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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판사님, 높은 의자에서 쳐다보지 말고 같이 눈높이를 맞추어 보는 건 어떠세요?

판사님, 높은 의자에서 쳐다보지 말고 같이 눈높이를 맞추어 보는 건 어떠세요?

훈창(상임활동가)

5차 희망버스 인권침해감시활동 중 연행된 훈창이에요. 지난 10월 25일에 공무집행방해죄에 대한 2번째 재판에 선고가 끝나고(무죄를 받았답니다^^) 올라오는 기차에서 이런 저런 생각이 들어 간단하게 쓴 글을 후원인분들과 나누고 싶어 이렇게 사람사랑 편지로 올리게 되었습니다^^



아 드디어 재판이 끝나가는구나. 5차 희망버스 공무집행방해죄 2심 선고 재판을 앞둔 그때의 솔직한 마음은 딱 그 한마디였습니다. 희망버스에 함께 했던 많은 사람들의 얼굴, 끝나지 않은 한진중공업의 상황, 그리고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등 산적한 노동탄압에 맞서 싸우는 그 사람들보다 제 마음은 1년 동안 지속되어온 지겹도록 지겨운 재판이 이제 끝났구나. 그게 먼저였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생각한 건 꽤 피곤하게 살아가는 하루하루 속에 재판을 받기 위해 부산을 왕복해야 했던 피곤함에서 해방됐다는 마음의 풀림과 함께 무겁디무거운 권위에 대한 불편함을 다시 마주치지 않을 수 있다는 기쁨(??)이었던 것 같습니다.

서울에서 살며 부산에 재판 내려가는 건 결코 편한 건 아니었습니다. 특히 현행범으로 연행되어 증인이 부산에 있는 상황으로 인해 재판을 옮길 수 없어 아침 9시, 10시까지 부산에 내려가야 한다는 압박은 편하게 잠을 잘 수 없게 했으며, 신원확인과 증거제출 검토를 마친 후 (이 자리에서 저는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만을 말하였습니다.) 그 허탈함은 더 황당하였습니다. 단지 5분간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나를 보여주기 위해 5시간 부산에 가 얼굴도장 찍고 다시 올라온다는 건 정말 황당하기 그지없었습니다(그래도 이땐 변호사와 상의를 하기 위함이란 명분이라도 있었습니다. 선고 재판은 1분을 위해 하루 종일 이동만 했습니다. 저도 시간이 소중한 사람인데…….).

하지만 그건 불편함의 순간 정도였습니다. 저를 불쾌하게 만든 건 재판의 권위와 검사의 무책임함이었습니다. 검사의 무책임함은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저 같은 잡법(??)은 재판에 저를 조사하고 기소한 검사가 오지 않고 공판에 참여하는 검사가 왔습니다. 도대체 누가 저를 기소한 건지조차 볼 수 없다는 건 그렇다 쳐도, 기소이유서가 논리에 맞지 않다는 판사의 질문에 대답조차 못하는, 제가 왜 기소된 건지, 기소의 구체적 이유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검사를 보며 황당함을 떠나 열이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소이유를 기계처럼 읽고 재판의 논쟁과 무관하게 누군가 써준 구형 6개월을 읽는 그이를 보면서 도대체 이 재판의 의미는 무엇일까, 란 생각뿐이었습니다. 검사는 무엇을 보며 기소했고, 어떤 논리로 기소한 건지 그걸 읽고 있는 당신은, 저에게 구형 6개월을 말하는 당신은, 대한민국 엘리트라고 이야기되는 당신은 이해할 수 있냐고 묻고 싶었습니다.

재판의 권위는 이와는 조금 다른 문제였습니다. 제 재판을 담당한 재판부는 꽤 괜찮은 재판부였습니다. 피고인에게 다그치듯 캐묻지도 않았고, 내가 당신보다 높은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기보다 난 당신의 이야기를 유심히 듣고 있다, 그리고 당신이 이야기를 충분히 하면 좋겠다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이건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정에서 피고인의 위치는 권위와 권력 속에 가장 밑에 위치할 수밖에 없는 거였습니다. 제가 하는 한마디 말, 옷차림 하나도 판사의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 어떤 행동, 어떤 단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판사가 날 보는 시각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건 결국 나다운 나를 보여주는 것보다 그에게 보이기 위한 나를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그렇다고 거기서 제 가치와 어긋나 말한 건 아니지만 그 권위 앞에 스스로 벌벌 떤 건 사실입니다.) 판사가 나에 대해 결정할 수 있다는 것, 검사/변호사/판사와 다르게 나는 재판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 나를 위에서 쳐다보는 판사의 위치, 이 모든 것은 저를 그 권위의 밑으로 위치 짓게 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그것은 재판 내내 긴장하고 얼어붙은 저를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2심 재판에선 더 심했습니다. 판사가 1명만 있던 1심과 다르게 세 명의 판사가 높은 곳에서 날 내려다보는 시선에 전 더욱 더 긴장하고 쫄아있었으며 (똑같은 옷차림을 한 3명이 날 위에서 쳐다보는 거 꼭 저승사자 같았습니다), 너무나 빠른 재판 흐름에 적응조차 하기 힘든 상황에서 결국 판사가 저에게 거는 말 한마디에조차 대답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이어졌습니다. 재판의 권위스러움에 대해 생각하게 된 건 그것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5시간 동안 내려가서 제대로 한 마디조차 못하고 올라와야 했던 그날. 판사 3명이 절 내려다보는 순간 쫄아버려 한마디조차 못한 그 순간에 대한 분함과 스스로에 대한 자책에서 시작하여, 저 같은 활동가도 한마디도 못하는 그 재판장에서 더욱더 그런 경험과 권위에 저항하기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 됐습니다. 그 상황에서 마음 속에 있는 한마디 억울함, 분함, 속상함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렇게 그 이야기를 하지 못한 채 판결을 받는다면 그 판결이 가진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됐습니다.

왜 우리 재판장은 판사가 높은 자리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을 하고, 피고인과 변호사는 판사를 우러러보며 말을 해야 할까 생각했습니다. 공정한 판결은 권위에서 나오는 게 아닌데, 왜 재판장의 권위를 지켜야 하는지 고민되었습니다. 판결의 권위와 판결자의 권위가 같지 않은데 꼭 판결의 권위와 판결자의 권위가 같아 보였습니다.

재판이 공정하고 판결에 권위가 생기려면 판사와 피고인, 검사, 변호사가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논쟁을 하고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곳에서 권위가 누군가에게 집중되어지고 권위에 기대어 판결에 대해 복종을 요구한다면 판결 자체의 진실보단 판결을 내리는 사람, 그리고 공권력이란 곳에 대해 복종해야 하는 걸로 이어지는 건 아닐까. 지금 재판의 모습은 꼭 그렇게 보여 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