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으로 읽는 세상

불안정 노동자가 주어가 되는 합의문은 불가능했을까

노사정 합의 불발, 문제는 불발이 아니라 내용이다

지난 5월부터 진행되어온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대표자회의'가 최종 합의에 이르지 못해 7월 1일 열리기로 한 협약식이 취소되었다. 고용유지지원금 연장, 휴업수당 확대, 상병수당 도입여부, 전국민 고용보험 추진방안 등 코로나19로 위기를 겪고 있는 노동자, 특히 취약계층이라 불리는 비정규, 하청, 특수고용 노동자와 같은 불안정 노동자들에게 미칠 영향이 적지 않은 의제들을 다루는 논의인 만큼 그 결과가 주목되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불안정 노동자들이 오히려 노사정 합의를 반대하며 민주노총 위원장을 막아섰다. 노사정 각자의 구상은 다를지언정 불안정 노동자를 지원하자며 합의안을 만들었는데 오히려 불안정 노동자들이 이 합의를 반대하는 이유는 뭘까?

취약계층 노동자는 일부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번 노사정 잠정합의안의 구체적 내용을 보기 전에 민주노총, 한국노총으로 조직된 200만 노동자와 그 바깥의 수많은 불안정 노동자로 나뉜 한국사회 노동현실부터 짚어봐야 한다. 1997년 외환위기 이전까지 10%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달성하던 한국 사회에서 기업의 성장은 노동자에게도 임금 상승의 효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외환위기를 변곡점으로 기업은 노동자를 분할하는 전략을 취하기 시작했다. 소위 노동유연화라는 이름으로 정리해고와 파견이 법적으로 가능해졌다. 모든 업무가 생산에 필수적이지만 기업은 온갖 이유를 붙이며 '핵심' 업무와 '비핵심' 업무를 나누었고, 비핵심 업무의 노동자를 정리해고했다. 경제위기의 순간을 해고로 버틴 기업은 다시 '비핵심'업무의 노동자를 복귀시켰다. 단 복귀한 노동자에게는 비정규 노동자, 하청 노동자, 외주 노동자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그렇게 기업은 '그냥' 노동자를 소수의 정규직 노동자와 다수의 불안정 노동자로 나누면서 외환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급한 위기를 넘긴 이후에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으로 나뉜 노동시장의 구조는 더욱 확고해졌다. 

이러한 흐름은 민간부문과 공공부문을 가리지 않고 보편적인 고용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최근 비정규직 보안업무 노동자의 정규직화 전환 논란이 일고 있는 인천국제공항공사가 대표적이다. 정규직 전환과정이 불공정하다는 비판과 함께 현재 정규직보다 많은 인원을 정규직으로 새롭게 전환하는 것은 과도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문제는 인천국제공항공사가 애초에 지나치게 적은 정규직 직원으로 출발했다는 데 있다. 2001년 개항한 인천국제공항공사는 직접 채용하는 정규직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공항 업무에 필수적인 공항운영, 설비 및 시스템, 보안경비까지 전부 비정규직으로 고용했다. 그 결과 인천국제공항공사에는 1만 명에 달하는 노동자가 일하지만 정규직은 1,500명이 채 되지 않는 기이한 고용 구조를 갖게 됐다. 비정규직이 너무 많이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 비용절감을 이유로 비정규직만 채용하며, 극단적인 고용구조를 만든 국가의 책임부터 묻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민간기업의 사정은 말할 것도 없다. 동일한 공장, 동일 사업장 내에서조차 사내하청이니 파견이니 하는 온갖 형태의 고용 형태가 등장했다. 계약직, 하청, 용역, 도급, 온갖 이름의 불안정 노동자를 가리키는 말들이 익숙해지기 시작하자 최근 몇 년 사이에는 플랫폼 노동이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배민라이더스나 쿠팡플렉스와 같이 노동자와 사업자 간의 근로계약관계가 아니라 사업자와 사업자 간의 업무 위탁 방식의 노동이 기존의 노동관계 바깥에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20여 년 동안 국가와 기업이 합작해 만든 한국사회 노동자의 현실이다. 코로나19가 촉발한 위기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불안정 노동자 지원이 아닌, 권리보장

공공부문, 대기업의 정규직과 불안정 노동을 이어가는 사람들 간의 핵심적인 차이는 노동조건 그 자체보다 이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여부다. 코로나19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기 위해 어떤 정규직 노동자가 재택근무를 하며 조금은 불편한 시간을 보낼 때, 또 다른 하청 노동자는 무급휴직이냐, 자진 퇴사냐를 강요받는 상황이 펼쳐졌다. 고용이 안정된 노동자가 자가격리에 들어가면 회사와 상황을 공유하고 업무를 협의하지만, 협의할 회사가 불분명한 일용직 노동자가 자가격리에 들어가면 당장 생계부터 막막해지기 십상이다. 불안정 노동자에게 코로나19는 감염위험을 넘어 불평등한 노동자 권리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물론 정부도 그저 손 놓고 있던 것은 아니다. 긴급재난지원금부터 고용유지지원금, 특고, 프리랜서, 자영업자 지원금까지 온갖 종류 지원금이 등장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6개월 이상 장기화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단기적인 현금 대책은 말 그대로 단기대책에 불과하다. 수십조, 수백조 원의 지원이니 3차 추경이니 가늠도 되지 않는 액수가 언론에 오르내리지만 불안정 노동자가 처한 구조를 바꿀 정책의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지난 4월 정부는 항공, 조선, 자동차 등을 기간산업으로 지정하고 40조 원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고용총량을 90%이상 유지할 것을 전제하는 지원으로 논의되었지만, 의무사항이 아닌 '노사가 고용유지를 위해 노력한다'로 바뀌었다. 그 결과 아시아나케이오와 같은 항공사의 자회사는 고용유지에 한푼도 쓰지 않겠다고 작심했는지 지원을 거부했다. 오히려 노동자에게 무급휴직이나 자진퇴사를 강요했고 이를 거부한 노동자들은 해고를 당해 거리로 내쫓겼다. 항공업무에 필수적인 기내청소와 수화물 분류작업이지만, 일감이 떨어지면 언제든 노동자를 해고하거나 업체를 폐업해버리면 되는 하청구조 속에서 업체의 고용유지의무나 이를 지원하기 위한 각종 제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아시아나항공의 일을 했지만 그 누구도 고용책임을 지지 않는다.

항공사만의 특별한 사정이 아니다. 직장갑질119에서 진행한 '코로나19 6개월, 직장생활 변화' 설문조사에 따르면 정규직의 4%가 실직을 경험할 때 비정규직은 26%가 실직을 경험하고 있으며, 월 500만 원 이상 고임금 노동자는 2.5%가 실직을 경험하지만 월 150만 원 버는 노동자는 25%가 실직을 경험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행할 수 있는 역량, 자가격리에 들어가도 생계를 해결 할 수 있는 역량, 위기와 재난에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을 모조리 빼앗긴 불안정 노동자에게 아무리 재난지원금을 준다고 한들 삶을 지켜내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다.

제때 임금이 지급되지 않으면 임금을 요구 할 수 있는 권리, 일할 때 아프거나 다치면 직장에서 잘리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쉬고 다시 일할 수 있는 권리, 위험한 작업환경에서 일하지 않고 부당한 작업 지시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 등. 노사정이 다루어야 하는 주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노동자에게 권리가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핵심은 누가 권리를 보장할 것인가, 누구에게 요구할 것인가에 있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가 회사에 자신의 권리를 책임질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것과 달리, 불안정 노동자는 누구에게 자신의 권리를 요구할 것인가부터 막막하다. 이 막막함을 노사정이 모여서 어떻게 해소할지를 확인하고 마땅한 책임을 나누는 것이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대화'의 핵심이 되었어야 했다.

불안정 노동자가 주어가 되는 합의문은 불가능했을까

노사정의 대화는 개별 기업의 임금 협상과는 다르다. 임금 협상은 이미 협상할 권리를 가진 노동자와 사용자 간의 협의 테이블이다. 하지만 노사정 대화는 사용자와 협상할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불안정 노동자를 포함해 모든 노동자의 권리를 이 사회가 어떻게 보장할지 고민하는 자리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계의 대표로 참여하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자신들이 대표하는 조합을 넘어서 전체 노동자의 목소리를 대변해야하는 사회적 책임감이 요구되는 자리였다. 하지만 협상 기간 동안 회자된 이슈라고는 정규직 노동자가 임금 일부를 양보해 비정규 노동자를 지원하자는 논의를 넘어서지 못했다. 잠정 합의문 역시 불안정 노동자의 권리는 한 줄도 기입하지 못했다.

노사정 대화 테이블에서 불안정 노동자에 대한 지원을 다루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합의문의 주어에 대한 이야기다. 노사가 사내 협력 업체와 상생 협력하고, 노사가 협력업체 노동자의 고용유지를 위해 노력하고, 노사가 각종 복지기금을 활용해 협력업체 노동자를 지원할 때의 '노(勞)'가 누구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합의의 핵심은 누가 누구를 지원할 것인가 그 자체가 아니라 비정규 노동자가 주어로 등장할 수 있는가 였다. 회사가 어렵다고 해고해놓고 하청 업체 사장은 나 몰라라하는 상황에 놓인 하청 노동자는 누구에게 복직을 요구 할 수 있는지, 일감이 끊겨 생계가 어려워진 불안정 노동자가 정부의 지원 대책만 손놓고 기다리지 않을 수 있도록 누가 이들의 노동권과 생존권을 책임질 것인지를 이야기했어야 했다. 불안정 노동자가 주어로 등장하고 권리를 보장 받을 수 있는 합의문이 협상 테이블에 올랐다면 노사정 합의가 지금과 같은 결과는 아니었을 것이다.

인천공항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화 전환 과정만 보더라도 그렇다. 정규직 전환이 더 많은 노동자가 정당한 권리를 획득하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지기는커녕, 반칙으로 특권을 얻는 사람처럼 여겨진다.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사람들은 고용형태만 바뀌는 것이지 기존 정규직과는 임금도 다르고, 처우도 다를 것이라는 해명 아닌 해명으로 진땀을 쏟고 있다. 공공부문이나 대기업에 다니는 정규직과 불안정 노동자의 노동세계는 철저히 위계화되어 있다. 비정규직이 자격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영세업체에서 일하면 신분이 낮은 것처럼 여겨지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일수록 불안정 노동자의 자리를 확보하고,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전망이 절실하다. 불안정 노동자의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전망을 제시하는 길에 민주노총과 같은 조직된, 투쟁으로 권리를 쟁취해 온 노동자들이 앞장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