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하루소식

취직하려면 가족정보 내놔라?

30대 대기업·계열사 중 74.6%가 채용시 요구

"아들이 9살 되던 해 전 남편 대신 아들이 호주를 승계 받았다. 이력서 공동 서식을 보면 호주와 호주와의 관계를 적게 되어 있다. 그래서 '호주' 란에 아들 이름을, '호주와의 관계'란에 모(母)라고 적은 이력서를 제출했다. 면접관은 10분 정도의 면접시간 대부분을 나의 이력서 서류의 가족관계를 묻고 내가 여성가장인 것에 대한 이야기로 채웠다. 내가 이혼한 상태인지 사별한 상태인지를 궁금해했다. 더 이상 파헤치지 않아도 되는 정보 단 한 줄을 이력서에 적어야 했고 그로 인해 내 업무능력과 무관한 질문만 받아야 했다. 면접관은 그런 질문을 왜 하는지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지난 4월 14일 진행된 '호적제도 피해사례 증언발언대'에서 한부모 가족의 여성 가장인 김 아무개 씨는 한 외국계 생명보험사에 취직하려다 겪었던 고통을 이렇게 털어놨다.

이처럼 대부분의 기업에서 구직자의 개인정보, 특히 가족관계와 학력, 직업 등 업무능력과는 무관한 개인정보를 요구해온 관행이 도마 위에 올랐다. 목적별신분등록법제정을위한공동행동(아래 공동행동)과 노회찬 의원(민주노동당)은 24일 국회 기자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30대 대기업 입사지원 시 가족정보 수집에 관한 모니터링' 결과를 발표했다.

지난 5월 2일부터 17일까지 30대 대기업과 그 계열사들의 입사지원서를 분석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채용시 자체 입사지원서 양식을 이용하고 있는 조사대상 그룹·기업 177개 중 132개(74.6%) 기업이 구직자의 가족관계와 구직자 가족의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세부 항목별로는 가족의 이름과 구직자와의 관계를 파악하는 경우가 70.1%로 가장 많았고 △가족의 직업이나 직장명(68.4%) △생년월일이나 연령(66.1%) △출신학교 또는 학력(59.3%) △직장내 직위(58.8%) △구직자와의 동거여부(54.8%) △형제자매관계(19.2%) 순으로 나타났다.

이외에도 가족 개개인의 주민등록번호를 파악하는 경우(4.5%)와 부모의 생존여부(1.7%), 가족 개개인의 연락처(1.1%)를 파악하는 경우까지 있다.

그룹 차원에서 가장 많은 항목을 수집하는 그룹은 신세계로 가족 이름, 구직자와의 관계는 물론 부모의 생존여부 등 총 9가지 항목을 파악하고 있으며, 가족의 월수입과 주거형태까지도 기재하게 하고 있다. 개별 기업으로는 CJ투자증권, 롯데기공(롯데), 해비치리조트(현대자동차)가 가족 이름, 구직자와의 관계, 연령 등 총 10개 항목의 가족정보를 파악해 가장 많은 항목을 수집하고 있다.

30대 대기업 가운데 가장 많은 가족정보 항목을 수집하고 있는 신세계의 입사지원서가 기자회견에서 공개됐다.

▲ 30대 대기업 가운데 가장 많은 가족정보 항목을 수집하고 있는 신세계의 입사지원서가 기자회견에서 공개됐다.



기자회견에서 공개된 해비치리조트(현대자동차) 신입 입사지원서

▲ 기자회견에서 공개된 해비치리조트(현대자동차) 신입 입사지원서



공동행동은 "(정보를 담은) 이력서나 입사지원서가 구직자에게 반환되지 않으며, 많은 기업이 '인재 풀(POOL)'을 모집, 관리하는 방식으로 수시로 구직자의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있지만…수집한 정보를 어떻게 이용하는지, 개인정보 유출의 위험은 없는지 제도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장치가 없다"며 프라이버시권 침해를 예방할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또 "기업의 무분별한 구직자 개인정보와 구직자 가족정보의 수집은 채용과정에 소위 양부모와 미혼자녀로 구성된 가족만이 정상가족이고 그렇지 않은 가족과 그 구성원들은 무엇인가 결함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편견이 작용하고, 그로 인한 차별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다름으로 닮은 여성연대 활동가 타리 씨는 "개인의 신분이력과 함께 가족상황이 나오는 이력서 양식은 정부가 내놓은 호주제 이후 신분등록제안과 비슷하다"며 "제도적으로 호주제 폐지와 함께 목적별신분등록제를 도입하면서 동시에 기존 호적제에 따른 관행을 함께 바꿔야 일상에서 벌어지는 차별을 없앨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호주제만 없어지면 여성에 대한 차별이 없어질 것이라는 기대는 근시안적인 것"이라고 지적했다.

공동행동과 노 의원실은 앞으로 △무분별하게 가족정보를 수집하는 주요 기업에 '질의서'를 발송해 관행 근절을 촉구하고 △공공기관 및 기업 등의 무분별한 개인정보 수집, 부당한 활용과 유출 등을 예방하고 국민 개개인의 자기 정보 통제권을 보장하기 위한 '개인정보보호에 관한 기본법'을 제정하며 △기업의 구직자·노동자 개인정보 보호 의무를 명시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또 가족의 개인정보 유출과 프라이버시권 침해, 결혼여부·가족형태에 따른 사회적 편견을 조장하는 기존 호적제도를 대체할 '목적별 신분등록제' 도입 법안을 빠르면 오는 6월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한편 기업 뿐 아니라 유치원, 초·중·고교, 대학 등 주로 호적(신분증명서)를 제출하게 하는 기관에서 개인의 가족정보를 부당하게 이용하는 사례가 없는지 실태를 파악하고 가족관련 정보를 수집하는 관행을 없애나갈 계획이다.

기자회견 참석자가 CJ투자증권의 입사지원서를 들고 있다. [출처] 노회찬 의원실

▲ 기자회견 참석자가 CJ투자증권의 입사지원서를 들고 있다. [출처] 노회찬 의원실



기자회견문을 낭독하고 있는 노회찬 의원 [출처] 노회찬 의원실

▲ 기자회견문을 낭독하고 있는 노회찬 의원 [출처] 노회찬 의원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