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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장애인 일자리와 장애인의 자리

중증장애인 공공일자리 정책, 권리 중심으로 나아가야

동료상담 업무를 하던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한 달에 4명, 일 년간 48명의 참여자를 본인이 직접 발굴해야 했으며 참여자 한 사람당 5번씩 총 240번의 면담을 진행해야 했던 사람이다. 정해진 횟수를 채우지 못하면 이미 받았던 급여 중 일부를 반납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급여 반납에 대한 압박과 부담을 느낀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인은 뇌병변 중증장애인이었고, 고용노동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중증장애인 지역맞춤형 취업지원’을 통해 일하고 있었다.

 

장애인 노동의 현재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먹고 살 수 있다. 이는 소수의 특권층이 아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문제이며, 장애인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장애인 고용률은 전체 고용률 66% 대비 현저히 낮은 36%이며, 취업 의사나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는 비경제활동인구 비율 역시 전체 인구는 37%인데 비해 중증장애인은 72%에 달한다. 특히 5대 장애 유형 중에서도 시각이나 청각장애보다는 뇌병변 장애나 발달장애의 경우에 더욱 일자리를 얻기 힘들다. 법으로 공공기관과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에 장애인 의무고용률을 제시하고 준수하지 않을 시 고용부담금을 내도록 되어 있으나, 대부분의 기업들은 차라리 고용부담금을 벌금처럼 납부하고 넘어가려 한다.

물론 장애에 따른 수당과 연금 제도가 있고, 대부분의 장애인은 장애를 지닌 동시에 빈곤하기 때문에 기초생활수급비를 받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수당과 연금, 수급비는 언제나 충분하지 않은 금액이다. 그렇다고 모자란 생활비를 벌충하고자 조금이라도 수입을 만들어보려 하면 그나마 받던 수급도 끊기는 경우가 대다수다. 수급 여부는 치료비나 약값과도 직결되기에, 결국 여타의 노동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장애인 노동 정책과 복지 정책, 그 어느 쪽도 장애인이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보장하지 않는다. 협소한 복지 범위에 비해서 노동의 문턱은 너무 높다. 장애인 노동이 처한 현재이다.

 

중증장애인 공공일자리 정책의 실패

열악한 장애인 노동 실태를 개선하려는 장애운동의 요구와 47일간의 농성 끝에 중증장애인 공공일자리 정책이 만들어졌다. 기존 의무고용제도 등 장애인 노동 정책은 결국 이윤을 따지는 기업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 결과 기업들은 장애인을 고용하는 일과 고용부담금을 납부하는 일 중 어느 쪽이 이득이고 손해인지를 판단하게 되었다. 반면 공공일자리 정책은 장애인 권익옹호, 동료상담, 인식개선, 문화활동 등 중증장애인이 지니고 있는 의사와 능력에 맞는 일자리를 만들어내자는 제안이었다. 문제는 공공일자리 정책을 시행하는 정부 기관이 눈치와 발뺌으로 일관했다는 점에 있다.

중증장애인 공공일자리 정책의 책임부처는 고용노동부지만, 실제 필요한 예산을 의결하는 곳은 기획재정부다. 정책 시행 과정에서 기획재정부는 필요한 예산을 통과시키지 않았고, 고용노동부는 기획재정부의 눈치를 보며 사업을 축소시켰다. 결국 타협하듯이 시범운영을 시작했으나, 정작 만들어진 일자리 역시 근무시간과 급여가 낮을뿐더러 성과와 실적을 요구하고 미달하면 급여를 삭감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일자리 정책 속에서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까지 생겼다. 공공일자리를 요구하며 농성까지 진행했던 장애운동이 현재 시행 중인 정책에 대해서 ‘실패한 일자리 정책’이라 선언하는 이유이다.

 

누구나 노동을 한다

국가가 운영하는 공공일자리가 오히려 중증장애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턱없이 적은 예산만을 통과시킨 기획재정부, 지역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 사업을 떠넘긴 채 무리한 성과를 강요하고 그에 미달할 시 임금을 삭감시킨 고용노동부, 양 쪽 모두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고 예산을 늘리거나 고용노동부의 책임을 강화하는 등 공공일자리 정책의 개선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는다. 장애인의 노동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지 않는 한, 기존 사회에서 요구하는 성과와 그에 따른 평가를 피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은 더 큰 이윤을 낳기 위한 활동으로 이해된다. 효율과 성과로 평가받는 노동의 세계에서 더 느리거나 아예 이윤을 낳지 못하는 장애인의 노동은 언제나 ‘미달’할 수밖에 없고, 경쟁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장애인은 노동하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장애인의 노동에 흔히 뒤따르는 “장애인이 어떻게 일을 해”라는 말에는 장애인이 노동을 통해 재화를 생산하고 이윤을 낳을 능력이 있는지 의심하는 눈초리가 담겨 있다. 그렇기에 장애인의 생계를 노동이 아닌 복지로 해결해야 한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몸도 안 좋은데 집에서 쉬어야지”라는 식으로 기초생활수급제도와 같은 복지의 확충이 더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기생적 소비계층’, ‘세금 축내는 사람들’이라며 이들의 존재 자체를 사회적 부담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는 여전히 만연하다.

그러나 노동을 ‘이윤을 낳기 위한 활동’이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과정’이라고 이해할 때, 이미 누구나 노동을 하고 있다. 흔히 생각하는 재화나 이윤을 생산하지 않는 영역, 예를 들어 교육과 학습, 정치와 사회 활동 등 다양한 영역에서 자신의 조건과 능력에 맞춰 노동하는 사람들이 사회를 구성한다. 마찬가지로 장애인들은 언제나 자신의 조건과 능력에 따라서 노동해왔다. 장애인이 직접 장애인식 개선과 권리 옹호 활동에 나서는 일, 주변에 자신의 탈시설 경험을 나누는 일은 이 사회를 구성하는 노동으로써 그 가치를 지닌다. 공동체의 구성원이기에 서로 마주치고, 연결되며 영향을 주고받는 사회적 관계가 형성되고 이를 사회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이 ‘노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단지 현재 시행중인 공공일자리 정책이 장애인의 다양한 노동을 그 자체로 인정하지 않은 채 이윤의 잣대로만 평가했을 뿐이다.

 

노동을 권리로 이해할 때

노동은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버는 일에 그치지 않으며, 사회 관계망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자 결과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은 권리가 된다. 이는 단순히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것만으로 권리를 보장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특권 계층은 노동으로부터 자유롭지만, 장애인 등 빈곤 계층은 노동으로부터 쫓겨난다. 노동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곧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갖지 못한 사람이이기도 하다. 장애인의 노동이 권리라면, 장애인 노동 정책은 적절한 ‘일자리’를 통해서 장애인이 존중받는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2019년 11월 출범한 장애인일반노조는 강령을 통해 ‘일할 수 있을 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분배하는 새로운 노동’을 제안한다. 새로운 노동을 정립하기 위해서 “장애인이 어떻게 일을 해”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걷어내고, “몸도 안 좋은데 집에서 쉬어야지”라는 선의도 잠시 접어두자. 장애인 이동권 투쟁은 지하철 역사에 엘리베이터와 저상버스를 만드는 등 제반 환경을 개선함과 동시에 장애인을 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로 등장시켰다. 마찬가지로 장애인의 노동권 보장을 위한 노력은 장애인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사업을 넘어 이 사회가 장애인과 어떻게 함께 살아갈지 논의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여전히 누군가의 노동을 이윤과 효율로만 평가하는 사회에서 중증장애인 공공일자리 정책은 각자가 가진 의사와 역량에 주목하자는 제안이자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이기도 했다. 고인의 죽음 이후 고용노동부가 애도를 표하며 중증장애인 공공일자리 정책을 개선하겠다고 말했으나, 노동을 평가하는 잣대가 변하지 않는다면 정책도 중증장애인의 삶도 개선될 수 없다. 그러니 이제 노동을 바라보는 관점을 전환하자. ‘이윤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의 권리’로 노동을 이해할 때, ‘노동’은 사회 구성원들을 평등하게 연결하는 매개가 될 수 있다. 장애인 노동 정책은 장애인의 노동이 가진 가치를 발견하고 북돋아야 한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중증장애인 공공일자리 정책의 변화를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