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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2007년을 멈춰라?

며칠 전 신문을 뒤적거리고 있자니 흥미로운 기사가 눈에 띄었어요. 프랑스 낭트에서 올해의 마지막 날을 기해 새해가 오는 걸 반대하는 시위가 열릴 예정이라는 겁니다. 사빠띠스따처럼 복면을 뒤집어쓰고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새해반대전선’은 “시간이 흐른다는 건 지구와 우리가 무덤으로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간다는 뜻”이라며 이 비극을 왜 기뻐해야 하느냐고 반문하더군요. (끄덕끄덕~) 그러더니 의미심장한 농담을 건네는 것도 잊지 않더군요. “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 2007년이 우리를 무시하고 닥쳐온다면, 파리 엘리제궁까지 가 2008년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일 것이다.” (이 사람들, 거 참 재밌네..) 너도 나도 새해를 맞으며 따뜻한 덕담을 건네고 새해가 다가오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고 주입받는 요즘, ‘늙고 더워지는 지구에서 죽음을 향한 미친 질주를 중단하라’고 외치는 이들의 목소리는 쌈빡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인간이 통제할 수만 있다면, 새해 반대 시위에 나설 이들이 과연 낭트의 ‘괴짜들’뿐일까요? 비정규직법안이 얼마 전 결국 국회를 통과했지요. 이제는 2년마다 한 번씩 보따리를 싸야 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내년 1월이 2006년의 13월이기를 간절히 원할 테지요. ‘내년에도 농사짓자’고 그리 목 놓아 외쳤건만 속절없이 생명의 땅을 내놓아야 하는 평택 대추리와 도두리 주민들의 마음은 또 어떻겠습니까? 아, 그렇지. 한미FTA 협상 최종 시한도 내년이고 대통령 선거도 기다리고 있구나……. 모락모락 열을 더해가는 전쟁과 파괴의 기운은 또 어떻고요? 하나하나 헤아려보자니 한도 끝도 없네요. 그래도 시간은 기어코 흘러 2007년은 우리 턱밑까지 차올랐다 저 멀리 달아나겠지요. 속절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남부럽지 않은 자산이라면 오기와 배짱 아니었던가요? ‘절망의 산에서도 희망의 돌을 캐내는’ 바로 그 힘, 그 쟁기질을 새해에도 바지런히 하려면 내공을 더 다져야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렇겠지만, 새해가 온다고 하니 개인적으로는 나이듦에 대한 생각이 부쩍 잦아집니다. 술자리의 단골메뉴가 되기도 하구요. 내년이면 30대의 후반부, 인생에서도 후반부를 준비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니 복잡한 심경이 되나봅니다. “어여 결혼해. 지금이야 혼자가 가뿐하겠지만 늙으면 쓸쓸하다.” 지금까지는 엄마의 레퍼토리를 들을 때마다 슬쩍 흘려들을 수 있었지만, 왠지 올해는 그렇지 않네요. 문득 내가 벌써 마흔을 바라보고 있다는 게 어이없게 느껴지기도 하고 뭔가 비장한 결단이 필요한가 싶기도 하고…. ‘비혼’(非婚)의 길을 걸어가는 30대 후반의 여성활동가로서 갖게 되는 불안과 긴장이 내 정서에 미치는 영향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고나 할까요? 특히 올해에는 나보다 나이가 훨씬 적은 청소년들과 주로 운동을 함께하다 보니, 내 위치와 경험으로 인해 갖게 될 ‘권력’에 대한 경계가 많이 생깁니다.

그렇다고 누군가처럼 나이가 드는 게 마냥 불안하고 싫은 건 아니에요. 좀더 여유로워질 것 같기도 하고, 나이와 상관없이 내년에는 또 어떤 새로운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도 되고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새해에는 한 살 더 나이를 먹은 나를 위해 특별한 선물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나이듦을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나이듦을 충만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색의 시간을 충분히 가져보려고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열어둘 수 있는 용기, 가진 것을 놓을 줄 아는 용기, 새로운 도전을 주저하지 않는 용기, 나이권력에 대한 긴장을 내 자신에게도 비출 줄 아는 용기… 이런 녀석들이 쉽게 오지는 않을 테니까요.

돌이켜보니 올해 세웠던 새로운 도전 계획들 중에 반타작은 했네요. 육고기를 입에 대지 않겠다는 계획은 꾸준히 실천했지만 약탈적 사육방식에 대한 고민은 무르익지 못했어요. 자전거 ‘단지’(이 녀석은 보물단지였다 애물단지였다 그래요)를 만나 꾸준히 페달을 밟았지만, 정작 이 녀석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잘 모르고 있어요. 기타를 배우겠다는 계획은 그야말로 계획에 그쳤고, 연극은 사랑방 후원의 밤과 민중총궐기 때 평화마술을 함께한 정도에 그쳤어요.

새해 ‘나이듦’과 마주하겠다는 계획은 어느 정도 결실을 보게 될까요? 문득 새해가 품은 광막한 공간들이 기다려집니다. 여러분은 어떤 공간으로 걸어가실 건가요?

“줄을 벗어났으니
광막한 공간이 나를 품어줄 것이다”

- 조향미, <탈선(脫線)> 중에서