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하루소식

인권하루소식 '그때 그 사건' ③ 이주노동자 명동성당 쇠사슬 농성

'현대판 노예'들의 쇠사슬 함성, 그로부터 8년

"제발 때리지 마세요." "우리는 노예가 아니에요." 1995년 1월, 13명의 네팔 산업연수생들은 온 몸을 쇠사슬로 묶고 명동성당에 모였다. 여권압류, 감금노동, 폭행·폭언, 장시간 저임금 노동…. 이들 산업연수생들이 폭로한 인권유린 사실은 우리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줬다. 이주노동자들의 존재와 인권침해 현실을 알렸던 그 사건 이후 8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산업연수생제도는 사라지지 않고 있지만 이제 그들은 거리에서 "노동비자를 달라", "노동3권 보장하라"며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당당히 말한다.


태생부터 틀려먹은 산업연수생제도

정부는 91년부터 출입국관리법을 적용해 산업연수생으로 받아들였지만, 그것은 연수가 아니라 저임 노동력 착취제도에 불과했다. 이주노동자들은 중소기업협동중앙회(아래 중기협) 산하에 편재되어 있던 인력회사에 상당한 금액의 수수료를 내고 들어와 '연수' 아닌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낮은 임금 가운데 일부마저 중기협에 보증금으로 맡겨야 했다. 게다가 사업장내 감금, 장시간 노동, 폭행 등은 이주노동자들의 사업장 이탈을 부채질했다. 그렇게 산업연수생제도는 불법체류 이주노동자를 양산하는 제도가 되어버렸다.

외국인이주노동자대책협의회(아래 외노협) 최의팔 상임공동대표는 "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연수생제도는 출발부터 문제였다"며 "1일2교대의 장시간 저임금 노동, 임금체불 등의 문제가 발생하면서 이주노동자들이 94년 경실련, 95년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벌이게 됐다"고 회상했다. 명동성당 농성에 참여했던 네팔 산업연수생들은 비록 1년여만에 모두 추방당했지만, 이 농성은 이주노동자 인권문제에 대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대응의 필요성을 일깨웠고, 그해 7월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가 만들어지게 됐다.


사회인식 변해도 꿈쩍않는 연수생제도

부산외국인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 정귀순 대표는 "94년, 95년의 이주노동자 투쟁은 그 존재조차 알 수 없었던 이주노동자의 존재를 알리고 인권유린 현실을 고발하는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후 이주노동자의 인권문제를 다루는 언론 보도가 늘어나기도 했지만 이주노동자의 숫자도 늘어나 주변에서 이주노동자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면서 이주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차츰 변화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업장내 변화'의 속도, 즉 노동자로서의 권리 보장 속도는 사회적 인식 변화를 쫓아가지 못했다는 게 정 대표의 지적이다.

계속되는 산업연수생제도의 폐해와 불법체류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노동 착취에 맞서 인권사회단체들은 96년과 97년에 또 다시 명동성당 농성을 진행했다. 외노협 최 대표는 "근본적인 문제해결을 위해서 97년에 외국인노동자보호법 등을 국회에 제출하고, 범국민적인 서명운동도 했지만, 정부는 연수생제도에서 연수취업제 2+1(연수기간+취업기간), 그리고 1+2로 모양만 바꿨을 뿐 연수생제도의 틀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연수생제도 폐지와 고용허가제 도입은 이익단체인 중기협 등의 반대로 2002년까지 번번이 논의에만 머물러 있어야 했다.


노예제도는 유지, 노동자성은 부정

마침내 올해 7월, 산업연수생제도와 고용허가제의 병행을 골자로 하는 '외국인근로자고용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그러나 '현대판 노예제도'라 불리는 산업연수생제도가 유지된 것은 물론이고 새로 도입된 고용허가제 역시 한국에 들어 온 이주노동자들의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보장하지 못하는 한계투성이 법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민주노총 평등노조 이주노동자지부 서멀(네팔) 지부장은 "한국에 노동자로 와서 일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은 당연히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인정받아야 하는데, 이번에 도입된 고용허가제는 그렇지 못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사업장 이전의 자유도 없고, 3년 계약이라고 하지만 1년마다 계약을 갱신하도록 해 노조활동 등 사용주 눈 밖에 나는 일은 할 수 없게 만들어 놨다"며 "말로는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보장하겠다고 하지만 실제 법은 여전히 이주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비난했다. 더욱이 제정된 법에 따라 현재 체류중인 40여만명 이주노동자 중 국내에 4년 이상 체류한 10여만명은 올 11월 13일까지 한국을 떠나야 한다. 또 다시 인간사냥이 시작되는 것이다.

서멀 지부장은 이주노동자들이 불법 체류자인지 아닌지 그 신분을 따지기 전에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보라고 말한다. 피부색이 다르고 말도 다르지만 이 땅에서 이웃을 사귀고 일터를 가지고 살아가는 한 명의 노동자로서 이주노동자를 바라본다면, 자신들의 노동자로서의 정당한 권리를 빼앗고 사냥해서 내쫓는 끔찍한 단속추방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추방위협에도 노동자 권리 말하겠다

'표적 단속'과 '추방'의 위협에도, 이들 이주노동자들은 이제 더 이상 도움 받기를 기다리며 앉아 있지 않는다. 집회를 열고 '연수생제도 폐지', '고용허가제가 아닌 노동허가제', '노동비자'를 요구하며, 노동조합을 통해 다른 이주노동자들을 조직한다. 서멀 지부장은 "노동자이면서 그 동안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했던 지금까지의 차별을 해결하기 위해 조합을 만들고 직접 나서는 것"이라고 말한다.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벌이고 있는 활동이 비록 그들의 자유를 위협하고 있긴 해도 서멀 지부장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며 "앞으로 단속추방 저지와 노동비자 쟁취를 위해 투쟁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주노동자의 인권문제는 이제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공동의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정부의 정책이나 제도는 아직도 95년 명동성당의 쇠사슬 농성이 있던 그때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