평가했다. 또한 지음 활동가는 "'전자정부법'에 따르면 행정부는 개인정보를 공유하게 되어있는데, 사법부인 대법원이 아닌 행정부인 법무부가 정보를 갖게 되면 수사기관은 물론 다른 행정기관에도 정보가 넘어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여성차별 여전

법무부안은 호주제 폐지에 따른 성평등 가치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자식이 모의 성을 따를 경우, 취지 및 사유를 담은 신고서를 작성하는 것은 성평등에 어긋나고 출생신고 과정에서 혼인 중인 자와 혼인 외의 자를 구별하여 신고하는 것도 차별을 자아낸다. 여연은 "민법 개정에 따라 자가 모의 성을 따를 경우 혼인신고서에 그 내용을 기재하면 되는 것이지, 출생신고서까지 그 취지 및 사유를 기재하는 것으로 확대·적용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밝혔다. 부모가 자식에게 부모 중 어느 일방의 성·본을 따르도록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국민 개개인의 선택이며 자유이므로, 국가에 그 사유를 알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한편 법무부는 입법예고 후 12월 중순 국무회의를 거쳐 '국적 및 가족관계의 등록에 관한 법률안'을 국회에 제출한다는 계획이다. 공동행동과 여연은 국회 입법과정에서 △성평등 △개인정보 보호 △다양한 형태의 가족 차별 금지라는 입법 정신이 구현될 수 있도록 노력할 계획이다. 공동행동안인 '출생, 혼인, 사망 등의 신고와 증명에 관한 법률안'은 지난 9월 21일 노회찬 외 14인이 입법발의 한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