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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고 최숙현 선수의 외침을 이어받을 책임에 대하여

폭력은 직업 세계의 특수성이 될 수 없다

지난 6월 26일, 철인3종경기 국가대표이자 경주시청 팀 소속 최숙현 선수가 목숨을 달리했다. 고인이 감독과 운동치료사, 선배로부터 여러 차례 구타와 가혹 행위에 시달린 사실도 드러났다. 체육계 가혹행위가 사회면을 장식하는 일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세상에서 그의 죽음을 목도하는 일은 깊은 슬픔과 동시에 절망감을 안긴다. 그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한 다음날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은 어쩌면 그동안 겪은 숱한 좌절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 사람들 죄를 밝혀줘”라는 고인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에 국회는 부랴부랴 관련자들을 불러 청문회를 열었고, 대한체육회와 문체부는 문제 해결 의지를 드러내는 중이다. 스포츠계에 만연한 폭력은 어디서부터 기인했을까, 과연 이번에는 달라질 수 있을까.

 쉽게 변하지 않는 현실

 최숙현 선수의 사망으로부터 1년 전, 쇼트트랙 심석희 선수가 수년간 자신을 지도하던 코치의 폭행 및 성폭력 사실을 고발한 바 있다. 2019년 심석희 선수처럼 2020년 최숙현 선수도 수개월에 걸쳐 자신의 소속이었던 경주시청, 대한체육회 클린스포츠센터, 대한철인3종경기협회의 문을 두드렸지만 이렇다 할 도움을 구하지 못했다. 1년 전과 마찬가지로 청와대를 비롯해 문체부와 대한체육회 등은 강력한 처벌과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으며, 다른 여러 폭행 사건과 마찬가지로 팀 해체와 코치 영구 제명이라는 처방이 내려졌다. 이러한 처방이 폭행 사건의 반복을 막지 못해왔음은 물론이다.

다행히 심석희 선수의 고발 이후 발족한 스포츠 혁신위원회의 권고는 실체적인 모습을 갖추는 중이다. 대표적으로 운동선수보호법(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은 독립적인 스포츠윤리센터 운영과 가혹행위에 가담한 지도자의 자격 박탈을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7차례에 걸친 혁신위원회의 수많은 권고가 의미하는 건 스포츠윤리센터의 설립과 개인에 대한 처벌 강화만으로 체육계의 성/폭력 문제가 해결될 리 없다는 사실이다. 체육계에서 끊임없이 불거지는 폭력 사건은 윤리적이지 않은 개인의 일탈 문제가 아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체육계’ 자체를 들여다봐야 한다.

‘엘리트 체육인’의 세계

박세리, 박찬호, 김연아 등과 같은 세계적 수준의 스포츠 스타들이 각고의 노력 끝에 성공을 이뤘다는 식의 미담은 한국 사회에 널리 퍼져 있다. 그들의 엄청난 상금과 연봉이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으며 운동선수는 인기 있는 직업 중 하나가 되었지만, 이들의 성공담이 미담으로만 전해질수록 다양한 어려움을 직면하고 있는 엘리트 체육인의 삶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옅어진다.

이른바 ‘엘리트 스포츠’ 선수는 생애 이른 시기에 특정 종목의 스포츠 선수로 진로가 정해져 초중고대에 걸쳐 전문 운동선수로 육성되는 사람들을 말한다. 생활 속에서 신체를 단련하고 즐기는 ‘생활 체육’과 대비되는 전문 스포츠 활동이며, 국가는 이 엘리트 스포츠계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국민적 기쁨과 국가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좋은 정치적 도구로 활용해왔다. “국민체육을 진흥하여 국민의 체력을 증진하고, (…) 체육을 통하여 국위 선양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국민체육진흥법」은 대한민국 스포츠 정책이 다분히 기능적이고 성과 지향적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이는 스포츠 활동을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관습적 인식을 만들었다. 대한민국이 스포츠 강국일지언정, 다양한 스포츠를 일상생활에서 누리며 그로 인한 즐거움을 느끼는 건강한 사회가 되지 못하는 이유다.

필연적으로 엘리트 스포츠계에는 오로지 점수로 평가하고 인정하는 문화가 강고하다. 선수는 물론 지도자도 마찬가지로, 경기 실적만이 지도자를 평가한다. 스포츠 혁신위원회가 국가대표 지도자의 사대보험 및 퇴직금 보장 등 근로환경 개선을 권고한 배경에는 성적에만 혈안이 된 엘리트 체육의 시스템이 있다. 또한 엘리트 운동선수들은 평생 한 가지 종목의 운동에 매진해 온 탓에 다른 삶의 경로는 사실상 차단되어 있다. 선수로서 인정받지 못하면 꽤나 이른 나이에 찾아오는 은퇴 후의 삶도 막막하다. 자연스럽게 선수들은 더 높은 기량과 성적을 위해 훈련에 매진하게 되고, 자신의 기량을 높여준다는 이유에서 지도자의 어떤 폭력에도 복종하게 되는 위계 문화에 길들여지게 된다. 성과 앞에서 ‘폭력’은 ‘지도’로 둔갑한다.

선수들에게 피해가 발생했을 때 마땅히 문제를 제기할 곳을 찾기도 힘들다. 국내 스포츠 사업을 총괄적 집행하는 대한체육회의 상층부는 대부분 엘리트 체육인 출신들이 차지하며 그들이 특권적 파벌 문화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포츠인권센터나 비리신고센터에 피해를 호소하더라도 책임을 지닌 대한체육회가 제대로 사건을 처리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대한체육회는 늘상 비민주적이고 부패한 운영에 대해 비판받았으며, 폭행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제 식구 감싸기 논란은 빠지지 않았다. 폭력적이고 폐쇄적인 엘리트 체육인의 세계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폭력은 체육계의 특수성이 될 수 없다

최숙현 선수 사망 이후 꾸려진 ‘철인3종경기 선수 사망 사건 공동대책위원회’는 체육계로부터 독립적이고 책임 있는 진상조사단을 요구하고 있다. 철저한 조사와 책임자 엄중 처벌은 공대위의 굵직한 요구 중 하나다. 7차에 걸쳐 권고안을 낸 스포츠 혁신위원회는 독립적인 인권보호 기구 설립과 더불어 지금과 같은 엘리트 선수 육성 시스템의 변화와 이를 관장하는 대한체육회의 권력을 분산시키는 구조 개편, 생활체육이 중심이 되는 이른바 모두를 위한 스포츠 기본법 제정 등 사실상 체육계의 거대한 전환을 주문하고 있다. 메달로 대표되는 성과를 위해서 용인되어온 스포츠계의 폐쇄성과 폭력성을 바꾸라는 주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변화를 위해 체육계가 선수들의 구체적인 삶터이자 일터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은 중요하다. 최숙현 선수는 경주시청에 고용되어 경주시장과의 1년간 입단 계약을 맺고 코치의 지휘·감독 하에 상시 출근하여 훈련을 받고 고정적인 급여를 지급 받았던 일종의 계약직 노동자였다. 그의 입단협약서를 보면 최 선수는 계약해지 사안에 대해 일체의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고, 계약해지 사유는 성적이 부진하거나 경주시가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라고 규정되어 언제든 해고 위협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불안정한 조건이었다. 동시에 불리한 고용 조건이나마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을 평가하는 지도자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대부분의 직업 체육인들은 운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여타의 직업세계에서도 일어나는 위력에 의한 폭력이나 직장 내 괴롭힘에 노출되곤 한다.

운동선수를 일하는 사람으로 규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운동선수가 마주한 체육계의 폭력적 문화는 ‘일터 내 권력 관계’의 문제보다는 ‘체육계의 특수성’으로만 이해되어왔다. 그러나 ‘체육계의 특수성’이라는 말로 만연한 폭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오랜 관습’은 폭력의 근거가 아니라 변화의 대상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상조사단의 최우선 과제는 선수들이 목소리를 내기 힘든 권력 구조를 밝혀내는 것이다. 또한 이미 제시된 혁신위와 공대위의 요구 이행은 체육계 변화를 위한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선수들에게 힘이 주어져야 한다

나아가 최숙현 선수와 같은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릴 수 있어야만 한다. 선수들이 스스로가 겪는 어려움을 폭력으로 규정하고 부정의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갖기 시작할 때 지금과 다른 변화가 만들어질 수 있다. 사회적인 관심이 덜한 비인기종목의 경우 선수층 자체가 얇아 조직 자체가 쉽지 않을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조직된 피해자와 연대자의 목소리가 절실한 가운데, 최숙현 선수 폭력 사건 공대위에서 함께 하고 있는 빙상계 선수들이 만든 젊은 빙상인 연대라는 단체에 주목하게 된다. 이들은 메달 획득이나 결과 우선주의에서 벗어나 훈련 과정에서 선수의 인권이 보호되는 환경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자,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 중심으로 폭력 사건을 다루는 연맹에서 피해자 편에서 서서 함께 대응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작년 심석희 선수가 성폭력 피해 사건에서도 연맹에 대립각을 세웠고, 그 결과 한국체육대 전명규 교수 1인 체제라고 알려진 강고한 빙상연맹의 힘에 균열을 냈다. 선수들의 목소리와 주장에 힘이 주어질 때, 폭력적이고 폐쇄적인 스포츠계 문화를 바꿔나갈 수 있다.

7월 29일 대한체육회의 이사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대한체육회는 철인3종협회 임원 전원을 해임하고, 철인3종협회를 대한체육회가 관리하는 단체로 지정했다. 이사회에서 이기흥 회장의 “통렬히 반성하겠다”는 메시지도 등장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 체육계에 대한 문제 진단은 이미 끝났고, 변화를 위한 구체적 요구들도 쌓여있다. “그 사람들 죄를 밝혀달라”는 최숙현 선수의 외침이 체육계 전반을 변화시킬 책임으로 이 사회에 남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