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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특집> '2003 겨울터널'을 지나는 사람들 ② - 평등노조이주지부 샤멀 지부장

'세계 이주민의 날'을 하루 앞둔 17일, 명동성당 농성장은 너무나 추웠다. 석유난로 하나가 켜져 있지만 천막 틈새로 들이닥치는 바람은 어쩔 수 없다. 더구나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많아 감기는 기본이고 이빨 아픈 사람, 발에 동상이 걸린 사람도 있다. "약을 먹어도 낫지를 않네요. 하지만 농성은 계속됩니다." 연신 콜록거리면서도 빛나는 눈빛을 내뿜는 샤멀 타파. 서울경인지역평등노조 이주노동자지부 지부장인 그는 지난달 15일부터 이곳에서 조합원 80여명과 함께 농성을 시작했다.


산업노예에서 노동운동가로

한국땅을 처음 밟은 것은 94년 5월. "네팔에서는 대학을 졸업해도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요. 그러다 몇 년만 고생하면 기술도 배우고 돈도 벌 수 있다는 신문광고를 봤지요." 네팔 트리뷰완대학 경제학과 2학년을 마친 그는 가족을 위해 산업연수생으로 한국행에 올랐다.

"플라스틱 사출공장에서 일했는데 주간 11시간, 야간 13시간 일해도 월급은 40만원밖에 안됐어요. 게다가 실제로 손에 쥐는 돈은 25만원뿐이었지요." 나머지는 도망치지 않으면 귀국할 때 돌려준다는 '강제적립금'이었다. "몇 달 후 집안에 급한 일이 생겨서 앞으로는 적립 안 했으면 좋겠다고 사정했지만 거부당했습니다. 우리는 노동자가 아니라 노예였어요." 차라리 '불법체류자'가 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그는 연수업체를 나와 석재공장, 양계장을 전전했다.

97년 겨울 IMF는 이주노동자라고 해서 봐주지 않았다. 당시 다니던 공장이 한 달에 절반만 돌아가자 그는 아르바이트로 새벽 신문배달을 했다. 99년 3월 배달 중에 덤프트럭에 치여 다리 심줄이 끊어지는 중상을 입기도 했다. "수술비도 없는데 회사는 그만둬야 했으니 눈앞이 캄캄했지요." 벼랑 끝에 몰린 그는 '안양전진상복지관 이주노동자의 집'에서 살면서 치료를 받았다. "그곳 상담실에는 임금체불, 산재, 성폭력 문제로 이주노동자들이 끝없이 몰려들었어요. 이주노동자 문제는 스스로 일어서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2001년 만들어진 이주지부를 통해 노동운동에 뛰어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숨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나요"

단속추방에 반대하며 명동성당 농성을 결심하기까지 고민도 많았다고 한다. "단속 날짜가 다가오니까 숨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과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생각이 겹쳤습니다. 많은 친구들이 이미 숨어 버린 후였고요." 하지만 그는 결심했다. "더 이상 숨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앞서서 싸우면 친구들도 밖으로 나와 싸울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막상 농성단을 꾸려보니 그 동안 한 번도 활동하지 않았던 친구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 친구들과 함께 연수제도, 고용허가제의 문제점부터 공부하고 토론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디가도 잡힐 테니 농성이라도 해야겠다던 친구들이 지금은 노동권이 뭔지 알게 됐어요. 농성에 지치다가도 생각이 많이 바뀐 친구들을 보면 힘이 납니다."

고용허가제 얘기가 나오자 눈에 빛이 난다. "4년 이상 체류자는 모두 내보내고 싼 임금으로 일하는 새로운 인력을 들여오겠다는 것 아닙니까? 3년을 채우면 또 잡아서 내보내고요. 빈 자리에는 새 사람들이 또 들어오겠지요. 그러면서도 불만이 있어도 사업장을 옮길 수 없게 해놨습니다." 한국정부의 비열한 분할 전략을 이야기하는 그의 눈에서는 분노가 타올랐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인권은 어디서 일할지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 같아요. 회사에서 잘해주면 왜 옮길 생각을 하겠어요?"

이들의 농성은 성당 안에만 갇혀 있지 않았다. 추방 위협에도 출입국관리사무소, 서울노동청 앞에서 연달아 집회를 열었다. "아무리 위험해도 밖으로 나가 한국 노동자들과 연대해야 우리 문제도 풀린다는 생각입니다." 경찰의 신경도 곤두섰는지 성당 앞을 서성거리고 간혹 "나오면 잡는다"는 협박전화를 걸어오기도 한다. "성공회대성당이나 감리교회에도 이주노동자들이 농성하고 있지만 여기 이주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통해 문제를 풀려고 해서 그런지 표적 단속 대상이 되는 것 같습니다." 지난 10월 26일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 거리행진 때도 이주지부 조합원 비두 씨와 자말 씨가 맨 앞에서 싸우다가 연행돼 추방을 앞두고 있다.


"우리도, 한국인도 함께 뭉쳤습니다"

사진을 찍으려다 보니 쓰고 있던 모자에 살짝 가려 삭발한 머리가 드러났다. 지난 14일 안산집회에서 삭발했다고 한다. 네팔에서는 삭발의 의미가 '항의표시'가 아니라 '슬픔'이란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자식들이 머리를 깎는다는 것. "고향에 살아계신 부모님이 알면 안돼요"라며 너스레를 떨면서도 그는 단호한 표정으로 한마디 덧붙인다. "지금까지 단속이 시작되면 이주노동자들은 숨기에 바빴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릅니다. 우리 문제를 우리가 해결하려고 뭉쳤고 지지하는 한국인들도 많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