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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제58차 유엔인권위 소식 (5) 인권고등판무관 팔레스타인 파견 결의

파키스탄 주도, 특별회의 민간단체 발언권 봉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 유엔대표단'은 지난 4일 주제네바 한국 대표부를 방문해, 대사 등 관련 직원과 오찬을 겸한 면담을 가졌다. 정의용 대사는 "이번 인권위에서 어떤 외교부가 입장을 취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심정적으로는 이해가 가나, 정부의 기본입장은 아직 변화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하는 발언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의 특수한 상황에 대해 설명할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관련 결의안이 상정되면 '투표 없이 통과'되는 데 반대입장을 적극적으로 표명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 병역거부 관련 특수성 강조할 듯

유엔인권위는 이미 98년부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이 '기본적인 양심의 자유'라는 데 합의하는 결의안을 '표결 없이 통과'한 바 있다. 이때 싱가포르, 중국, 말레이시아 등 이른바 '비슷한 의사를 가진 국가그룹' (LMG: like minded group)은 이후에 "인권위의 합의에 반대할 수는 없었으나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모호한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고, 한국정부도 여기에 서명했다. 2000년에는 '대체복무 등 관련된 모범사례에 관한 조사'에 합의하는 결의안이 '표결 없이 통과'됐고, '비슷한 의사를 가진 국가그룹'은 비슷한 성명을 또다시 발표했다. 그러나 이때는 한국정부가 성명에 동참하지 않았다.

올해도 정부는 "적극적인 반대는 할 수 없다"고 밝혔지만, 표결 이후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가가 주목된다.

이밖에도 이번 인권위에 대한 여러 질문과 답변이 오고 갔다. 테러방지법에 관한 질문에는 '테러리즘과 인권'에 관련해 한국정부의 발언이 준비되고 있다고 했다. 또한 일본이 아시아지역 국가들을 대표해 '민간단체 활동에 제한을 두자'고 주장한 발언(본지 27일자 참조)에 대해, 일본과 한국은 '민간단체에 적대적인 국가가 많은 아시아그룹 내에서 어중간한 위치'에 처해 있음을 전제하고 "전체적인 분위기를 반대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 대사는 한국이 민간단체에 대해 가장 개방적인 국가라고 말하면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등에 관련한 국제민간단체와의 면담요청에 대해 "적극 환영한다"고 밝혔다.

또한 민간단체 대표단이 종교와 신념의 자유에 관한 특별보고관인 아모르 씨를 한국에 초청할 것을 요청하면서 유엔 인권관련 특별보고관의 조사방문을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상시적 초청' 제도의 도입에 관해 질문하자, 대표부는 "검토해 보겠다"고 밝혔다. 특별보고관이 어떤 국가에 방문하려면 반드시 대상 국가의 정부가 초청하는 형식을 띄어야 한다. 이를 위해 현재 전세계 35개국은 인권위원회에 상시적 초청장이라는 것을 제출해 언제든지 특별한 초청절차 없이도 특별보고관이 국가를 방문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이날 면담에 대해 대표단의 이석태 변호사는 "우리의 요구사항을 분명히 전달하고, 정부의 입장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웠다"고 평가했다. 한편 대표단은 한국정부와 관련 국제 민간단체와의 면담을 주선하기 위해 부산한 준비에 들어갔다.


민간단체 탄압 현실화

이번 유엔인권위 초반부터 우려했던 민간단체 탄압이 현실로 나타났다.

지난 5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에 대한 특별회의'에서 민간단체 발언이 시작될 무렵, 파키스탄 정부 대표가 갑자기 '의사진행 발언'을 요청하더니 "시간관계상 민간단체 발언을 생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전에 계획이라도 한 듯 곧바로 알제리와 시리아가 동의를 표했고, 곧이어 표결에 부쳐졌다. 표결결과 아랍국가와 중국 등 대부분 아시아 국가들이 찬성표를 던져, 사상 유례 없는 '비정부단체의 발언권 원천봉쇄'가 자행됐다.

이번 특별회의에는 의장단의 결정에 따라 민간단체 대표단에게 20분의 발언시간이 배정돼 있었다. 파키스탄 등은 '시간관계상'이라는 핑계를 댔으나, 결국 민간단체 발언권을 생략하기 위한 논의와 표결을 하기 위해 애초에 민간단체에게 배정됐던 20분을 허비하는 어처구니없는 작태를 보였다.

이에 대해 팍스로마나의 조셉 라지쿠마씨는 "10여년간 인권위를 참가하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다. 이는 민간 참여를 공식 인정하고 있는 유엔헌장에 위배되는 일"이라고 격앙된 목소리로 비판했다. "더구나 이런 식의 민간단체 탄압이 앞으로 관례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우려가 된다. 오늘 사건은 앞으로 민간단체의 대유엔 활동에 심각한 장애물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고등판무관 1주일 간 팔레스타인 조사

5일 특별회의에서는 이스라엘의 공격을 받고 있는 팔레스타인 내 인권침해 상황 조사를 위해 메리 로빈슨 인권고등판무관을 파견하기로 결의했다. 이는 지난 2일 고등판무관이 '인권문제'의 심각성을 강조하며 자신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한데 따른 것이다.

이날 미국은 "이미 팔레스타인에 지니 대통령특사가 파견됐으며, 콜린 파월 국무장관도 곧 파견될 것이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인권' 문제가 아니라 '안보' 문제"라고 발언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문제는 '미국'이 해결할 문제이지 인권위나 인권고등판무관이 끼어 들 문제가 아니라고 덧붙여 참가자들의 빈축을 샀다.

표결에서는 캐나다와 과테말라만이 파견에 반대표를 던졌으며 (참관국인 미국은 투표권이 없다), 한국 등 아시아 국가, 아랍권과 대부분 유럽연합국가들이 찬성표를 던졌다. 이밖에 영국․독일․러시아 등은 기권했다.

인권고등판무관은 팔레스타인에 1주일간의 조사활동을 위해 파견되고, 돌아오는 대로 인권위에 상황을 보고하게 된다. 현재 이스라엘이 고등판무관의 방문을 허용할 것인지, 허용하더라도 조사활동을 제대로 할 수 있게 할 것인지, 조사단의 안전을 보장해 줄 것인지 등의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안보'나 '국익'의 관점이 아닌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인권'의 관점으로 문제를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결정은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