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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기고> 59차 유엔인권위가 남긴 과제 (상) - 이성훈 팍스 로마나 사무국장

낙제점 받은 참여정부의 인권외교


지난 달 25일 막을 내린 59차 유엔인권위는 한국정부와 인권운동의 현재와 미래에 시사하는 점이 많다. 무엇보다 이번 인권위는 노무현 정부가 맞이한 첫 유엔 인권관련 회의로서, '참여정부'의 인권정책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기회였던 만큼 안팎의 기대가 높았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의 '인권변호사' 경력이 알려지자, 국제 인권단체들은 나름대로 기대감을 표했다. 일부에서는 서방과 비서방,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국익 논리에 의해 답보상태에 빠진 인권위에 참여정부가 당당한 외교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을 기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번 인권위에서 드러난 현 참여정부의 인권외교의 성적표는 거의 낙제점에 가깝다고 보여진다.

인권위 일정은 대개 장관급이 참여하는 고위급 연설과 의제별 발언, 결의안에 대한 투표로 이루어진다. 이중 정부 발언은 보통 쟁점이 되는 국제 인권문제에 대한 기본 입장을 밝히고 자국내의 관련 문제에 대해 설명하는 방식이다. 각 정부의 구체적인 입장은 결의안에 대한 표결로 나타난다.

의제별 발언을 보면, 한국정부는 인종차별, 발전권, 나라별 인권상황, 시민․정치적 권리, 여성(일본군 위안부), 아동권 문제에 관해 모두 6번의 발언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발언이 원론적 입장을 나열하고, 이른바 '국익'의 관점에서 한국정부의 관심사를 적당히 언급하는 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민감하거나 곤란한 문제에 대해서는 피하거나 변명했다. 이는 인권후진국의 전형적인 행태일 뿐, 여기서 참여정부의 당당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인권의 정치 도구화' 구태 못 벗어

인권외교에는 인권을 활용해 국익을 증진시키는 현실정치와 외교를 이용해 인권을 증진시키는 인권정치의 두 측면이 있다. 그러나 올해 인권위에서 드러난 참여정부의 인권외교는 현실정치의 구태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 인권이야말로 국익의 핵심이라는 발상의 전환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참여정부 출범 직후라 미처 신경을 못써서인지 아니면 과거를 답습하려는 것인지 판단을 내리기에는 다소 이른 감이 있다. 그러나 이번 인권위만 두고 판단할 때, 낙제점수에 가깝다.

예를 들어 한국정부의 발언, 특히 아동권(의제 13) 관련 발언은 정말 함량미달에다가 미필적 고의라는 의혹을 두지 않을 수 없다. 이 발언에서 한국정부는 올해 1월 한국정부의 아동권 보고서에 대한 유엔 심의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한국정부 대표단이 유엔 아동권리위원회 위원들로부터 창피할 정도로 질책을 받은 것이 불과 두 달 전의 일이다. 또 당시 정부 대표단은 아동권리위원회가 아동권 증진을 위해 제시하는 권고를 성실히 수행하겠다고 약속하며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그런데도 이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으면서, 대신 엉뚱한 한일 교과서 문제가 발언에 등장했다. 아동권 심의 당시 '한국 아동권의 침해는 어른의 치매 때문'이라는 한 방청객의 지적이 다시금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감추기, 눈감기, 눈치보기의 삼중잣대

한국정부가 보여준 결의안에 대한 입장도 문제투성이다. 반인권적 논리에 빗대어 이라크 문제에 관한 논의에 반대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사형제도 폐지에 반대하는 등 여전히 인권을 도구화하는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는 발언 내용과 표결시 입장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인종차별(의제 6)과 관련해 남아공 더번에서 열린 인종차별철폐회의를 지지해놓고 표결에 가서는 기권표를 던졌다. 나라별 결의안의 경우에도 힘없는 작은 나라에 대한 결의안에는 모두 찬성표를 던지면서 북한문제에는 불참을, 체첸문제에는 러시아의 눈치를 보느라 기권표를 행사했다.

한국정부의 표결 행태는 발전권과 경제적 권리 분야에서는 '보수적' 입장을, 나라별 인권결의안에서는 '기회주의적' 입장을, 시민․정치적 권리 분야에서는 사형제도 등 일부 이슈를 제외하고는 (국내에 큰 문제가 없는 경우) 상대적으로 '진보적' 입장을 보였다고 볼 수 있다. 이라크 문제처럼 큰 국제적 쟁점이나 한미관계에 영향을 줄 만한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의 경우에는 미국의 입장을 따랐다. 간단히 말해 한국정부는 이른바 국익을 대원칙으로 삼중잣대, 즉 국내인권문제는 감추기, 북한 인권문제는 눈감기, 그리고 외국의 인권문제는 눈치보기라는 세 가지 잣대를 섞어서 사용한 셈이다.


인권외교, 열린 공간으로 나와야

올해는 '1993 비엔나 세계인권대회' 10주년이 되는, 이른바 '비엔나+10'이다. 그러나 이번 인권위는 이에 관한 결의안 하나 채택하지 않았다. 비엔나 회의의 결과로 만들어진 인권고등판무관실(OHCHR)도 별로 관심과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 비엔나 회의에서 재확인된 보편성, 불가분성, 상호의존성의 원칙과 기준은 지난 10년 동안 대다수 국가들의 담합과 일부 국가들의 조직적 방해로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다. 특히 9.11과 이라크 사태는 인권과 국제인권법의 입지를 더욱 축소, 왜곡시켰다.

대다수 국제 인권단체들은 올해 인권위의 결과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했다. 인권위 회원국의 하나인 한국정부도 이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비엔나+10'은 한국에게 '군사독재-10', 즉 형식적이나마 민주주의가 시작된 지 10년을 의미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듯, 이제는 눈치보기 주먹구구식 인권외교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동안 국민은 물론 언론, 심지어 국회의원도 모른 채, 일부 직업관료들이 자신들의 닫힌 사무실에서 판단한 국익에 의해 추진해왔던 인권외교를 이제는 열린 공간으로 끌어내야 한다. 그리고 무엇이 진정한 국익인지, 인권의 원칙에 따른 인권외교가 어떤 것인지 토론해 보아야 한다.

전 세계 수많은 인권피해자의 운명을 더 이상 소수 정부대표에게 맡길 수 없고 맡겨서도 안된다. 세계화 시대의 외교, 특히 인권외교에도 이제는 국민참여의 시대가 열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