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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연재] 59차 유엔인권위원회 소식 ④

눈치보기와 국정홍보에 급급한 초라한 인권외교


나라별 인권상황(의제항목 9)은 전세계 모든 나라의 모든 인권문제를 다룰 수 있는 항목이어서 가장 많은 수의 인권 NGO의 주목을 받는 의제이다. 한국정부는 지난 1일 나라별 인권상황에 관한 구두발언에서 탈북자, 남북이산가족, 국제형사재판소(ICC), 그리고 2002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민주주의공동체'(CD) 회의에 대해 언급했다.

정의용 제네바 한국대사는 발언 서두에서 "올해가 세계 인권발전의 이정표인 1993년 비엔나 세계인권대회 10주년"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비엔나 행동계획의 권고에 따라 한국의 인권수준을 높이기 위해 인권 관련 법, 제도 및 정책을 단계적·계획적으로 개선하는 조치를 취해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예년과 마찬가지로 북한과 중국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탈북자 인권문제를 우회적으로 언급했다. 노무현 '참여정부' 출범 이후 국제회의에서 탈북자 등 북한 관련 인권문제를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원칙과 현실 사이 줄타기 외교 여전

북한 인권과 관련한 정 대사의 발언은 유럽연합이 준비중인 북한 인권 결의안에 대한 노무현 '참여정부'의 입장을 담고 있어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과거 김대중 정부 때와 마찬가지로 남북 경제협력은 '햇볕' 아래에서, 인권은 '그늘' 아래에서 추진하는 이중정책을 취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남북관계의 특수성'에서 비롯된 '전략적' 측면이 전혀 없다고 볼 수는 없지만, 한국정부의 깊이와 일관성 없는 인권철학과 정책에서 기인하는 '무전략'이 더 큰 원인으로 보인다. 이른바 "할 말은 하고, 다른 것은 달라야 한다"라고 주장했던 '참여정부'의 외교원칙이 인권에서는 '원칙과 현실 사이에서 눈치보는 줄타기 외교'로 전락한 셈이다.

똑같은 문제가 비엔나 세계인권대회 관련 발언에서도 드러난다. 한국정부는 주장과 달리, 10년이 지났지만 비엔나 행동계획의 핵심적 권고사항인 국가적 차원의 인권실천계획(National Action Plan)은 아직도 못 나오고 있다.

당시 김영삼 정부 하에서 초대 외교부 장관을 지낸 한승주 현 주미대사는 1993년 비엔나 대회에서 "한국이 이제 민주주의와 인권에서 성년(come of age)이 되었다"고 자신 있게 선언했었지만, 성년이 된 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인권에서는 여전히 걸음마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53개 유엔 인권위 정회원국으로 활동한 지도 10년이 넘었지만, 지금까지 스스로의 자발적 주도로 결의안 한번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 한국정부의 초라한 인권현실이다.


'인권 현실' 왜곡한 채 '국정홍보'만

지난 7일 시민정치적 권리(의제항목 11)에 관한 한국정부의 발언을 보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인권외교는 사라지고 '국정홍보'가 등장한다.

한국정부는 발언에서 2000년 이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과거 비민주적인 군사정권 하에서 자행된 고문 등 불법적 인권침해문제가 드러났으며 이러한 활동으로 불처벌(impunity)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긍정적 효과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알다시피 한국의 인권 현실은 이와 다르다. 고문은 여전히 과거가 아닌 현재의 문제이고, 제주 4·3 민간인학살 문제는 불처벌은커녕 불인정의 단계도 못 넘어서고 있다. 게다가 유엔에서 현재 논의중인 '강제실종에 관한 인권협약'에 국내 경험을 바탕으로 기여한 바도 그다지 없다. 국내 인권현실의 개선에 발맞추어 국제인권문제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며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는 대신 국내 인권수준에 대한 '홍보'와 '왜곡'의 구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국가안보와 다수결에 떠밀린 인권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사형제도 폐지 문제에 대한 발언 역시 예년과 마찬가지로 (여론에 책임을 전가하는) 무책임 외에도 인권에 대한 무지와 감수성 부족을 여실히 드러낸다. 한국정부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은 안보환경 하에서 예외로 취급된다"고 주장하고 "한국에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인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고만 말했을 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이 인정되지 못해 감옥에 갇혀있는 1천명이 넘는 양심수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았다.

사형제도 폐지문제에 관해서도 "사형제도가 법적으로 존재하지만, 1997년 12월 이래 집행을 한 적이 없다"면서 "한국사회의 모든 집단이 참여하는 토론을 통해서 이에 관한 합의를 이루도록 노력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간단히 말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과 사형폐지는 인권이 아닌 정치적 문제라는 것이 한국정부의 주장이다. 즉 국민의 절대 다수가 찬성할 때까지 그러한 인권은 유보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인 셈이다. 경제와 통상의 '국익'에 의해 발전권과 경제·사회적 권리가 실종되었다면, 이번에는 '국가안보'와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시민·정치적 권리가 부정됐다. 이라크전 파병은 국민의 반대여론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추진하던 한국정부가 이번에는 여론을 핑계로 국민의 인권을 보장하고 증진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정부는 유엔 인권위에서 격년으로 채택되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관련 결의안에 반대한 적이 없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발언에서는 유엔 인권위가 보편적 인권으로 인정하고 있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을 마치 "일부 사람들의 근거가 약한 주장"인 것처럼 호도했다. 한국정부는 인권선진국으로 지칭되는 유럽연합에 가입하기 위한 전제 조건의 하나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의 적극적 인정과 사형제도의 폐지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인가?

한국정부는 지금껏 국민들에게만 선진국 국민답게 행동하기를 요구해왔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하에서도 그랬듯이, 인권선진국으로 가는 길의 큰 장애는 '국민'이 아닌 '정부'였다. 인권선진국의 대열에 참여하는 데 오히려 '참여정부'가 장애인 것이 오늘의 뼈아픈 현실인 셈이다.


▣ 한국정부의 발언문 전문은 인권운동사랑방에서 구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